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서
살아남기

기술에 대체되지 않는
큐레이터의 조건

미술 이론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미래를 비관하곤 했습니다. 인간의 판단과 선택까지 모방하는 기술 앞에서 언젠가 인간의 역할이 완전히 대체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쌓아온 공부와 경험의 끝이 인공지능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라면, 이 모든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했죠. 분야를 막론하고 요즘의 화두는 더 나은 커리어나 연봉이 아니라, AI에 대체되지 않는 방법일 겁니다.

그러나 인간과 달리, 프롬프트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은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미 존재하는 언어, 이미지, 행동, 판단의 흔적을 학습하고, 그 유사성을 계산해 인간을 닮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이 때문에 AI가 수행하는 것은 창작이라기보다 모방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 칼스루에의 미술관 ZKM(Zentrum für Kunst und Medien Karlsruhe)이 2020년부터 추진해 온 프로젝트 <intelligent.museum> 은 바로 이 모방의 메커니즘을 전시와 연구의 중심에 놓고, 인공지능과의 협업을 실험 합니다.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서 인공지능과 협업할 때, 인간 큐레이터와 기술의 역할과 한계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AI와 함께 일하는 상황에서 큐레이터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통계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세계를 모방하는 기술이 재현할 수 없는 큐레이터의 역할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글은 ZKM의 사례를 통해 그 질문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다수의 경로를 따를 것인가

만약 전시가 관람객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스스로 구조를 바꾼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어디에서 멈췄는지, 무엇을 그냥 지나쳤는지, 어떤 공간이 반복적으로 비어 있었는지를 전시가 ‘알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때 전시는 더 이상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관람 행위를 반영해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미지 출처 : ZKM | Karlsruhe

<intelligent.museum> 프로젝트는 이러한 상황을 실제로 구현합니다. LiDAR 기반 시스템은 관람객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익명 데이터로 수집해, 전시 공간 안에서 어떤 행동이 반복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데이터가 전시에 다시 반영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시는 관람자를 관찰하고, 그 관람 행위를 기준 삼아 스스로를 닮아갑니다.

이미지 출처 : ZKM | Karlsruhe

여기서부터가 큐레이터의 영역입니다. 통계가 보여주는 ‘다수의 경로’를 따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머무르는, 또 머무르지 않는 공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죠. 오래 머문다는 사실이 곧 이해나 공감을 의미하는지, 또는 전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유 때문인지는 통계로 알 수 없습니다. 관람객의 선택은 언제나 전시의 서사, 작품의 맥락, 각자의 사회적 조건과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평균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의미를 판단하지는 못합니다. 전시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경험을 의도하는지, 때로는 관람객의 저항이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지 여부는 큐레이터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미술관이 AI가 만들어낸 결과를 즉각적인 성과 지표처럼 받아들인다면, 전시는 통계만을 반복하는 구조로 축소될 수도 있겠죠. 기술이 제공하는 것은 방향이 아니라 재료이며, 그 재료를 어떻게 읽고 사용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책임일겁니다.


매끄러운 번역이 좋은 번역인가

인공지능 번역은 언제나 빠르고 깔끔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문장은 작업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고, 그만큼 번역이라는 직업이 가장 먼저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도 존재하죠. 그러나 매끄러운 번역이 곧 좋은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ZKM | Karlsruhe

<intelligent.museum> 은 자연어 처리(NLP)를 활용한 다국어 인식 정보 패널을 통해 이 간극을 드러냅니다. 이 시스템은 전시장 안에서 관람객이 사용하는 언어를 자동으로 인식하고, 작품 설명을 해당 언어로 즉시 변환해 제공합니다. 2021년 ZKM 전시 <BioMedien>에서 처음 테스트되었으며, 현재는 100개 이상의 언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이미 큐레이터가 작성한 텍스트를 언어적으로만 모방해 전달할 뿐, 어떤 정보가 더 중요하거나 보충되어야 하는지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미지 출처 : The GreenEyl

번역된 텍스트는 언제나 동일한 세계관과 해석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관람객에게 같은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힐 수도 있겠죠. 중립적이고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해석을 여러 언어로 확장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겁니다. 기술은 언어의 장벽을 낮추지만, 해석의 차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물론 큐레이터가 모든 문화적 맥락을 완벽하게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관람객이 이 한계를 인지한 상태에서 전시를 경험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어떤 해석이 선택되었고, 무엇이 생략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오해와 충돌의 가능성마저 전시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 해석을 모방하는 기술 앞에서 큐레이터는 텍스트의 정확성보다 보편적인 해석의 위치와 기본값을 고발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신뢰는 어디에 있는가

인공지능은 텍스트를 생성하는 데서 나아가, 이제는 그 텍스트를 음성으로 구현합니다. 오늘날 숏폼 콘텐츠에서 흔히 접하는 AI 내레이션처럼, 실제 사람의 목소리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음성도 구현이 가능해 졌습니다. 말투, 억양, 호흡까지 재현되는 이 음성은 정보의 출처보다 전달 방식에 먼저 신뢰를 부여하도록 만들죠.

이미지 출처 : ZKM | Karlsruhe

‘Botcast’는 <intelligent.museum> 레지던시에서 제작된 작업으로, AI가 뉴스 텍스트를 수집, 재구성한 뒤 실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라디오 방송을 생성합니다. 이 방송은 일부러 아날로그 라디오를 통해 송출됩니다. 기술이 모방하는 것은 정보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라디오라는 매체에 오랫동안 기대어온 ‘진짜 같음’, ‘공공성’, ‘객관성’이라는 신뢰의 형식이라는 점이 드러나죠.

이미지 출처 : ZKM | Karlsruhe

이 지점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은 기술을 비판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이러한 형식을 신뢰해왔는지, 그리고 그 신뢰가 어떤 역사와 관습 속에서 형성되어 왔는지를 전시의 맥락 안에서 드러내는 데 있죠.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음성은 사실과 거짓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과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기술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형식을 통해 말하느냐입니다. ‘자연스러운 목소리’에 신뢰를 부여하는 감각은 수많은 플랫폼에서 재현됩니다. ‘Botcast’는 라디오라는 오래된 매체를 통해 그 구조를 다시금 가시화하고, 오늘날 숏폼 속 AI 내레이션이 어떻게 우리의 판단을 앞서 조직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큐레이터는 신뢰가 새롭게 만들어지기보다, 반복적으로 모방되며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기술이 모방하는 세계와 그 재현에 역사적, 사회문화적, 감정적, 또는 정치적 맥락을 부여하고 질문하는 일입니다. 인공지능은 기준을 학습하고 반복적으로 재현할 수는 있지만, 그 기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누구의 경험을 중심에 두고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자연스럽게 배제하고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현재 인공지능이 의존하고 있는 데이터와 리소스는 여전히 서구 중심의 지식 체계와 정보 환경에 기반해 있습니다. 정보의 양과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기술 인프라 모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기준이 ‘상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중립적인 판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힘을 가진 기준을 더욱 정교하게 재현하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공지능과의 공생은 역할을 단순히 나누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술이 쉽게 건너뛰는 질문, 즉 누가 말하고 있는지, 누구의 기준인지, 무엇이 지워지고 있는지를 끝까지 붙들고, 기술과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큐레이터의 역할은 답을 제시하는 데 있기보다, 기술이 너무 쉽게 답해버린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 불편한 간극을 전시장 안에 남겨두는 데 있습니다.


WEBSITE : intelligent.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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