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잇는
출판의 가계도

복잡한 관계 속에서
책의 의미를 발견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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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에는 수많은 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글과 그림을 창조하는 작가, 내용이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도달하도록 힘쓰는 편집자, 도서를 시장에 내놓고 순환하도록 하는 출판사와 서점이 가장 먼저 떠오르죠. 하지만 실제 출판계에는 이보다 복잡한 존재들이 자리해, 더 다채로운 작용을 만들어 냅니다. 책의 모든 시각적 부분을 책임지며, 때로는 내용이 잘 읽힐 수 있게, 때로는 내용의 의미를 증폭하도록 하는 디자이너. 출판사와 작가, 도서가 더 많은 독자를 만나는 장으로 작동하는 다양한 도서 관련 행사. 숨겨진 보석 같은 책을 소개하는 독립서점과 기존 브랜드에서 출원해 독립성을 가진 위치에서 시도를 거듭하는 임프린트 등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치 커다란 가족이나 기업의 가계도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망 속에서 수많은 가치와 깊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국내 출판계의 다양한 관계를 살펴봅니다.


책과 디자인,
그 가능성을 탐구하기 | 워크룸프레스

워크룸프레스 홈페이지

강렬한 색상 표지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적힌 띠지 속 제목과 작가. ‘제안들’ 시리즈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워크룸프레스workroom press는 김형진, 박활성, 이경수가 2006년 설립한 출판사입니다. 앞서 소개한 ‘제안들’을 포함해, 다섯 명의 한국 문학 작가와 함께 발간한 ‘입장들’, 세 명의 미술가, 음악가, 음악 비평가가 동시대 음악의 면면을 탐구하는 ‘악보들’ 등 다양한 시리즈를 기획•출간했죠. 또한 윤원화, 이영준 등 국내 작가의 책을 제작하고, 히토 슈타이얼, 할 포스터, 케네스 골드스미스 등 해외 작가들의 저작을 번역하는 등 예술, 인문, 문학을 중심으로 국내외 중요한 저서를 다채롭게 발간하고 있습니다.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한 김형진•박활성과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편집자들이 다양한 주제와 담론을 포착하는 과정에 역량을 한껏 발휘한 셈이죠.

‘사뮈엘 베케트 선집’ | 이미지 출처 : 서울국제도서전 페이스북

워크룸프레스에서 발간한 도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전형적인 북 디자인이 아닌, 과감하고 개성 넘치는 외관과 내부 편집 디자인에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시리즈와 출판물에 더해, 2023년 국제 책 디자인 공모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서 명예상을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 선집』은 워크룸프레스를 대표하는 디자인 중 하나죠. 여기에는 그들이 출판사와 함께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workroom과의 관계가 돋보입니다. 스튜디오 워크룸은 출판사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미술관, 박물관, 예술가 등과 주로 협업하는데요. 국립현대미술관, 세종문화회관,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기관•전시•행사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안규철, 구본창, 백현진 등 예술가의 도록은 물론 2012년부터 음악가 정재일의 앨범 디자인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편집샵 에이랜드ALAND, 말차 전문 브랜드 슈퍼말차, 서울국제도서전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담당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스튜디오임에 분명하고요.

카우프만 홈페이지

워크룸프레스와 연결된 관계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출판계에는 ‘임프린트Imprint’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는데요. 출판사에서 회사 내외의 편집자에게 독립 브랜드를 내주고, 기획•운영 등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일종의 자회사 같은 존재가 그것이죠. 워크룸프레스 또한 작업실유령이라는 임프린트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유명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과 공동 운영 중입니다. 또 워크룸은 책, 영화 등에 나온 문장에서 영감 받은 굿즈를 만드는 브랜드 카우프만Kaufman을 운영하고, 최근 출판사와 연동해 말과 소리로 새로운 형태의 ‘책’을 만드는 사운드 시리즈 oooe를 제작했습니다. 이처럼 워크룸 프레스라는 큰 틀 안에는 디자인 스튜디오, 임프린트, 굿즈 브랜드 등 다양한 시도와 맥락이 얽혀 있죠. 특히 이들이 출판계 안팎의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는 이유는, 매번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실험적 관성, 도서와 그 내용의 시의성•중요성을 놓치지 않는 날 선 감각, 그리고 넓고 고르게 펼쳐진 연결 안에서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는 훌륭한 순환구조에 있습니다.


WEBSITE : 워크룸프레스
WEBSITE : 워크룸
WEBSITE : 작업실유령
WEBSITE : 카우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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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란 바다에서 펼쳐지는
순환 구조 | 안그라픽스

안그라픽스에서 발간한 디자인 교재 | 안그라픽스 홈페이지

국내 출판계에서, 특히 디자인에 관한 도서 중 안그라픽스의 이름을 찾지 못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UX/UI 디자인 교과서』, 『디자인 연구 논문 길잡이』 등 교재부터 미술, 건축, 브랜딩, 매거진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책에 이르기까지. 안그라픽스는 디자인을 비롯해 문화•예술 도서에 관한 넓고 깊은 바다를 만들고 있습니다. 안그라픽스는 1985년 타이포그래퍼 안상수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 디자인 그룹인데요. 현재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름을 AG로 바꿔 운영 중이며, 이와 함께 설립한 출판사가 그 이름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상수와 안그라픽스는 50년간 한국의 디자인, 특히 한글 글꼴과 편집 디자인의 정체성을 만든 만큼, 그들이 출간하는 책의 내용과 만듦새 또한 훌륭합니다 (앞서 소개한 워크룸프레스의 김형진, 이경수 디자이너 또한 안그라픽스에서 함께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AG 그룹의 역사를 아카이빙한 AG History 홈페이지

앞서 소개했듯 안그라픽스와 연결된 디자인 그룹 AG는 오랜 이력을 바탕 삼아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운영했습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 대기업부터 국내외 미술관 및 공공기관, 예술가와 협력하기도 했죠. 무엇보다 그 시작이 타이포그래피에 적을 둔 만큼, AG 타이포그라피 연구소를 운영하며 다양한 한글 글꼴 제작에 힘쓰고 있습니다. 특히 안그라픽스를 만든 디자이너 안상수는 한국 타이포그래피 학회 1대 회장을 맡기도 했는데요, 2013년 파주출판도시에 설립한 독립 디자인학교 파티PaTi(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의 교장을 역임하며 안그라픽스, AG, AG 타이포그라피 연구소와 함께 너른 관계망을 구축했죠.

AG와 AG 랩이 발행하는 웹진 ‘안팎’

여기에 더해 2022년, 워크룸에서 오래 재직한 편집자•디자이너•프로그래머 민구홍이 디렉터를 맡은 AG 랩을 설립했습니다. AG 랩은 민구홍의 1인 회사 겸 프로젝트 민구홍 매뉴팩처링과 연결되어 웹과 하이퍼링크의 특성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죠. 웹진 안팎을 운영하며 디자인 및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독특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앞서 소개한 PaTi와 민구홍이 운영하는 새로운 질서 등 교육 현장과 연계하는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새로운 질서는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현대인이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교양 강좌로, 해당 강좌에서 만난 수강생들이 설립한 그룹 새로운 질서 그 후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참여하는 등 또 다른 연결을 만들고 있죠.) 이처럼 안그라픽스와 AG가 오랜 시간 출판•디자인 업계에 자리하며 만든 복잡한 뿌리는 오늘날 웹,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WEBSITE : 안그라픽스
WEBSITE : 안팎
WEBSITE : AG랩
WEBSITE :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WEBSITE : 파티PaTi(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
WEBSITE : 새로운 질서


출판을 중심으로
확장하는 세계 | 미디어버스

미디어버스 홈페이지

앞선 두 사례가 책과 디자인의 적극적인 연결고리를 보였다면, 미디어버스Mediabus는 보다 ‘책’과 ‘출판’에 집중한 브랜드죠. 영화이론 및 영화 프로덕션을 공부한 임경용 대표와 디자이너 구정연은 2007년 그들만의 진Zine을 만들기 위해 소규모 출판사 미디어버스를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미디어버스는 기성 출판계에서 보기 드문 신선한 담론을 다루는 서적과, 진, 아티스트 북 등 국내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책을 다수 발간했는데요. 이와 함께 2010년 독립서점 더 북 소사이어티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많은 애서가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양한 독립 서적을 유통하는 더 북 소사이어티는 국내외 실험적인 도서를 제작•발간하는 미디어버스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는데요. 『탕핑주의자 선언』, 『출판 선언문 출판하기』, 『방법으로서의 출판』 등 ‘선언문’, ‘책에 대한 책’처럼 독특한 도서부터 류한길, 이불 등 미술가의 전시 도록, 아피찻퐁 위타세라쿤, 요나스 메카스, 아돌프 로스 등 국내외 유명 예술가의 저서를 발간했습니다. 나아가 유운성, 이한범 등이 참여한 영상비평 전문지 오큘로OKULO를 발간하고, 서울시립미술관과 함께 SeMA 비평총서를 제작하는 등 영화와 미술을 중심으로 예술 전반의 도전적인 출판을 지속하고 있죠.

더 북 소사이어티가 기획한 전시 <불완전한 리스트> | 이미지 출처 : 미디어버스 홈페이지, 일민 미술관

미디어버스는 이뿐 아니라 임프린트, 협력 프로젝트, 프로그램 운영 등 다방면에서 출판과 관련한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디자이너 듀오 신신과 함께 설립한 임프린트 ‘화원’은 ‘디자인의 수행적 실천’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미디어버스의 시작을 함께한 『공공 도큐멘트』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 공동체”를 다루며 말 그대로 ‘출판을 중심으로 한 교류의 장’으로서 작동했죠. 그뿐 아니라 아트선재센터, 백남준 아트센터, 중국의 페이퍼로그Jingren’s Paperlogue 등 공간에서 큐레이팅 한 전시를 열고, 더 북 소사이어티를 거점 삼아 강연, 북토크, 워크숍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디어버스와 더 북 소사이어티의 이름으로 베를린 등 유럽 출판사 및 출판 공동체와 협력하고, 아시아의 출판 시장과 함께 움직이며, 후쿠오카 • 토키오 • LA 아트북페어 등 전 세계의 출판 흐름에 올라타 책과 출판이 속한 넓은 연결망을 이루고 있죠.

에디터가 2022년 촬영한 건물 사이니지

그리고 더 북 소사이어티는 상수동과 통의동을 거쳐, 현재 옥인동에 자리해 운영하고 있는데요. 서촌 한구석에 위치한 신축 3층 건물은 입주 당시 더 북 소사이어티 및 미디어버스의 사무실과 함께 워크룸•워크룸프레스, 양장점, 슬기와 민 사무실이 들어서 함께 사용했습니다. 실제로 미디어버스가 설립되던 2000년대 중후반에는 앞서 소개한 여러 출판사•스튜디오는 물론 디자이너 듀오 신신, 길종상가 등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여러 인물과 집단이 등장했는데요. 미디어버스는 이들과 적극적인 협력과 도전을 함께하며 지금까지도 그들의 본질인 출판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과 관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더 북 소사이어티라는 공간의 의미를 생각하면, 독립적인 움직임을 지닌 채 도전과 실험을 지속하는 미디어버스의 움직임이 다양한 관계와 연결되며 더 커다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WEBSITE : 미디어버스
WEBSITE : 오큘로
WEBSITE : 화원
미디어버스 인터뷰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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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씩 느끼는 감상은, 많은 경우 책이 너무 단순한 인식에 갇혀있다는 생각입니다. 그저 “작가가 쓴 글을 편하게 읽히도록 배치해 종이 위에 인쇄하면 책이 된다”라는 식의 말이 그렇죠. 또 그렇게 만들어진 책은 단순히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 유통된 채 그렇게 팔리거나 잊히는 게 당연하다는 인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은, 위의 사례에서 살펴봤듯, 인물과 출판사, 서점, 행사, 분야, 국가를 막론하고 연결된 수많은 존재의 연결로 만들어지고, 그 관계망 안에서 다양한 순환 구조와 새로운 움직임을 통과해 우리 앞에 드러나죠. 때로는 그 어떤 제품보다 멋진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유명 강의나 예술 작품보다 개성 넘치는 사유를 전하기도, 각종 프로그램으로 둘 도 없는 경험을 제공하기도 하는 기회들이 책, 그리고 출판계의 멋진 흐름에서 만들어집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작은 출판사로서 임프린트와 이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는 독립서점, 또 새로운 시선으로 책을 마주하게 하는 훌륭한 디자인의 역량이 주요하게 작동하곤 합니다. 때로는 끈끈하게, 때로는 독립적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관계를 닮은 출판계에서, 우리의 지식과 영감, 감정과 흥미를 한껏 고양시키는 책의 연결고리를 찾는 건 독서와는 또 다른 재미를 제공합니다.


Picture of 박정호

박정호

텍스트로 텍스트 너머의 맥락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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