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실용성과 미의 경계에서 자주 논의되지만, 때로는 동시대 사람들의 태도와 가치관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언어가 되기도 합니다. 까르네 볼렌테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 브랜드입니다. 오랫동안 금기처럼 여겨진 섹슈얼리티의 담론을 보다 열린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죠. 대담과 유머, 연대의 정신으로 성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 볼까요.
포르노 영화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
까르네 볼렌테는 히지리 엔도(Hijiri Endo), 테오드로 파머리(Théodore Famery), 아고스톤 팔린코(Agoston Palinko)가 2015년 설립한 파리 거점의 패션 브랜드입니다. 이들은 다양한 성적 취향과 정체성 등이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섹스 포지티브’를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삼았습니다.
세 창립자의 인연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도쿄로 교환학생을 떠난 팔린코는 데이트 앱을 통해 엔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팔린코는 파리로 돌아와 파머리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엔도 역시 뒤이어 파리에 합류하며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죠. 함께 술을 마시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밤, 이들은 패션과 성에 대한 관심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그 대화는 곧 브랜드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브랜드명인 까르네 볼렌테는 1980년대 이탈리아 포르노 영화 ‘The Rise of the Roman Empress’의 원제입니다. 본 작품의 주연 배우 치치올리나(Cicciolina)가 보여준 성에 대한 자유롭고 긍정적인 태도는 브랜드 세계관의 초석이 되었죠. 빈티지 포르노와 고전 영화, 예술 작품,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 또한 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요소입니다.
까르네 볼렌테는 자신을 브랜드보다 하나의 ‘커뮤니티’에 가깝다고 규정합니다. 성과 사랑을 누구나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 때문인데요. 또한 이들은 온라인 판매 수익의 일부를 HIV/AIDS 관련 비영리단체 ‘Association AIDES’에 기부하며 브랜드가 지향하는 연대 가치를 사회적인 실천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꾸밈없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에로티시즘

까르네 볼렌테가 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솔직합니다. 과감한 메시지에 귀여운 삽화와 자수를 더해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죠. ‘I LOVE NY’의 디자인을 비튼 ‘Ex Appeal’, 성적 표현과 공동체를 연결한 ‘Cum-munity Values’ 같은 언어유희는 브랜드가 성을 다루는 태도를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들에게 성은 언제든 부담 없이 다룰 수 있는 소재입니다. 기성복부터 홈 데코, 향수 등 라이프스타일의 영역까지 폭넓게 카테고리를 전개하는 것 역시 성에 관한 논의를 특정 환경에만 가두지 않으려는 선택이 아닐까요? 성이 특별한 주제가 아니라 삶의 일부라면, 그 표현 역시 생활 전반에 놓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러한 관점은 컬렉션의 주제로도 이어집니다. 역사적인 신화 이야기부터 첫 키스의 이미지까지, 까르네 볼렌테의 컬렉션은 매 시즌 성과 사랑 속 구체적인 이야기를 포착해 풀어냅니다. 이들의 서사는 언제나 익숙합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긴장,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의 설렘, 혹은 욕망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처럼 까르네 볼렌테는 사랑이 점화하는 미세한 지점들을 반복해서 호출합니다.
다채로운 정체성의 연대,
Cum Together

까르네 볼렌테의 Cum Together 컬렉션은 브랜드가 지향하는 섹스 포지티브를 분명하게 드러낸 컬렉션입니다. 페미니즘, 펑크 등 1980년대 액티비즘 운동에서 영감받아 파스텔 컬러와 다채로운 그래픽을 적극 활용했죠. 해당 시즌은 특정 관계의 피상보다 서로 다른 개성과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공존에 집중했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공용 공간인 엘리베이터에 잠시 머물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직접 촬영합니다. 이는 각자가 가진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덧없고 짜릿한 순간,
One Night Stand

One Night Stand 컬렉션은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에 드러나는 충동적이고 강렬한 감정에 주목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시선이나 짧은 대화처럼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장면 속의 미묘한 기류를 시각적으로 풀어냈는데요.
이 컬렉션은 사회가 원나잇 스탠드를 바라보는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며, 관계의 지속 여부가 경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어떤 만남은 오래 이어질 필요가 없고, 어떤 기억은 짧아도 선명히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상기시킵니다.
끝나지 않는 여름의 열기,
Ti Amo Carne

2025년, 까르네 볼렌테는 설립 10주년을 기념한 컬렉션을 공개했습니다. 지난 10년간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회고하며, 그와 함께 변화해 온 섹슈얼리티와 사랑, 관계의 모습을 다시 고찰하는 데 집중했죠.
뜨거운 여름, 도시와 숨겨진 야외 장소에서 영감을 얻은 본 컬렉션은 ‘Sea, Sex, & Fuck’, ‘Stuck in Paris’ 등 여섯 개의 하위 테마로 사랑을 바라봅니다. ‘Stuck in Paris’는 낭만과 혼란 속 사랑이 잔존하는 파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Sea, Sex, & Fuck’는 숨겨진 야외 장소에서 벌어지는 거침없는 교감과 도발적인 이미지에 시선을 옮겼습니다.
성과 사랑은 삶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주제입니다.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면서도,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지나온 보편적인 영역이죠. 살아가는 방식이 각기 다른 만큼 이를 다루는 태도도 다양합니다. 까르네 볼렌테는 이 차이를 전제로 삼고, 모두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공존과 연대를 제안합니다. 이들의 디자인은 특정 관계의 모습을 의도하기보다는 우리를 이루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를 자연스레 떠올리도록 합니다.
까르네 볼렌테가 흥미로운 이유는 성을 둘러싼 담론을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몸과 취향,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답의 출발점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