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 상처를
묵묵히 위로하는 영화 3편

서로를 교차하며
상실을 이겨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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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됩니다. 우리는 결국 어떤 면에서는 조금씩 분리되어 있고, 삶의 형태란 반드시 변화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상대와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는 것 같다가도 내 마음 같지 않고, 나만 희생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주어진 또는 약속한 관계 안에서 예기치 못한 상실을 겪으며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갇혀 버리기도 하죠.

여기,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모두가 겪게 되는 고통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겪어내며 때로는 눈물 어린 웃음으로, 때로는 묵묵히 위로를 전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싸움을 하다가도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소통의 부재를 지나, 이해하기 어려운 서로의 고통을 결국 보듬어 주는 3편의 영화를 통해 어쩌면 아물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상처를 다시금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끝나고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결혼 이야기>, 노아 바움벡, 2019

영화 ‘결혼이야기(Marriage Story)'(2019) 스틸컷

찰리와 니콜은 찰리가 이끌고 있는 극단의 대표 커플입니다. 니콜이 하이틴 영화로 인기를 끌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고 찰리가 무명일 때부터 함께한 극단은 곧 브로드웨이 진출을 앞두고 있습니다. 극단이 승승장구하는 것과 달리 찰리와 니콜의 관계는 심상치 않습니다. 니콜은 부부 관계 개선을 위한 상담 도중 상담사가 내어 준 서로의 장점을 나열하는 과제 읽기를 끝내 거부하고 말죠.

제목이 ‘결혼 이야기’인 것과 달리 영화는 내내 찰리와 니콜의 이혼 이야기를 다룹니다. 서로 간의 대화로 약속하고 맞춰 나갔던 결혼 생활은 이혼을 위한 법적 공방을 거치며 변호사의 대리와 승소를 위한 공격으로 변해갑니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양육권을 박탈하기 위한 증거가 되죠.

영화 ‘결혼이야기(Marriage Story)'(2019) 스틸컷

영화가 전개되면서 찰리와 니콜의 싸움은 점점 격렬해집니다. 서로를 위해 마음을 다했던 지난 날들이 마음을 긁는 몇 마디로 서로 때문에 희생한 나날로 변해갑니다. 결국 찰리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며 니콜에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버리고 눈물을 쏟습니다. 니콜은 찰리에게 말없이 다가가 그를 안아 줍니다.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관계의 변화 속에서 사랑과 증오가 불분명한 모습으로 얽혀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결혼이야기(Marriage Story)'(2019) 스틸컷

결혼이라는 관계는 끝이 나지만, 찰리와 니콜은 그들의 아이 헨리를 번갈아 돌보며 서로의 빈자리를 조금씩 새로운 삶으로 채워 나갑니다. 가끔은 서로가 필요한 지점을 기꺼이 채워주기도 하죠.

때로 삶은 겨울과 같이 지난한 고통의 계절을 거친 후 새순이 돋듯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갑작스레 열어젖히는 식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관계의 끝을 함께 닫아 나가면서, 니콜과 찰리는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보다 명확하게 발견합니다. 이혼은 관계의 종말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다시 찾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죠. 서로의 꿈을 존중하며 한때 공유했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가는 찰리와 니콜처럼, 어떤 이별은 곧 다시 피어나는 삶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미끄러지며 섞이는
애도와 사랑

<라우더 댄 밤즈>, 요아킴 트리에, 2015

영화 ‘라우더 댄 밤즈(Louder Than Bombs)'(2015) 스틸컷

슬픔은 종종 너무 커서 말로 모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슬픔을 감당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고요. <라우더 댄 밤즈>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가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모습을 섬세한 장면들로 담아낸 영화입니다.

종군 사진기자였던 이자벨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남편은 상실감 속에서 애써 두 아들을 돌보려 하지만, 큰아들 조나는 감정을 외면한 채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유지하려 하고, 막내 콘래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상실을 삭이고 있습니다. 세 사람은 같은 경험을 통해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방식은 어쩐지 자꾸 서로에게서 미끄러져만 갑니다.

영화 ‘라우더 댄 밤즈(Louder Than Bombs)'(2015) 스틸컷

<라우더 댄 밤즈>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과 비현실적인 꿈의 이미지를 통해 상처를 받아들이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 나갑니다. 애도는 현재와 과거, 꿈과 현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가족 간의 관계를 오가며 전개되죠.

가족이 어머니를 기억하는 방식도,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도, 아내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모두 저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문학과 인터넷을 떠도는 이미지들 속에서 기억을 곱씹고, 누군가는 새로운 관계를 힘겹게 만들어 가며 앞으로 가려 하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 슬픔을 묻으며 상실을 견뎌냅니다.

영화 ‘라우더 댄 밤즈(Louder Than Bombs)'(2015) 스틸컷

각자의 애도 방식은 서로를 비껴 가고, 때로는 충돌하며, 어쩌면 영원히 닿지 않고 평행선을 그릴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미끄러지는 감정의 거리 속에서도, 세 명의 가족은 서로를 향해 조용히 다가갑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겹치는 순간들, 함께 있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시선들 속에서 각기 다른 애도는 조금씩 섞여가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죠. 상실의 슬픔과 고통은 단숨에 정리되지 않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끌어 안습니다. 우리는 결국 서로와 함께 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상처를 품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2021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2021) 스틸컷

어떤 상실은 그 흔적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흐르고 있고, 나 혼자만 멈춰 있는 것 역시 불가능하죠. <드라이브 마이 카>는 삶에서 예기치 못한 시련을 마주하고도 결국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배우 겸 연극 연출가 가후쿠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아내에 대한 마지막 모습과 미처 묻지 못한 질문들을 가슴에 품은 채 공허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수 년이 지나 히로시마 연극제에서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 연출을 맡으며 가후쿠는 극단과 숙소 사이를 오가는 운전을 맡아줄 기사 미사키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2021) 스틸컷

미사키는 엄마의 학대와 방치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운전을 시작합니다. 아무리 울퉁불퉁한 길이라도 최대한 덜컹거리지 않게 운전하고, 타인의 배려와 챙김 속에서도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는 굳센 모습을 보여주죠.

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후쿠와 미사키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겪은 각자의 상실과 고통을 나누게 됩니다. 고통을 모습은 다르지만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 보며 자신이 외면했던 기억을 조금씩 직면하게 되죠. 둘은 서로의 내밀한 기억들을 공유하며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기 보다 그 상처와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갑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2021) 스틸컷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가후쿠와 미사키 이외에도 다양한 관계성이 등장합니다. 영화 속 ‘바냐 아저씨’는 서로 다른 국적과 언어를 가진 배우들이 각자의 언어로 연기하는 다국어 연극입니다. 언어의 차이는 장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 되어 가죠. 감정을 배제한 채 자기 차례의 대사만 읊으며 대본 연습을 하던 배우들은 한 순간, 대사를 넘어서서 공감하는 어떤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각자의 언어가 결국 자기 자신의 경험을, 서로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지난한 삶을 살아있어 볼만 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냐 아저씨’ 속 소냐가 마지막에 남긴 대사 ‘그렇게 우리는 평온을 얻게 될 거에요’ 처럼 말이죠.

때로 어떤 일들은 겪고서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떠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오래 걸리고 결코 쉽지도 않죠. 하지만 조금 느리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낡고 오래된 빨간색 차가 길게 뻗은 도로를 멈추지 않고 달려나가는 것처럼 삶을 계속 살아가고, 계속 나아갈 뿐이죠.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이별과 상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모든 사랑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죠. 때로 운명이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별과 상실이 주는 고통이 언제나 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결혼 이야기>의 찰리와 니콜이 함께했던 삶의 방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가고, <라우더 댄 밤즈>의 가족들이 자기만의 애도의 과정 속에서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다시 만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와 미사키처럼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기억을 조용히 마주하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죠.

상실은 삶의 일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럼에도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속도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상처를 천천히 회복하고 서로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의미가 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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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삶을 신비롭게 하는 우연을 사랑하고,
예술의 효용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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