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계절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계절이기도 하죠. 겨울은 많은 이들이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소외된 이들은 언제보다도 더욱이 외로운 계절이라고 하죠.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 이 계절을 즐기는 가운데 혼자임이 더욱 사무치기 때문이라고 해요.
한 해가 시작되는 겨울,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계실 텐데요. 그 가운데 우리의 눈이 미처 닿지 못했던 구석진 곳들을 조명하려는 목표를 함께 넣는 건 어떠신가요?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소외된 이들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도 무척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여러분이 그런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드릴 스페인 바로크 문학 작품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스페인의 바로크 시대는 대략 17세기,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강국이 된 스페인 제국이 점차 해체되던 시기였습니다.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금으로 부유해질 거란 예상과 달리 인구 감소, 빈곤, 질병, 경제위기가 발생하며 서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죠. 더불어 ‘순수한 기독교인’만을 스페인 국민으로 대우하겠다는 정책에 따라 혈통에 의한 차별이 심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탄생한 문학 작품들은 대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 속에서 인생의 허무함과 세속적 가치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은 문학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는 세 작품을 만나 보시죠.
근세 스페인의
평범한 민중을 만나다
돈 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첫 순서부터 『돈 키호테Don Quijote』라니. 너무 뻔한가요? 하지만 스페인 바로크 문학을 논하며 이 작품을 빼놓을 순 없죠.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등의 2차 창작물로 『돈 키호테』를 친숙하게 접한 독자분들 역시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작품의 두께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올겨울 쉽지 않은 고전을 독파하는 ‘도전’을 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단연 『돈 키호테』를 추천합니다.
『돈 키호테』는 ‘미친 노인네가 기사를 자처하며 엉뚱한 모험을 하는 이야기’라고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틀린 요약은 아닙니다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훨씬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쇠한 하급귀족(이달고Hidalgo)입니다. 한때 유럽을 휩쓸었던 기사 소설의 광팬이죠. 읽고 또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돈 키호테는 직접 기사로서 모험을 나서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미 편력 기사의 모험은 시대착오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과 공주, 괴물을 만나는 대신 다양한 계층의 일반적인 사람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가 성주로 착각하는 여관 주인, 귀족 아가씨들로 착각하는 창녀들이 대표적입니다. 돈 키호테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평범한 여관의 사람들, 귀족에게 순결을 빼앗긴 평민 아가씨, 북아프리카에서 탈출한 포로, 그를 따라온 무슬림 여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당대의 결혼식이나 축제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장면들에서 스페인의 전통문화나 음식에 대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 판사Sancho Panza의 콤비입니다. 돈 키호테의 평범한 이웃이었던 산초는 편력 기사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부자의 꿈을 안고 얼떨결에 돈 키호테를 따라 나섭니다. 모험의 고단함을 피해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얻고자 하는 산초와 허황된 꿈을 꾸는 돈 키호테가 부딪히며 코믹한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어느새 누구보다 끈끈한 사이가 된 돈 키호테와 산초의 우정 역시 감격스러운 부분이죠.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영웅을 꿈꾸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돈 키호테’라 새로이 칭하며 과감히 모험을 나서는 노인의 이야기, 삶을 살아가는 재치, 믿음에 관한 지혜, 정체성에 대한 탐구까지, 『돈 키호테』를 완독하고 나면 작품이 주는 감동에서 한동안 헤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소외된 계층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작자 미상)

짧게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Lazarillo de Tormes』라고도 불리는 작품입니다. 한국어 번역본의 표지엔 비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인상적이네요. 이 작품이 피카레스크 소설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라는 점은 이러한 책 표지를 설명해 줍니다. ‘피카레스크 소설’이란 악동이지만 분명 연민이 가는 주인공 ‘피카로’를 주인공으로 하여, 주인공이 악인으로 가득한 세상을 거칠게 살아 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바로크 시대에 절정을 이룬 피카레스크 소설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지만, 정확한 집필 시기는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로선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범한 하층 계급의 주인공이자 ‘반영웅(anti-hero)’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이 무척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소설들은 주로 상류층의 무용담이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이 소설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가난한 주인공 라사로(Lázaro)가 여러 주인을 섬기며 겪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합니다. 순진했던 소년 라사로는 그가 만나는 다양한 주인들로 말미암아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의 꾀와 재치로 어려운 삶을 타개해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악행을 저지르기도 도덕적으로 타락하기도 하지만 그가 가진 특유의 연민과 말솜씨로 인해 독자는 어느새 그를 응원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라사로가 섬기는 주인들은 라사로보다는 조금 낫지만, 역시 좋지 못한 처지에 있습니다. 여인네들에게 기도를 해주며 구걸을 하는 장님, 구두쇠 사제, 가난하지만 겉멋과 허세만 가득한 기사의 종자 등 당대 스페인의 민중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인물상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당대 스페인의 약자들이 살아가던 삶과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던 사제들의 모순을 엿볼 수 있죠. 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늘려 가며 ‘제국의 영광’을 누리던 스페인의 어두운 그늘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칙칙한 분위기일 것 같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의외로 ‘피식’ 웃음이 나는 일이 많습니다. 이는 라사로를 통해 전해지는 작가 특유의 재치와 해학이 돋보이기 때문이죠. 때로는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종교를 과감하게 비판하는 구절들에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이번 연말, 재미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고전을 읽고 싶다면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를 한 번 읽어보세요.
평민들의 반란을 정당화하다
푸엔테 오베후나 (로페 데 베가)

다음은 희곡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인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는 바로크 시대 스페인의 대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희곡작가였습니다. 당시엔 야외극장에서 상연하는 연극이 유행했는데, 귀족들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즐기던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로페 데 베가의 작품 중엔 평범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푸엔테 오베후나Fuente Ovejuna』가 바로 그러한 작품인데요. 실제로 1476년에 동명의 마을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푸엔테 오베후나는 평범한 시골 마을입니다. 그러나 페르난 곤살레스 데 구스만이라는 사령관이 이 마을의 지배자로 부임하며 온갖 악행을 일삼습니다. 주민들을 착취하고, 여인들을 강제로 취하려 하죠. 어쩔 수 없이 구스만의 명령에 따르던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사건을 기점으로 폭발하고 맙니다. 결국에 합심하여 구스만 사령관을 살해하기로 한 것이죠.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구스만 사령관을 살해한 주동자를 찾고자 하는 판사의 고문 장면입니다. 판사는 마을 사람들을 고문하며 주동자의 이름을 댈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답합니다. “푸엔테 오베후나가 그랬습니다.” 이때 고문을 당하는 이들은 노인, 여성, 소년 등 당시 스페인 사회의 약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굳건히 마을의 결속을 지켜냅니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지배자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되죠.
마지막 장면에 국왕이 마치 ‘해결사’처럼 등장하는 것은 평민들이 귀족을 살해하는 이 이야기의 필연적인 장치이자 한계점이기도 합니다. 종교와 왕실이 사회의 가장 큰 권력이었던 당대에 왕의 권위를 빌려 농민들의 반란을 정당화하는 것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만 약자들의 봉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가 현대에도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에게로 눈길을 돌린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작품 세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이 작품들을 읽고 나면 스페인에 대해, ‘고전 문학’에 대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되실 거라 장담합니다. 필자에게는 이 작품들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만큼 엄청난 충격을 주었거든요. 밝게만 보이던 스페인의 정서와 제국이라는 거만한 역사 속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를 계기로 필자는 단순한 스페인 교환학생에서 스페인 문학 전공 대학원생으로 진로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는 이 계절엔 누구나 터닝포인트를 찾게 마련이죠. 그 가운데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는 눈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요? 우리의 시대 역시 스페인의 바로크 시대처럼 누구나 팍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더욱이 소외된 사람들이 주변에 있진 않은지, 한 번쯤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기 좋은 이 계절, 모두가 모쪼록 따뜻한 겨울을 보내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김경범(2003), “돈키호테의 죽음: 각성 혹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 스페인어문학, 제26호, 187-207.
- 김춘진(1990), “『라사리요 데 또르메스』의 형식요소와 인본주의 정신”, 인문논총, 제24집, 115-135.
- 김선욱(2018), “『푸엔테오베후나』: 전복성 뒤에 은폐된 억압성”, 세계문학비교학회, 제62호, 311-3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