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부러 어렵기로 소문난 책이나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이해하고 숨은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고 싶어집니다. 마치 숨차게 달린 후에 힘들지만 뿌듯함을 느끼는 것처럼 뇌에 잔뜩 자극을 주고 어려움을 뛰어넘었을 때의 짜릿한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이럴 때 그림책은 좋은 계기가 되어줍니다. 글과 그림의 조합이라는 형식 때문에 태생적으로 함축과 은유에 적합합니다. 독자의 해석으로 채워야만 완성되는 이야기가 많죠.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그림책은 사람들이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을 비로소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이 되어 독자의 사고의 전환을 이끄는 그림책 3선입니다.
한 손에 잡히는 백 년의 시간
『100 인생 그림책』,
하이케 팔러, 발레리오 비달리

인생을 24시간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보통 그 비유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과 비교해 자신의 나이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겨우 아침이 시작되었다거나 아직도 하루가 끝나려면 남은 시간이 많다는 위로로 이어지죠. 그렇다면 인생을 한번 손으로 마음껏 만져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100 인생 그림책은 한 장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 한 권으로 요약한 인간의 삶입니다. 책에서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한결같이 흘러갑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 세상을 배우기에 바쁜 젊은 날에도, 세상을 아는 만큼 겸허해지는 나이든 시절에도 시간은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한 장만큼만 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건 마음을 사로잡는 어느 시간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는 아흔한 살 페이지에 적힌 글입니다.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며 필자에게도 같은 미래가 찾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오랫동안 시간을 손에 쥐고 느껴볼 수 있는 이 책은 삶이 무엇을 남기는지 나아가 삶이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나이 밑에 어떤 문장을 쓸 수 있을까요? 시간에 대한 감각의 전환을 시도한 100개의 그림과 문장을 통해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느끼게 된 감정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마리야 이바시키나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동료, 친구,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이 순간이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언제나 내 편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고 왠지 모를 자신감도 생기죠. 이런 경우 네덜란드에서는 ‘헤젤리흐(gezelig)’라는 말을 씁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만들어 내는 감각’을 의미하는 데, ‘공원에서 즐기는 피크닉, 보트 타기, 카페에서 즐기는 데이트’ 등 그 어떤 일에서도 헤젤리흐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필자를 포함한 사람들은 아마도 단어를 알게 된 지금에서야 뜻풀이에 맞는 감정을 느낀 적 있는지 돌아보고, 이런 게 맞을까 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감정에 차차 이름을 붙이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특정한 상황에서 마음을 채우는 감정들을 언어로 표현하여 개념화합니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황홀감’을 뜻하는 이집트 말 ‘타라브’, ‘타닥거리는 모닥불 앞에 앉아 온기를 즐길 때 느끼는 포근함’을 의미하는 노르웨이의 ‘페이스코스’는 책에서 처음 들어본 말이자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정입니다. 얇은 그림책 한 권에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속에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채 감정의 지도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무인도가 얼마나 더 있을까요? 멋진 이름을 붙이진 못해도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느끼고, 언젠가 그 무인도를 알아차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림으로 읽는 철학
『철학의 은유들』,
페드로 알칼데, 멀린 알칼데, 기욤 티오

니체는 철학이 다루어야 하는 광활한 미지의 관념 세계를 ‘바다’로 비유했습니다. 왼쪽에 실린 글과 함께 오른쪽에는 한 면 가득 그림이 채워져 있습니다. 청록색이 겹겹이 칠해진 드넓은 바다에 사람이 한 명 헤엄치고 있습니다. 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만큼 그는 물장구를 치지도 않고 파도에 가만히 몸을 맡깁니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바다에 몸을 맡긴 한 인간의 모습에서 ‘불확실한 삶의 흐름을 마주하려는’ 인간의 담담한 자세가 엿보이는 동시에 ‘존재의 바다’라는 니체의 표현이 더욱 생생히 들어옵니다.
이 책은 서양 철학사를 대표하는 은유를 글과 그림으로 다시 한번 시각화하여 철학을 읽고 감상하는 색다른 시선을 소개합니다. 플라톤의 ‘동굴’과 에피쿠로스의 ‘정원’처럼 철학자의 은유는 관념 속에만 존재했던 분명하지 않은 개념을 누구나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합니다. 이 그림책은 철학이 본래 갖고 있는 비유적 특징을 추상성이 두드러진 그림으로 전환합니다. 특정 단어를 상징적 기호와 삽화로 표현한 시도는 철학을 ‘감상’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고요함을 넘어 초현실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는 기욤 티오의 그림은 독자가 의미를 상상하고 읽어내기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철학의 관점에서 그림을 이해하고, 삶에 대해 질문해 보세요. 어렵게만 생각했던 철학이 어느 순간 우리 마음을 훔치는 시 한 구절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늘 익숙한 것만 보고 당연한 생각만 하면서 어제와 같은 내일을 산다면 우리는 아쉬움이나 후회를 느낄 새도 없이 삶의 소중한 조각조각을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 조금은 귀찮고 생각보다 어려운 읽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도전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끈기 있게 고민하고, 겸허하게 타인의 말을 듣고 배우는 태도를 잊지 않게 해주니까요. 생각은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도 말해주니까요. 세 권의 그림책이 남긴 질문이 삶을 다채롭게 감각하는 촉수가 되어 우리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