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을 닮아 품이 넉넉하고 담백한 흰 빛을 머금은 달항아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 백자입니다. 비슷한 듯 같아 보이는 달항아리라도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면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달항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미묘하게 기운 곡면과 표면에 그려진 미세한 굴곡, 흙이 구워지며 새겨진 희미한 흔적들이 달항아리 하나하나의 개성을 이루고 있죠.
우리의 하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똑같아 보이는 날들이 계속될 때, 우리는 삶이 정체된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풍경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오늘은 결코 어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자신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유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차이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죠. 현대 유형학적 사진의 기원에서 출발하여, 반복을 통해 세계의 또 다른 얼굴을 포착한 현대 사진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살펴봅니다.
베허 부부:
현대 유형학적 사진의 기원

오늘날 현대 사진에서 반복과 유형학이라는 방법론의 근간을 세운 것은 독일 뒤셀도르프 학파의 창시자인 베허 부부(Bernd and Hilla Becher)입니다. 이들은 뒤셀도르프 근처 지겐 지역의 건물로부터 시작해 급수탑, 용광로, 곡물 창고 등 산업 시대를 상징하는 시설물을 촬영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주관적인 작가의 시선을 배제하고 촬영 조건을 철저히 통제했다는 점입니다. 직사광선이 약해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흐린 날을 고르고, 거리감을 없앤 수평 구도로 통일했죠. 중립적인 시선으로 촬영된 이미지들은 격자 그리드 형식으로 나란히 배치됨으로써 완성됩니다. 마치 표본처럼 무표정한 사진, 비슷한 요소들이 모여 차이가 드러나는 유형학적 사진(Typological Photography)이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동일한 기능을 가진 시설물들의 반복되는 이미지에서는 구조, 재료,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미세한 차이가 포착됩니다. 베허 부부의 실험은 사진이 객관적인 기록을 한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죠. 뒤셀도르프 학파로도 불리는 베허 학파는 아래 소개하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와 토마스 루프 외에도 수많은 현대 사진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현대 사회의 반복되는 시스템

형형색색의 상품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우리 주변의 대형 마트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매대가 세워진 복도가 무한히 확장할 것만 같은 이 사진은 베허 학파 출신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의 <99 Cent> 라는 작품입니다.

구르스키는 여러 장의 사진을 포토샵과 같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으로 이어 붙여 카메라 렌즈의 한계를 넘어선 거대한 화면을 만듭니다. 마트뿐만 아니라 금융 센터나 경기장 등 현대 사회의 자본과 시스템이 응집된 장면을 커다랗게 인쇄하죠. 이 작업에 몇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모여 있고, 물건들은 더 많이 반복되고, 더 많이 생산된 것처럼 보입니다.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규격화된 패턴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위화감을 자아내는 적나라한 이미지로 드러납니다.

무의식적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회 시스템을 사람과 물건이 빽빽하게 응집된 이미지로 마주하면 섬뜩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저 많은 물건들이 매 순간 새로 만들어지고, 버려진다고 생각하면 그 압도적인 양을 지구에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죠. 하지만 동시에 그런 우리 자신을 대면하고 성찰하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이미지는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더라도 인간의 고유한 차이가 소멸되지 않음을 역설하기도 하죠. 경각심을 갖고 삶을 되돌아보는 순간 우리는 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베허 부부처럼 사물과 거리를 둔 냉철한 시선이 오히려 개인이 보유한 미세한 차이의 가능성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루프:
반복이 그리는 추상적인 패턴

그의 초기작인 <Porträts> 연작은 동일한 조명과 구도로 찍힌 거대한 인물 사진을 반복적으로 나열합니다. 2m가 넘는 여러 명의 증명사진을 모아둔 것처럼요. <Porträts> 연작 이미지가 늘어날수록 한 명 한 명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익명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오로지 그들의 눈빛이나 머리색, 눈썹의 굴곡 만이 뚜렷한 물리적 차이로 남습니다.
이는 소수자의 삶을 투영해 인간의 본질을 쫓았던 다이안 아버스나, 감정이 폭발하는 찰나의 진실을 포착하려 했던 리처드 아베돈의 전통적 관습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토마스 루프는 개인을 마치 식물 도감의 표본처럼 아카이브화 하여 외면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차이를 보여줍니다. 객관적인 시선이 오히려 세상을 보다 실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루프는 디지털 세계의 본질을 픽셀로 파헤친 <Jpeg> 시리즈 뿐만 아니라, <Sterne> 연작을 통해 우주적 스케일의 반복을 다루기도 합니다. 낭만적인 밤하늘을 포착한 듯한 이 작업은 유럽 남부 천문대(ESO)의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천체 사진을 확대한 것입니다. 천문대에 설치된 망원경이 기계적으로 수집한 하늘의 조각들은 따로 떼어내어 거대하게 확대했을 때 별들이 단순히 동일한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무수히 많은 별로 가득찬 화면에는 저마다의 밝기와 거리감이 만드는 고유한 깊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거시적인 물리적 거리를 탐구했던 루프는 이제 미시적인 자연의 패턴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자연의 패턴을 의미하는 프랙탈 패턴을 거대한 융단에 프린트하죠. 실제로 2024년 PKM 갤러리에서 개최한 토마스 루프의 개인전 <d.o.pe.>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융단의 미세한 털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듯 끊임없이 패턴이 생성되는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았죠.
‘d.o.pe’라는 시리즈 제목은 올더스 헉슬리의 자전적 에세이『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자연에서 발견한 프랙탈 패턴들은 컴퓨터에 입력되어 알고리즘으로 인해 무작위로 변형되고 왜곡되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루프의 다양한 반복에 대한 실험은 우리에게 무작위적인 반복, 과잉적인 반복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층위의 아름다움에 대해 탐구하게 합니다. 이미지는 이러한 차이의 실험을 통해 창조될 수 있는 결과물인 것이죠.
구본창:
깊이 들여다보며 발견한 아름다움
한국 현대 사진의 거장 구본창은 반복이라는 주제를 가장 명상적으로 탐구합니다. 토마스 루프가 사진에서 영혼을 지우고 차가운 표면의 차이를 기록했다면, 구본창은 이와 유사한 유형학적 형식을 빌려오되 그 안에 작가 특유의 시선을 투영합니다. 그는 루프처럼 대상을 일정한 규격과 규칙 속에 배치하지만, 그 목적은 대상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것을 넘어 그 대상과 나누는 정서적 교감에 가깝습니다.

구본창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수년간 전 세계에 흩어진 조선 백자를 찾아 다니며 동일한 배경과 색감으로 촬영합니다. 부드러운 살구빛을 머금은 한지 위에 고요히 놓인 백자는 그가 지닌 미세한 균열과 얼룩으로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먼 곳까지 흘러간 백자를 직접 어루만지며 배치한 <백자> 시리즈에는 백자 하나하나의 혼이 담겨 있죠.

각기 다른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놓인 <비누> 시리즈는 조금 더 우리 곁의 지극히 사소한 일상으로 다가옵니다. 쓰면 쓸수록 우리의 손에서 닳아 없어지는 비누는 사실 가장 가깝고도 헌신적인 소모품입니다. 매일 몇 번이나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죠. 작가는 쓰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깎여 나간 비누의 비정형적인 형태에서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비누 한 토막에서도 고유한 존재감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구본창의 작업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나 토마스 루프처럼 거대한 작업을 다룰 수는 없지만, 구본창처럼 우리 주변의 낡고 사소한 물건들을 고요히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의 사진은 예술이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대상을 향한 따뜻한 응시와 발견에 있음을 이야기하며 우리 또한 각자의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해볼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균형있는 구도로 담긴 미니멀한 사진과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물들은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고유한 영혼의 울림을 찾아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보며 가장 놀랐던 것은 별의 개수가 아니라 별마다 모두 다르게 느껴졌던 깊이감이었습니다. 그저 밤하늘이라는 평면에 나열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별들이 무한한 우주 안에 제각각의 거리로 떠 있었던 것이죠. 반복이란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이 지닌 고유함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 구본창 작가의 비누처럼 가장 익숙한 형태의 반복에서도 어쩌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진정한 차이, 그리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작은 존재의 차이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숨죽이고 있던 미세한 차이가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