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박자,
첫 마음

리듬으로 세계를 여는
영화의 초심
Edited by

영화의 오프닝은 태도가 먼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대체로 제목보다 앞서 관객의 호흡을 붙잡고 ‘이 세계는 이렇게 숨 쉬고 이렇게 움직인다’를 선언하는 곳. 그래서 오프닝은 영화가 지니는 초심(初心)의 가장 순도 높은 증거입니다. 이후의 장면 전개가 아무리 화려하고 현란해도, 오프닝에서 세운 약속이 흐트러지면 영화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반대로 선명한 오프닝이 중심을 잡으면 서사는 그 리듬의 변주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죠.

오프닝이 걸작인 영화는 많지만 이번 아티클에서는 <베이비 드라이버>, <드라이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손꼽았습니다. ‘음악과 리듬으로 세계를 연다’는 공통의 초심이 인상적이기 때문인데요. 음악-톤-소리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스펙트럼을 따라 세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에 답합니다. “첫 박자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오프닝에서 초심을 공표하고 엔딩까지 그 약속을 밀어붙이는 이야기를 함께 즐겨보기로요. 무조건 재미를 보장하는 선정작들이기도 합니다.


<베이비 드라이버>, 2017

인물의 귀에서 흐르는 비트가 세계를 춤추게 한다

이미지 출처 : IMDb

주인공 베이비가 듣는 이어폰 음악, 극중 소리인 디제틱 사운드가 곧 관객도 함께 듣는 배경음악이 되고 상황 편집이 동기화되는 오프닝. 존 스펜서 블루스 익스플로전(Jon Spencer Blues Explosion)의 ‘Bellbottoms’로 시작해 차문·와이퍼·기어 변속 소리, 컷 편집 등이 비트에 잠깁니다. 이 영화의 도입에서는 인물의 개인적인 박자가 도시의 규칙으로 확장됩니다. 세계는 음악과 액션이 완벽히 결속되는 곳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초심은 내내 변주됩니다. 초반부 ‘커피 런’ 타이틀 시퀀스에서 가사가 간판과 벽화로 시각화되고, 총격전은 드럼 필인(4마디 또는 8마디 단위의 마지막 마디에서 포인트를 주는 요소)처럼 편집됩니다. 사랑과 배신, 위기 같은 서사의 굴곡도 결국 베이비가 리듬을 잃느냐 되찾느냐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그가 음악을 멈추면 세계가 비틀거리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면 질서가 회복되네요. 오프닝에서 선포된 리듬=질서라는 초심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규칙이 되고 구동 엔진이 됩니다.


<드라이브>, 2011

말 대신 톤으로 감정의 속도를 규정한다

이미지 출처 : IMDb

<드라이브>의 오프닝은 말을 아낍니다. 또 자동차 추격답지 않게 길게 끄는 호흡을 유지하죠. 과묵한 주인공의 윤리를 청각적으로 주입하는 소리가 낮게 깔리는데, 이는 과시적인 박자를 금지하며 은신의 기술을 설득합니다. 하지만 이런 절제가 긴장감을 결코 떨어뜨리지는 않습니다. 엔진의 저역 박자와 경찰의 경고음-도시 소음의 고역이 쪼개지며 긴장을 발생시켜 충돌 없이도 심박을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군중 이동에 맞춰 주인공의 목표인 은폐를 성공시키며 도시 리듬에 합주하는 전략을 보여줍니다.

캐릭터 설명서로서 기능하는 오프닝은 카빈스키(Kavinsky)의 ‘Nightcall’로 이어지고 관객이 곧장 그 톤을 체화하도록 이끕니다. 네온 도시에 깔리는 타이포의 미묘한 호흡도 호응합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5

몸·엔진·금속이 오케스트라가 된다

이미지 출처 : IMDb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는 선율을 지우고 리듬을 실험적으로 배치합니다. 엔진·타이어 마찰·금속 마찰·호흡을 리듬 섹션으로 구성합니다. 라디오 잡음과 붕괴된 세계의 잔향만 스치고, 사막의 정적 위로 엔진의 낮은 떨림과 바람, 모래 소리 같은 환경음이 층을 만듭니다. 맥스가 도마뱀을 밟는 순간 터지는 짧은 충격음이 첫 생존 본능의 리듬을 각인시키죠. 워보이의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면, 이 메인 템포 위에 불규칙한 금속 마찰이 얹혀 폴리리듬(두 개 이상의 다른 리듬이 동시에 연주되는 것)이 형성됩니다. 이후 내적 환영의 번쩍임이 불시에 끼어들며 심리적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긴박한 추격이 이어지다 전복과 함께 급작스러운 무박(정지)을 길게 끌어 관객의 심박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기도 하는 순간. 이후 쇳소리가 메트로놈을 대신하고 세계의 권력이 어떻게 박자로 사람을 통제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요컨대 이 오프닝은 ‘음악 없이도 몸·엔진·금속·호흡이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초심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뒤이어 펼쳐질 두 시간의 질주는 단순한 액션의 연쇄가 아니라, 처음에 각인된 질주-정지-통제의 리듬을 끊임없이 수행·해방하는 과정으로 읽힙니다.

오프닝에서 세운 기준을 엿볼 수 있는 추격 장면

세 영화가 공유하는 초심은 명료합니다. “첫 박자에 세계를 건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개인의 비트를 도시의 법칙으로 확장하고, <드라이브>는 톤으로 인물의 윤리를 정의하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물리적 소리들로 서사의 메트로놈을 만듭니다. 이후의 장면들은 모두 그 첫 문장의 변주, 혹은 위반으로 이어지네요. 그래서 오프닝은 설계도처럼 느껴집니다. 영화를 전개하든, 글을 쓰든, 하루를 시작하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첫 90초의 리듬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당신의 초심은 몇 BPM으로 시작되나요?


Picture of 한나

한나

가장 보편적인 일상의 단면에서 철학하기를 좋아합니다.

에디터의 아티클 더 보기


문화예술 전문 플랫폼과
협업하고 싶다면?

지금 ANTIEGG 제휴소개서를 확인해보세요!

– 위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 ANTIEGG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 위 콘텐츠의 사전 동의 없는 2차 가공 및 영리적인 이용을 금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