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의 뒷모습에 묘한 끌림을 느끼면서도, 대개는 부끄럽거나 두려운 감정 또는 바쁜 일상 때문에 그냥 지나치곤 합니다. 프랑스 현대 예술가 소피 칼은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호기심에서 비롯된 실천을 통해 예술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죠.
소피 칼의 작업은 일상 곳곳에 스며든 극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더욱 대담하게 밀어붙이는 예술적 탐구라 할 수 있습니다. 낯선 이의 자취를 따라가거나 내밀한 감정을 공연히 드러내며 일상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죠. 균열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묘한 사건을 만드는 에너지는 현실과 허구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새로운 이야기를 빚어냅니다.
소피 칼의 다채로운 실험은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던 익숙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숨죽이고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사소하지만 기발한 실천을 통해 새로운 시야와 감각을 열어젖히는 순간들을 함께 살펴보시죠.
타인의 삶 한 조각을
예술로 끌어들이다
내 앞을 스쳐 지나간 낯선 사람을 따라가보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나요? 바쁜 일상 속 거리에서 발걸음을 급히 내딛을 때는 지나가는 행인을 일일이 주목하기 어렵습니다. 가벼운 산책을 나가거나 괜스레 무거워진 걸음으로 인해 생생하게 움직이는 풍경이 감각될 때에야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찬 낯선 사람에게 관심을 온통 빼앗기게 되죠. 간혹 귀에 꽂혀 들어온 낯선 대사가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고요.
낯선 사람들이 유발하는 호기심, 이런 유혹들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프랑스 현대 예술가 소피 칼(Sophie Calle)은 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한 남자를 ‘우연히’ 파티에서 다시 만나고, 그의 다음 행선지가 베네치아라는 것을 ‘의도치 않게’ 알게 됩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를 미행하기로 결정하죠.
베네치아에서의 추적, 1979

앙리 B.(Henri B.)라는 애칭까지 부여한 남자를 소피 칼은 서슴지 않고 뒤쫓습니다. 금빛 머리칼의 가발을 구매해 덮어쓰고 위장한 뒤, 남자의 뒷모습을 사진 찍고, 심지어는 그가 머무는 숙소 맞은 편에 사는 여자에게 찾아가 남자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기상천외한 부탁을 하기도 하죠. 소피 칼의 존재와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여자에게 소피 칼은 앙리. B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심도 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이라고 후술하며 소피 칼은 위험한 게임을 지속하죠. 결국 소피 칼의 존재를 의식한 앙리 B.를 마주하고 열흘 넘도록 지속된 스릴 넘치는 탐정 놀이를 마무리합니다.

베네치아에서의 미행을 담은 프로젝트는 <Suite Benitienne(베네치아 연작)>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으로 출간됩니다. 미행을 하며 찍은 사진과 함께 당시의 사건과 감정을 일기처럼 기술한 소피 칼의 텍스트가 나란히 실려있죠. 일기 같은 텍스트는 소피 칼이 실제로 행하고 겪은 사건들을 담고 있지만, 임의로 설정한 한 남자를 뒤쫓는다는 상황을 기반으로 하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뒤섞이고 있습니다. 소피 칼은 실제로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행한다는 설정을 이용하면서 실제로 호기심의 경계를 넘을 듯 하며 발생하는 감정들의 미묘한 차이를 기록하기도 했죠.
이 작업은 예술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프로젝트였지만, 발행된 책을 통해 소피 칼은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현대 예술가 트레이시 에민(Tracy Emin)이 자신의 침대(My bed, 1998)를 있는 그대로 미술관에 옮겨 오고, 자신과 지금까지 함께 잤던 모든 사람의 이름을 조각 천으로 엮어낸 텐트를 전시하며 자신의 내밀한 삶을 예술의 소재로 삼고 있듯이, 소피 칼은 허구와 현실을 섞는 방식으로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현대 예술 경향의 선구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텔, 1981
소피 칼의 타인에 대한 관심은 한 남자에 대한 미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다양한 낯선 이들이 임시적으로 머물고 떠나는 호텔의 객실 청소부로 변신합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투숙객을 추리하기 위해 위장 취업한 것이죠. 이 프로젝트는 개인정보 보호법이 강력해진 지금으로서는 시도를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일들로 가득합니다. 아직 투숙객이 완전히 퇴실하지 않은 방에 남은 메모나 일기, 쓰레기통에 남겨진 물건들을 관찰하고, 사람들이 머물고 지나간 흔적들을 사진으로 담았죠.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읽거나, 남은 음식을 훔쳐먹거나, 녹음기를 설치하기도 했죠. 흔적을 관찰하는 행위와 실제 그들의 삶에 밀접하게 맞닿는 행위가 은밀하게 교차되며 어느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미묘한 층위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기행들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분명 있고, 논란의 소지가 있는 듯해 보입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쾌감을 잠시 유예하고 오로지 작품의 관점에서만 들여다 본다면, 청소부라는 소피 칼의 위장된 주체가 실제로 객실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토대로 또 다른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반복적인 대리 수행 행위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객실을 배정받아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이 지닌 물건과 이야기들은 소피 칼이 지닌 호기심과 관음적 욕망과 만나 실제와 허구의 교차성이라는 층위에서 새로운 감정과 사건을 발생시키죠.
존재하지 않았던, 하지만 누군가는 궁금해하고 시도해보고 싶었던 욕망의 층위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며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의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들의 전개에 직접 개입하여 미세하게나마 새로운 흐름을 생성하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인식하기 쉬운 인과관계 또는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고하는 것을 넘어서게 만들죠. 사건의 지평선에 잠들어 있던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여지를, 더 나아가 직접 그 가능성들을 시도해보게끔 하는 사고 방식을 제공합니다.
내밀한 감정과 기억의 재구성
소피 칼이 타인의 삶만을 예술의 재료로 사용했다고 생각하면 그녀의 예술 세계를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그녀는 앞서 베네치아에서 앙리 B.를 미행한 후, 엄마를 시켜 사설 탐정에게 자기 자신을 미행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파리에서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중요했던 공간들을 거닐고, 고용된 사설 탐정은 그 뒤를 좇죠. 그녀가 깊은 감정에 빠져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때를 사설 탐정은 단순히 ‘이곳에 잠시 머무름’과 같은 건조한 어투로 기록합니다. 이는 개인이 감정의 층위에서 경험하는 것이 겉으로 관찰되고 기술되는 일반적인 사건과 큰 차이가 있음을 시사하는데요.
잠자는 사람들, 1979

소피 칼은 개인이 느끼는 각각의 감정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차이들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내밀한 공간을 사람들에게 오픈했습니다. 친구, 지인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죠. 1979년 4월, 초대된 28명의 사람들이 침대에서 8시간씩 머무는 동안 그녀는 그들에게 깨끗한 침구와 시간에 따른 식사를 제공하고, 그들과의 은밀한 대화를 녹음하고, 침대에 누워 있거나 수면에 빠진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은근한 원칙도 있었는데요, 소피 칼은 침대에 누운 사람들과 중립적인 관계를 엄밀히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잠이 들락말락 하는 사람들, 깊은 잠이 빠진 사람들에게 각자의 취향이나 수면 습관, 이렇게 그녀의 침대에서 자는 경험에 대해서 질문하고 꿈을 꾸고 있거나 눈을 감은 사람들이 대답을 하는지 관찰했죠. 원칙에는 한 사람에게 제공된 8시간이 끝나면 다음 사람이 안내되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원칙들은 침대라는 내밀한 공간이 지니고 있는 취약성에 기반한 것입니다. 침대는 보호 장치를 모두 내려놓고 최소한의 옷을 걸친 채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동시에, 열정적인 섹스나 그로부터 파생된 폭력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소피 칼은 엄격한 프로세스를 구축해 침대라는 공간의 특성을 어느정도는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침대에 낯선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역시 두려운 일이었던 것이죠.

9일 간의 프로젝트가 끝난 후 출간된 책을 보면 다행히도 소피 칼이 염려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사실 내밀한 영역에서 서로 어떤 미세한 상처들이 주고 받았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잠에 들거나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실린 소피 칼의 텍스트에는 그녀의 내밀한 공간에서 새롭게 발생한 서로 다른 각각의 친밀함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소피 칼은 8시간 마다의 새로운 게스트와 수면을 연속적으로 반복하며 사적인 공간의 리듬을 일종의 공적인 형태로 치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완전히 사적인 영역이었던 그녀의 침대는 초대된 사람들이 찾아와 규칙에 복종하며 잠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침대를 비워두지 않기 위해 소피 칼은 베이비시터를 고용해 침대를 차지하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돌보세요, 2007

소피 칼은 모두가 겪는 이별의 경험 역시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오고자 시도합니다. 남자친구에게 받은 이별을 고하는 이메일을 107명의 각계각층의 여성들에게 보내 해석을 요청한 뒤, 각각의 반응과 해석 과정을 전시했습니다. 이별 편지 마지막 글귀인 “Take Care of Yourself”를 시리즈 제목으로 붙인 <Take Care of Yourself>(2007)는 많은 인원이 참여한 만큼 다채로운 결과물을 자랑하는데요. 이 프로젝트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예술 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 국가관에서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은 사격 선수, 교사, 작가, 기자, 작곡가, 범죄학자, 판사, 배우 등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총알 구멍이 난 편지, 문법이 교정된 편지, 춤으로 해석된 답신이 등장합니다. 각각의 전문성을 가진 여성들의 개성있는 해석들은 그들의 전문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여자가 겪는 이별에 대한 묘한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107개의 해석이 모이면서 이별은 더 이상 괴롭고 끔찍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일축됩니다.
실제 공간을 변주하는 실험
고담 핸드북 – 뉴욕 이야기, 1994

1994년, 소피 칼은 소설가 폴 오스터(Paul Auster)와 함께 허구를 실제로, 실제를 허구로 섞여 들게 하는 프로젝트 <이중 게임>을 기획합니다. 폴 오스터는 소피 칼의 여러 작업과 삶에 영감을 받아 그녀를 소설의 인물로 쓴 바 있는데요. 소피 칼은 폴 오스터의 그 작업에 영감을 받아, 그가 허구의 인물을 창조하면 1년 간 그 인물로 살아보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처음에 폴 오스터는 한 사람을 자신이 만든 인물로 살게 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껴 거절하지만, 결국 소피 칼을 위해 “고담 핸드북(Gotham Handbook)”을 작성하죠.
고담 핸드북의 부제는 이렇게 붙었습니다. “뉴욕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소피 칼이 개인적으로 사용하게 될 교육 입문서(그녀의 요구에 따른).” 소피 칼의 발칙한 제안과는 달리 폴 오스터가 작성한 핸드북의 지침은 ‘미소 짓기’, ‘낯선 이들에게 말 건네기’, ‘걸인과 노숙자들(에게 친절히 샌드위치와 담배를 건네기)’, ‘한 장소를 선택하기(선택한 장소를 마치 나의 책임인 것처럼 쓸고 닦고 돌보기)’ 등과 같이 도덕책에 나올 것만 같은 지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이 지침을 읽은 소피 칼은 당황한 듯 하면서도 곧 지침에 몰입하기 시작합니다. 미소 짓기를 연습하고, 미소를 어떻게 ‘세어야 할 지’ 고민하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담배를 사죠. 마지막으로 뉴욕의 그리니치와 해리슨 가가 만나는 사거리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하나를 선택해 청소용품을 사들고 가 유리를 닦고, 꽃을 두고, 메모지와 볼팬, 거울, 여러 포스터들을 붙여 꾸민 뒤, 간이 의자를 체인에 연결해둡니다.
하루 한 시간, 지침을 수행하는 당직 시간을 정해 소피 칼은 왼쪽 공중전화 부스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이 만든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의 통화 내용을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미소를 건네고, 샌드위치를 주고, 담배를 권합니다. 매일의 기록 끝에는 하루에 몇 번의 미소를 건네고 받았는지, 몇 개의 샌드위치를 주고 거절당했는지, 몇 갑의 담배를 성공적으로 권했는지 기록되어 있죠.

결국 미국 이동통신 회사인 AT&T의 노골적인 방해로 소피 칼의 사유물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서비스도 막을 내렸습니다. 그 동안 뉴욕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의 미소와 전화부스에 놓인 메모에 남겨진 코멘트들, 서로 무엇인가 권하고 거절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고담 핸드북의 지침을 따르는 허구적 인물을 통해 발생하고, 관찰되고, 또한 기록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거리의 모습은 원상복구 되었지만, 어떤 일이 그곳에 일어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존재하죠.
소피 칼의 기상천외한 작업들은 난해하기도 하고, 어떤 하나의 유형으로 정의내리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만,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일관적으로 흐르는 한 줄기의 명맥이 있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섞으면서,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만난 우연한 남자를 뒤쫓거나, 호텔에 숨어들어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자신의 침대에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거나, 여성들이 제시하는 이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모으거나, 뉴욕의 한 거리를 새로운 이야기이자 삶의 무대로 만드는 것. 얼핏 도덕적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침범하는 독단적인 행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근원에는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비로소 만들어지는 이야기에 대한 깊은 갈망과 호기심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모두가 지니고 있기에 가장 보편적인 동시에 단 한 순간 고유하게 발생할 뿐이므로 가장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죠.
소피 칼의 과감한 도전은 우리의 시선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살짝 바꾸기만 해도 평범한 삶이 낯선 사건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감각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일상이 현대 예술의 재료가 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다가오는 봄, 적극적으로 허구를 현실에 그려보는 유희를 통해 실제 나의 일상을 예술의 영역으로 길어올리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