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순간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점심 메뉴 고민부터 이사, 이직, 결혼 등 중대한 것까지요. 익숙한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방향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이렇게 결정과 전환의 점들이 쌓여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가고 있죠.
이번에 소개할 재즈댄서 송서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과 사회적 기대 속에서 살아왔지만 내면의 목소리와 가능성을 따라 춤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환은 단순한 직업의 변화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춤을 통해 타인과 함께 존재한다는 감각을 배우고, 사회와 소통하며, 삶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새롭게 전환되었습니다. 완벽함에서 자유로, 틀에서 흐름으로,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그녀가 경험한 수많은 전환의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호기심이 전환이 되는 순간

댄서로서 주로 어떤 작업이나 활동을 하는지 소개 부탁드릴게요.
제가 춤을 추는 장르는 1920년대 뉴욕 할렘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 컬쳐에서 시작된 재즈음악과 춤이 탄생했던 시대의 춤을 본받아 연구하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총체적으로 ‘스윙댄스’로 주로 불리는 장르인데요. 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 ‘린디합’과 혼자 추는 춤 ‘솔로 재즈’를 병행하고 있어요. 리듬의 근본이 된 탭댄스도 함께 연습하고 있습니다. 유럽 다양한 도시와 국가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춤으로 공연도 하고, 대회도 나가고, 강습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춤을 추기 위해 재즈라는 장르 안에서 깊어지면서 재즈 전시를 기획하고, 재즈 댄스 필름을 만들고, 재즈 북클럽을 진행하고, 재즈역사연구소 아카이브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요.
어떤 계기로 그 분야에 빠져들게 되었나요?
TV 쇼 <스트리트 우먼 파이트>를 보다가 회사에서 앉아만 있는데 ‘춤으로 운동이나 조금 더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우연히 수업에 등록하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이 춤에 빠질 수 있도록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저를 처음에 키워주신 선생님들이에요. 끝없이 제가 좋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름을 부어주셨던 것이 아직도 감사한 부분이에요.
재즈라는 음악이 주는 개인의 자유로움과 즉흥을 유지하면서도 타인과 같은 리듬으로 스윙하며 함께 존재한다는 감각 사이에서 삶을 배워가는 것에 매력을 느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춰내면서 즐길 수 있다는 방식의 짜릿함도 있고요. 옛날에는 저에게 예술 활동과 등산 활동이 각각 따로 구분되어 있던 것이었는데요. 운동과 예술의 교집합이 곧 춤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스포츠 같지만 예술적이고, 아티스트인데 올림픽 선수 같은 지점이 저에게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줘요.

“나에게 재즈란?
재즈는 김치다.”
즐거움 이상으로 깊어진 계기는 흑인의 음악이고 흑인의 춤이라는 점 때문이에요. 재즈 음악과 춤이 탄생한 계기이기도 한데요. 여기에는 제가 고민해온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주제들을 되짚고 행동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미국의 식민/소수 역사에 대해 논의하고, 리더와 팔로워로 역할이 규정된 파트너 댄스 안에서 성 정체성과 여성성을 고민하고, 과거와 오늘의 소통 방법을 이해하고 찾아가는 과정 등이에요.
예전에는 제 신념을 지키며 세상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기 위해 제가 어떤 예술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까웠어요. 그렇지만 요즘은 재즈와 스윙댄스를 추는 것만으로 더이상 세상에 뭔가를 추가로 증명해야할 필요가 없어지는 기분이에요. 단순히 춘다는 개념보다는 더 나은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내가 믿는 방식으로 선보이는 과정에서 말이죠.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만큼 더욱 정치적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재즈를 깊이 이해할수록 내가 이해하는 세상의 범위가 아주 좁고 오히려 아주 깊고 넓어지는 기분이에요.
한국인에게는 김치가 아주 고유한 문화이면서 매일의 일상을 담당하는 음식이라면, 외국인에게는 아주 강렬한 매콤함을 선물하는 일탈일 수도 있잖아요. 저에게 재즈도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그냥 김치 한 번 먹어볼까? 라는 호기심에서 시작했다면, 나중에는 깻잎도, 총각김치도, 파김치도, 그 다양한 매력과 역사가 깊어지면서 매 밥상에 김치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할까요.
직업의 전환 :
회사원에서 아티스트가 된다는 것

한국에서 다른 직업을 가졌던 걸로 알고 있어요. 삶의 어떤 부분이 서희 님을 ‘예술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끌었나요?
한국에서는 대기업과 외국계기업에서 신사업개발, 파트너십 업무를 했어요. 회사를 다니면서도 책 독립출판하기, 자작곡 음원 출시하기, 을지로에서 미술 전시하기 등 다양한 예술활동을 사이드로 해왔습니다. 제 안에 늘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실험해온 것 같아요. 큰 조직에서 큰 돈을 버는 일을 했기 때문에, 작은 이야기를 비효율적으로 생산하는 점에서 희열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이 대부분 ‘사’자 직업으로 향했는데, 그것이 왠지 모를 반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어요. 늘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도, 세상이 정해준 좋은 길에 발을 살짝 얹어 두었어요. 안전한 울타리에서만 실험을 해온 것이죠.
“예술로 이끄는 삶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거기에 내게 그걸 이야기할 전달력이 있는 것 같다는 감각에 이끌렸어요.”
그러다가 ‘옛날’ 재즈라는 춤을 만났어요. 제 안에 그것을 향한 강한 열망이 끌어오른 것은 사실 다른 예술과 비슷했는데요. 다른 예술에서는 보지 못했던 어떤 가능성을 본 것 같아요. 대회 수상이나 월드 챔피언의 칭찬 등 내가 좋아하는 만큼 세상도 나의 결과물을 좋아해준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춤은 처음으로 회사 일과 병행이 불가능할만큼 제 몸과 마음의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준 예술이에요. 어느날 벚꽃을 구경하다가 나무에 부딪혀 코 뼈가 두동강이 났는데, 수술대 위에서 생각했어요. ‘아, 회사 그만 두고 춤을 추러 유럽에 가봐야겠다’ 라고요.

이전에 했던 일들에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사업개발, 파트너십 업무를 좋아했던 이유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와 함께 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규모와 기회의 짜릿함 때문인데요. 파트너십을 이뤄내기 위해 거쳐야 했던 수많은 회의들에서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요. 사업개발 업무를 하는 사람은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에요. 실현을 하려면 사람들을 움직여야 하잖아요. 임원도 설득해야 하고, 내부 조직도 설득해야 하고, 그 안에서 파트너와 법무팀도 설득해야 하고요. 무엇보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업무는 왜 해야하는지 나부터 설득해야 했어요. 하나의 새로운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들어가는 모든 작업이 결국 상대의 목표와 나의 목표를 일치시키고, 함께 일하는 것들이었어요. 이것이 인생의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할 때도 누구와, 어떻게 작업하고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데 늘 사용됩니다.
완벽에서 자유로
브뤼셀에서 경험한 나다움


얼마 전엔 작업실도 오픈했다고요.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건 많은 의미를 갖고 있을 것 같아요. 작업실을 얻게 된 과정에 대해 나눠주세요.
재즈로 파생되는 다양한 연구와 미술작품을 모아서 오프라인 전시를 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친구와 브뤼셀에 공간을 빌려서 전시를 해보자고 이야기 했죠. 그런데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친구이자, 댄서이자, 본업 미술가인 친구가 이사를 앞두고 좋은 공간이 생겨 미리 계약을 하게 되었어요. 당장은 필요 없는 아틀리에가 하나 더 생겨 저희에게 제안을 해줬죠. 이렇게 말하면서요.
“직접 개조를 하는대신 5월까지 무료로 아틀리에를 써보지 않을래? 너희가 마음껏 실험해도 좋아.”
벨기에에서는 늘 작은 것을 바라도 큰 것이 생겨요. 하늘에서 떨어진 실험실 겸 작업실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의 공간이 생겼으니 ‘뮤지엄 오브 재즈(MoJA)’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이름을 불러주니 내게로 와 꽃이 된 걸까요. 사람들이 갑자기 기증을 해주고 협업 제안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아틀리에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아 뉴스레터 <한겨울 밤의 작업실>도 보내고 있습니다.

유럽에 이사간지 500일이 조금 넘었다고 들었어요. 머무르고 생활하는 지역, 문화가 바뀌는 건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을 텐데요. 개인의 삶이나 예술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유럽은 광범위한데, 벨기에라는 나라의 특수성이 있어요. 국가 공식 언어가 4개이고, 남쪽은 프랑스어권, 북쪽은 네덜란드어권이고, 유럽 연합 헤드쿼터가 브뤼셀에 있어서 굉장히 인터네셔널해요. 저의 벨기에 세상은 댄스 팀 활동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요. 40여명의 벨기에 (또는 유럽) 출신 팀원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요. 대부분 주요 언어는 프랑스어를 써요.


초콜렛의 국가인만큼 매일 초콜렛을 먹고 잠들 수 있게 되었고, 치즈가 음식의 큰 영향이라 모든 종류의 치즈의 섬세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소비를 덜어내고 환경을 더 생각하는 대신 신중하게 미적 감각을 기르는 습관이 생겼고요. 비가 아무리 내려도 우산을 쓰지 않고,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인 삶을 살아요. 감자튀김을 먹을 때는 20개의 소스 중 어떤 소스를 좋아하는지 1시간동안 토론할 수 있어요. 진짜 맛있는 크로아상과 에끌레어는 어떤 맛인지도 구분할 줄 알게 되었고 배달음식은 아예 시켜먹지 않아요. 친구를 만나면 무조건 볼 키스 인사를 나누어요. 벨기에는 한 번 만, 프랑스에서는 두 번, 이탈리아는 세 번.

예술적으로는 벨기에 춤 씬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유럽 안에서도 벨기에 팀은 “Eccentric Brussel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요. “별난”이라는 의미에요. 어딘가 날 것의, 특이하고 무언가 이상한, 그런 캐릭터가 오히려 환영받는 분위기여서 서로가 다른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한국에서는 춤에서도 예술에서도 어떠한 ‘완벽성’에 가까워지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것이 마치 수능 공부를 할 때만큼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 같이 말이죠. 어쩌면 그래서 저는 브뤼셀과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다들 조금씩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멀쩡하고 너무 완벽한 것을 지루하다고 보는 것 말이죠. 한국에서는 제가 늘 특이하다고 느껴졌거든요. 공부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너무 예술을 하려 했고, 예술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너무 범생이였다고 할까요. 그런데 브뤼셀에서는 아예 그런 잣대가 없이, 내가 송서희여서 그것을 누구보다 사랑해주는 것이 아주 잘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동일한 사람인데, 저의 예술은 눈치를 덜 보는 예술이 된 것 같아요. 아, 단순히 예술 뿐만이 아니라 삶도요.
예술하는 사람 :
나를 향해 몰입하고 존재하다

예술 활동하는데 어디에서 영감이나 영향을 받는 편인가요?
재즈라는 장르가 처음 시작된 1920-1940년대 미국 흑백영화에 등장하는 오리지널 댄서들의 영상을 많이 연구하고 있어요. 재즈가 자유로운 장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유롭기만 해서는 제대로 소통하기가 어렵거든요. 아무렇게나 말하고도 프랑스어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외운 문법과 변칙을 가지고 더 적확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히스토리언이 아닌 예술가이기 때문에,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만큼 나만의 이야기와 스토리텔링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어요. 마치 많은 고전소설을 읽으면 표현력이 풍부해지는 것처럼 다양한 좋은 춤을 보고 배우고 연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연구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춰내는 춤’을 춰야겠죠. 무엇보다 가장 큰 영감은 제 팀원들이에요! 모두가 너무 각자의 뚜렷한 개성과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저도 언젠가 저만의 뚜렷함으로 똘똘 뭉친 춤꾼으로 인식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작업들을 하고 싶나요? 그것의 방향성이나 궁극적인 목표가 있나요?
처음에 예술을 할 때는 ‘세상에 이런 메시지를 던지겠다!’라는 어떤 처절함과 담대함이 모두 존재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알을 깨고 나오는 그런 자전적인 이야기는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예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메시지나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술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로 그것이 이미 충분해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춤을 췄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 좋은 영향을 준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저는 그게 신기해요. 저는 더욱 더 춤도, 예술도, 세상이 아닌 점점 나만을 향해 가는 것 같아요.

재즈 안에서 스스로 계속 알을 깨어나가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시를 공모해서 시를 주제로 춤을 만들고, 춤이 다시 그림이 되고, 음악이 없이 춤을 췄다가 전시가 되기도 하는 것. 재즈가 재즈 안에만 있지 않고 다양한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서희 님의 작업을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남겨주세요.
벨기에에서는 조금 깊은 관계에서는 인사할 때 “How are you?(Ca va?)”를 꼭 두 번 물어요. 처음엔 그냥 스치듯 묻는 의미로, 그 후에 진짜 제대로 묻는 “요즘 어때?”인 것이죠. 그럼 습관적으로 했던 대답도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시 생각하고, 제대로 대답하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두 번 묻고 싶어요. 아니, 진짜로 –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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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핵심요소 중 하나는 ‘즉흥연주’입니다. 연주자가 순간의 감각에 따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인데요. 하지만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수많은 훈련을 거쳐 자유롭게 연주하는 감각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재즈와 함께 춤을 추는 송서희도 재즈 연주처럼 변화하고 확장되어왔습니다. 한국에서 대기업을 다니던 직장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재즈댄서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녀만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과정까지. 그 안에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성실한 노력, 예술에 몰입한 순간들이 쌓여있습니다. 그녀가 경험한 전환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