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가꾸거나 바라본 경험이 있나요? 자연을 가까이하기 어려운 도심에서 정원은 하나의 숨구멍이 됩니다. 무성한 초록과 가지각색의 꽃과 풀을 경험할 수 있죠. 우리가 짓고, 개발하고, 성장하는 동안 자연은 점점 설 자리를 잃습니다. 이때 도시 한 가운데 자리하는 정원은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1950년부터 이어져 온 가구 제조사, 비트라(Vitra)는 2020년부터 정원의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트라 캠퍼스 사이에 공공 정원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정원을 통해 자연과의 관계를 돌아보고자 했는데요. 비트라가 말하는 정원의 역할이란 무엇일까요? 현대 가구 디자인의 역사를 함께 이끌어온 비트라는 오늘날 디자인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비트라 캠퍼스
임스 체어, 팬톤 체어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러 디자인 가구의 탄생과 함께한 회사가 바로 비트라입니다. 비트라는 디자인과 건축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요. 생산공장이 위치한 비트라 캠퍼스는 건축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안도 다다오(Ando Tadao), 알바루 시자(Álvaro Siza), 헤르조그&드뫼롱(Herzog & de Meuron), 자하 하디드(Zaha Hadid). SANNA에 이르기까지 유수의 건축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이에요. 그중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 스튜디오가 무려 다섯 곳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많은 건축가들의 작품이 비트라 캠퍼스에 모여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사실 비트라의 생산공장은 한 차례 화재의 위기를 겪었는데요. 불에 탄 공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비트라는 여러 건축가들의 힘을 빌려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화재를 예방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부지에는 자하 하디드와 함께 소방서를 짓기도 했는데요. 비트라 캠퍼스에는 생산공장과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소방서, 비트라 하우스, 컨퍼런스 파빌리온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0년 5월 비트라 캠퍼스 사이에 한 공공정원이 들어섰습니다.
우돌프 가든
“나는 사람들이 정원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를 바란다. I want people to lose themselves in the garden.”
_피에트 우돌프
비트라 캠퍼스의 정원은 ‘우돌프 가든 Oudolf Garten Vitra’라고 불립니다. 조경가 피에트 우돌프(Piet Oudolf)가 조성한 정원이기 때문인데요. 피에트 우돌프는 오늘날 자연주의 조경을 일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입니다. 뉴욕의 버려진 고가를 정원으로 개조했던 하이라인 프로젝트를 통해 명성을 높이기도 했는데요.
네덜란드 출신의 피에트 우돌프는 3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조경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바텐더로 일했다고 알려졌죠. 가장 처음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내인 안자(Anja)가 운영하는 보육원의 정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겨울을 넘겨 여러 해 동안 살아남는 다년생식물을 재배합니다.
서양의 정원을 떠올리면 인공적으로 깎아놓은 정원수와 장식적인 꽃들이 떠오르지 않나요? 그동안 자연을 재료 삼아 건축물을 장식하고, 치장하는 역할로 여겨졌던 정원을 우돌프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자원을 많이 소비하지 않으면서, 서로 자연스럽게 공생하는 방식의 조경을 추구했는데요.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식재인 다년생 식물과 야생화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덕분에 우돌프의 정원은 마치 거친 야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식물의 개화 주기, 수명 주기 등 구성에 대한 치밀한 조경 계획이 숨어 있죠.
재미있는 점은 우돌프가 겨울에 갈색으로 변한 정원도 청소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기 이전까지 ‘죽은 정원’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해 감상하고, 즐기기 때문인데요. 우돌프는 식물이 가장 생생하게 뻗어나가는 시기뿐만 아니라 시들고 부패하는 과정까지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성장과 부패를 분리하지 않는 우돌프의 관점이 정원을 넘어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형성해 줍니다.
우돌프 가든을 걸어가는 길은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명확한 길을 찾기보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길 바랐기 때문인데요. 구불구불한 길에서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갈지 끊임없이 선택하고, 헤매고, 새로운 발견을 하며, 감정적으로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비트라 캠퍼스의 정원은 계절마다 새로운 색으로 물듭니다. 피에트 우돌프를 두고 예술가라고 칭하기도 하는데요. 우돌프 가든은 예술과 자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감상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더 이상 조경은 단순히 건축물 사이를 연결하고 꾸며주는 장식이 아닙니다. 건축물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도 아닙니다. 조경은 예술일까요? 건축과 조경의 관계는 어떨까요? 우돌프 가든은 자연과 예술, 자연과 디자인, 자연과 건축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장이 되어줍니다.
미래 정원 :
자연과 함께 디자인하기
“정원 가꾸기란 언제나 ‘조금씩 해나가는 일’이다. 완벽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방법들로 반응하고 시도하는 것이다. Gardening is always about doing things bit by bit. Not finding the perfect solution, but reacting and trying things out in small ways.”
_큐레이터, 비비안 스탑만스(Viviane Stappmanns)
공공정원을 조성해 본 경험은 비트라의 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인식도 바꾸어 놓습니다. 자연과의 관계는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2023년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에서는 <미래 정원: 자연과 함께 디자인하기 Garden Futures: Designing with Nature>라는 전시가 진행되었습니다.
정원을 주제로 다룬 이 전시는 단순히 정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원처럼 생각하기’, ‘정원처럼 디자인하기’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정원을 하나의 디자인 방법론으로써 바라본 것이죠. 마치 정원에 물을 주고 가꾸어 나가듯이 완벽한 결과물 대신 시작과 과정에 주목하고, 자원이나 자연과의 관계를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특히 오늘날 맞이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건축과 디자인은 자연과의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요. 비트라는 ‘정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기후 위기 시대의 디자인과 건축이 감당해야 할 역할에 대해 물음을 던집니다.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 비비안 스탑만스(Viviane Stappmanns)는 정원이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원의 역할은 잊어버린 자연을 소환하고, 자연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을 떠올릴 때 정원은 중요한 힌트를 던져줍니다. 사회적, 정치적인 공간으로서의 정원은 지금 이 순간의 환경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인식으로 시선을 확장합니다.
가구 브랜드는 언제나 자연에 빚을 집니다. 가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구 브랜드에서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비트라는 그중에서도 가장 진지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인식합니다. 비트라 캠퍼스의 건축물 사이에 공공정원, 우돌프가든을 만든 것은 자연의 영역을 다시 확장하고, 건축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자연의 몫을 돌려주기 위함입니다.
비트라는 매년 지속가능성에 대한 연간 리포트를 발행하고, 리사이클링 소재에 대한 개발과 활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또, 비트라 서클 스토어를 통해서 중고 가구를 거래하고 수리할 수 있도록 했는데요. 무엇보다도 오래 살아남는 비트라의 롱라이프디자인이 가구 브랜드가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던져줍니다. 1950년대에 생산된 임스 체어가 지금까지도 거래되고,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오래 지속되는 디자인은 자연의 소모를 최소화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디자인의 과제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실존적이고 직접적인 위기로 닥친 자연과의 문제에서 디자인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정원은 자연에 대한 고려가 필연적인 미래에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비트라의 정원이 디자인과 건축, 자연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