유머는 공감을 전제로 합니다. 나 혼자만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다는 유대감, 소수자의 약점을 조롱하지 않는 무해함, 참담한 현실을 자조하는 쾌활함 모두 대상을 이해하고 무례하지 않겠다는 다짐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유머만큼 영리하고 우아해야 할 행위가 또 없습니다.
요즘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여성 크리에이터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2030 여성이 특히 그들에게 열광하는 데엔 공감을 기반으로 한 예리하고 용감한 유머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 독창적으로 ‘웃긴 동영상’을 소개합니다.
흑역사를 추억하는 인류학자,
사내뷰공업

“명예 인류학자”로 불리고 싶다는 포부처럼 다양한 자캐(자작 캐릭터)를 가진 크리에이터입니다. 대표적인 캐릭터론 캠퍼스 환상에 부푼 15학번 새내기 박세은, 남자 앞에서만 귀여운 척 하는 귀척 빌런 고딩 김민지, 일진 행세하는 중2 황은정 등이 있습니다. 갓 성인이 된 대학생의 어설픔, 괜히 센 척 하던 중고등시절의 허세를 유독 잘 그려냅니다.
사내뷰공업이 재현하는 캐릭터 대부분은 90년대생 여성입니다. 조회수 570만 회가 넘는 인기 캐릭터 ‘황은정’은 2010년을 배경으로 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입니다. 노스페이스 패딩, 컴싸 아이라인, 새하얀 비비크림과 초코송이 머리로 멋을 낸 채 일진 행세가 쿨하다 생각하는 어린 친구입니다. 하지만 수저통을 씻지 않아 엄마에게 혼나고, 이 사랑이 영원할 거라며 투투 편지를 눌러 쓰는 모습을 보면 마냥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 시절 반에 꼭 한 명은 있었던 것 같은 친구, 당시의 십대 문화를 그대로 체화한 캐릭터입니다.
이 은정이가 자란 2015년엔 대학 새내기 ‘박세은’이 있습니다. 유행에 맞춰 봄웜 화장을 하고 테니스 스커트로 멋을 낸 채 첫 조별과제를 하는 신입생. 과일소주의 숙취마저도 즐겁고 설레는 시기입니다. <청춘 다큐>나 <남녀탐구생활> 등 그 당시 TV 프로그램 포맷을 패러디해 그때 그 감성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사내뷰공업의 영상은 남이 아닌 나를 떠올리며 웃게 됩니다. 그리 낡은 과거가 아님에도 다시 들여다보면 너무나 촌스럽고 건방졌던 나의 흑역사. 아직 세상을 몰라 어리버리했지만 그만큼 순수하고 기운 넘쳤던 시절에 대한 회상입니다.
K-드라마 클리셰의 정복자,
엄은향

K-드라마의 집합체입니다. 생뚱맞은 전개, 억지스러운 로맨스, 감정 과잉 신파. 모든 한국 드라마 클리셰가 그녀의 몸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재벌남과 억척녀의 계약 연애, 앙숙 남녀 주인공의 혐관 로맨스, 암 진단을 받은 엄마와 무심한 가족들, 형사 잠입물과 환생 판타지까지. 제목만 봐도 훤히 알 것 같은 클리셰를 모아 맛깔나게 연기합니다. 딱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콘텐츠를 보고 있노라면 이 오글거림을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는 반가움에 웃음이 납니다. 대중문화를 같은 방식으로 즐기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걸 알게 되죠.
엄은향 숏폼의 특징은 드라마 클리셰와 현실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할 때, 드라마 vs 현실]이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상황에서 드라마와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출산할 때’라는 컨셉에선 미혼 임산부의 몸으로 굳세게 살고 있는 여주와 임신 사실을 모른 채 애타게 그녀를 찾고 있는 남주의 극적인 상봉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걸 현실에 적용한다면 “환자분 애 낳게 나오세요”라는 호출에 만삭의 임산부가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차갑고 무미건조한 병원을 보여주는 식입니다.
엄은향은 사회, 여성 문제에도 거리낌없이 목소리 냅니다. ‘여대생 드라마 vs. 현실’ 영상이 대표적인데요요. 드라마 부분에선 어설픈 분장으로 여대에 잠입한 형사 코미디를 그렸다면, 현실 파트에선 “공익 전환을 반대한다”고 외치자 분개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여주며 동덕여대 남녀공학 전환 반대 시위 사태를 재현했습니다.
또 “딥페이크 안 당하는 꿀팁”에선 자발적으로 얼굴을 가려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능청스럽게 연기했죠. 딥페이크 범죄에 대해 여학생들을 강당으로 불러 ‘스스로 조심하라’며 성차별적이고 무책임한 교육을 한 사례를 비판했습니다. 진지한 성명문이 아닌 짧은 유머 영상으로도, 충분히 굵직한 지지를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 대신 따져주는 대변인,
하말넘많

중독적인 입담만으로 여럿을 홀린 여성 듀오 크리에이터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의 줄임말인 크루명 ‘하말넘많’처럼 그들의 일상에서 보고 느낀 다양한 사유를 재치있게 떠듭니다.
대표적인 영상으론 “경상도 사투리 특강”이 있습니다. 매체가 연출하는 과하고 어색한 미디어 사투리를 지적하며 실제 사투리는 어떻게 발화되는지 알려줍니다. 많고 많은 사투리 콘텐츠 중 유독 그들의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이유는 섬세함과 친밀감입니다.
그들의 강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무슨 일이니?’를 사투리로 변환하면 ‘뭐고?’가 아니라 ‘와 찌랄이고!’라고 합니다. ‘뭐고’는 감정을 싣어 시비 거는 느낌이고, 사투리 원어민은 ‘와 찌랄이고’를 더 자주 쓴다고 합니다. 매우 친한 친구 사이, 혹은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다 한 소리 들을 때 사용된다는 설명까지 덧붙이죠. 미디어에 익숙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섬세한 예시, 원래 사투리를 쓰는 사람에겐 그래 이거지! 하며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반가운 콘텐츠입니다.
‘하말넘많’을 검색하면 늘 따라오는 키워드는 ‘페미니즘’입니다. 크리에이터 본인도 이 단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며 채널의 기획 의도 또한 페미니즘입니다. 비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제테크, 품질이 더 좋은 남성복 리뷰, 꾸밈 압박과 인생샷을 벗어 던지고 떠난 여행 브이로그 등 관습적인 여성성을 지적하고 탈피하는 콘텐츠도 만들고 있습니다. 비혼 라이프를 기록한 페미니즘 에세이 『따님이 기가 세요』를 출간하기도 했죠. 끊임없이 반복되는 여성 문제에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소리쳐주는, 2030 여성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유머는 누군가 기분 나쁘거나 상처를 받아선 안됩니다. 그런 비겁한 유머는 대부분 약자를 멸시하는 우월감과 무례에서 비롯되죠. 그래서 이 여성 크리에이터들은 자신의 안에서 유머를 생성합니다. 비슷한 감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같은 것에 분노하고 있다는 연대가 이 유머를 더 온전히 재밌게 만듭니다. 타인을 공감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눈부신 성과들, 우리가 속 시원히 웃고 즐길 수 있는 유머도 그 중 하나라는 걸 기억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