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면 항상 마주치는 걸림돌이 있다. 나를 얼마나 드러낼지(혹은 지워낼지)의 문제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때 언제나 뒷걸음질 치고 중립적인 목소리라는 환상에 몸을 숨기고는 하는데, 오늘만큼은 조금 더 나 자신의 내밀한 속을 꺼내 보일까 한다. 지금 내가 지면 위로 옮기고 있는 이야기는 도무지 내 자신을 숨겨서는 이어갈 수 없어서이기도 하고, 최근 만난 어떤 예술가로부터 내 이야기를 할 용기를 얻어서이기도 하다.
제주가 고향인 나는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묘한 공익광고를 마주한다. 채혈을 독려하는 광고다. 우리나라의 부족한 혈액 보유량 때문에 제작된 광고일 것이라 유추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4.3 희생자 유골의 신원 확인을 위한 채혈 독려다. 그러니까 나는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지연되고 지연된 안식을 위해 나의 유전자 정보를 제공하기를 독려받는 사람이며, 내 피는 내 몸을 이루는 액체일 뿐 아니라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는 물질적 정보 저장소다.

나의 피는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흘린 수많은 피의 연장으로 내가 고통받은 이들의 혈족임을 증명한다. 동시에 이 피는 국가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진상을 조망하기 위해 다시 국가가 개인에게 흘리기를 요구하는 피다. 내 피, 내 신체에 얼마나 많은 통치와 힘의 줄다리기가 손을 뻗고 있는지, 내 심장이 아직도 멀쩡히 전신에 피를 순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야기는 다시 또 개인적인 경험으로 흘러간다.
4.3 미술제에 대한 학술 발표를 들으러 간 적이 있다. 발표가 끝난 후 질의에서 누군가가 제주에 갈 때마다 제주 사람들로부터 묘한 음울함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묘한 음울함. 제주의 근현대 미술, 특히 4.3 미술에 대한 비평에서도 자주 마주치곤 한 단어다. 부정하진 않겠다. 나의 고향은 잔인하고, 강렬하고, 고통스럽고, 매서운 자연과 역사를 모두 지닌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고향을 떠올릴 때 부정적인 감정만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수백 년간 타자화되고 특정한 이미지로 환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에도 제주의 것인 삶이 있다. 마치 내 혈액처럼 국가에 의해 유발된 고통은 정지하지 않고 흐르고, 제주의 많은 아이들이 같은 날에 제사를 가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어떤 빛이 있고 애정이 있으며 공통의 고통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공통의 인간성이 있다.
국가가 생명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고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밀려 나간 밖에서도 삶은 존재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이어진 생명은 살아있음에도 죽음과 손을 놓지 않는, 죽음과 삶 사이를 잇는 기묘한 존재를 창조한다.
심방의 목소리

제인 진 카이젠의 《이어도(바다 너머 섬)》은 2024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전시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작이었다. <제물>, <잔해>, <이 질서의 장례>, <할망>, <수호자들>, <어귀>, <심> 총 7개의 영상이 나선형으로 배치된 《이어도》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고순안 심방(무당)의 목소리가 바로 내 귀를 사로잡았다. <잔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심방의 무가는 마치 메김소리처럼 다른 작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먼저 말을 건넨다. 제인 진 카이젠의 작업에는 고순안 심방처럼 죽음과 삶 사이를 잇는 존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살아있는 몸을 가지고도 죽은 이에게 손을 뻗는 무가는 저 깊은 바닷속으로부터 희생된 자의 목소리를 길어 올린다.

다른 관람자들이 무가를 어떻게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가를 들으며 기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4.3 생존자 심방이 4.3 희생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에 그의 무가는 제주 방언으로 말해진다. 대한민국 표준어 사용자는 거의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고통스러운 경험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나 역시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4.3의 경험 세대가 사용하는 제주 방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주에서 이미 제주 방언이 많이 소멸한 후에 태어난 나는 내 이전 세대를 통해 어렴풋이 제주 방언을 습득했고, 이들과 대화하는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표준어를 사용하며 자랐다. 나는 무가의 7할 정도만을 어렴풋이 이해하며 어두운 전시장 안을 서성거렸다. 이것이 어찌 보면 4.3의 비경험 세대인 나의 위치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4.3에 대해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고, 학교에서 4.3 역사교육도 받았지만, 4.3의 경험자는 절대 될 수 없는 당사자와 타인 사이 그 어드메의 존재.
제주 방언 화자가 아니면 명료한 언어로 들리지 않는 고순안 심방의 무가는 4.3이 언어화될 수 없는 트라우마적 경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들의 목소리는 명료하게 해석되고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명확함, 어렴풋함이야말로 4.3에 희생되었던 이들의 상황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한다.
“내가 만난 4·3홀어멍들에게 4·3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내가 현지조사를 했던 H 마을사람들은 4·3의 현실은 “시국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4·3은 마을의 삶의 시간적 연속성이 급진적으로 와해되고, 마을공동체 내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정지되고, 마을의 질서가 통제 불가능해진 시간과 공간의 사건이었다.”
_김은실, 「국가폭력과 여성: 죽음 정치의 장으로서의 4.3」, 『4.3과 역사』 제18호 (2018): 193.
김은실 교수의 논문에서 말해진 바와 같이 4.3 희생자들에게 4.3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재앙이며 느닷없이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을 덮친 거대한 폭력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주에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제주 사람들은 계엄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왜 내려졌는지도 모르는 채로 죽임을 당했다. 그 이후로도 고통은 지속되었다. 4.3에 대해 이야기하면 ‘빨갱이’라고 매도당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겪은 불가해한 고통을 신음 같은 음성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은 결국 4.3에 대한 발화를 자신의 뒤로, 뒤로 물린 채 흘러 흘러 살아왔다.

제인 진 카이젠은 제주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되어 덴마크에서 자랐으며 현재 코펜하겐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한다. 작가인 그도 제주 방언 사용자가 아니기에 고순안 심방의 무가를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어도》에 개입하는 이들에게는 다양한 문화적, 세대적 차이가 존재하며 작품은 이들 사이의 대화를 조망하기에 《이어도》에는 발화와 해석의 지연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마치 4.3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침묵으로 고수되며 계속 뒤로 뒤로 전달된 것처럼. 그러나 기억과 발화의 지연은 오히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고통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내고 재현할 수 있는 거리와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놀랍지도 않게, 나는 조부모로부터 4.3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은 4.3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인 세월을 너무 오래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로부터 4.3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온 조각 조각의 소리를 모아 해석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4.3 때 자행된 대학살이 얼마나 무작위적인 것이었는지 나의 어머니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외할아버지가 어렸을 적, 마을에 군인들이 들이닥칠 거란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어. 할아버지는 가족 일부와 함께 밀물이 되면 가는 길이 끊기는 외딴집으로 숨어들었는데, 그 집에 숨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가 살아서 마을로 돌아가지 못했어. 만일 그때 할아버지가 그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면, 너도 나도 여기 있을 수 없었겠지.”
수십 년이 넘는 금언의 시간에 말을 잃어버린 나의 조부모를 대신에 죽음과 삶의 공간 사이에서 잃어버린 말을 찾아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제인 진 카이젠이 작가로서 관람자와 4.3 희생자 사이를 매개하는 영매가 되었다면, 4.3 생존자의 딸인 어머니는 4.3 희생자와 그들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잇는 통역자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침묵과 반향은 비로소 이야기되어 멀리멀리 사라지지 않고 퍼져나간다.
이야기는 마치 물결처럼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저는 항상 개인적인 경험, 즉 주관적인 경험과 거대한 집단의 역사적 과정 사이의 관계에 끌려왔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와 접속한다고 생각해요. 각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만큼 그 이야기들은 동시에 거대한 서사의 각 층과 연결되어 있고요.”
_올해의 작가상 제인 진 카이젠 인터뷰에서 발췌.
겹겹이 겹친 반투명한 매개 사이로 4.3과 어렴풋한 연결고리를 얻은 내가, 우리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어도》에서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이어도》에서는 갓난아이의 옷부터 수의를 만드는 데까지 사용되는 흰 천, 소창이 각 영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7개의 영상이 주목하는 것은 각기 다르지만, 영상 속 모든 서사는 소창이라는 요소를 통해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러한 연결선 상에서 제인 진 카이젠은 미군정이 들어서며 일본군 무기를 바다에 그대로 버린 것에 대한 영상 기록부터 최근 제주에 난개발로 들어서고 있는 리조트 단지를 상여를 매고 도는 퍼포먼스까지를 《이어도》에서 망라하며 4.3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단지 1948년 4월 안에서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4.3에 다가감으로 곱씹을 수 있는 이야기는 이제 넓고 광활하다. 정치 폭력으로 발생한 고통이 몇 세대를 넘어 넓고 깊게 스며든 것만큼. 4.3을 둘러싼 쟁점과 논의는 이제 하나의 지점을 넘어서 개인적인 고통의 수복과 사회적인 서사의 복원을 동시에 요구한다. 20세기 초반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죽음 정치와 학살 조사, 난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유적지 보존 문제, 소수자에게 자행되어 온 정치 폭력 연구까지. 4.3과 우리를 매개하는 시간과 사람들이 만들어준 다양한 서사의 매듭을 이젠 우리가 다시 이어갈 차례이다.
2024년 4월 4일, 이 아티클을 작성하기 전날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이 선고되었다. 12.3 계엄부터 지난한 트라우마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이번 판결로 조금이나마 위로받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 역시도 4.3의 비경험세대로서 지난겨울을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고통을 어떻게 의미 있는 논의로 전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4.3의 77주기 희생자 추념식에 이어 4일 탄핵 선고까지 정치 폭력에 대해 깊게 곱씹게 하는 한 주를 맞아, 어찌 보면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와 정치 폭력에 대한 넓은 담론을 연결하는 아티클을 작성하게 되었다.
부디 이 모든 고통과 흔들림이 분노를 넘어 예술이라는 프리즘을 만나며 우리를 잇는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부서져 내린 것들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