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피드, 갓 구워낸 빵이나 달콤한 케이크 대신 쌉싸름한 찻물을 격불(격렬하게 솔질하여 거품을 내는 행위)하는 영상들이 알고리즘을 점령했습니다. 바야흐로 ‘말차 코어(Matcha Core)’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 현상을 단순히 ‘초록색이 주는 시각적 쾌감’이나 한철 지나가는 유행으로만 치부하기엔, 차(Tea)가 우리 삶에 침투하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빠르고 자극적인 ‘카페인 수혈’을 위해 커피를 마셔왔습니다. 그러나 말차 코어의 부상은 정반대의 욕망을 대변합니다. 찻잎을 계량하고, 적당한 온도의 물을 끓이고, 차선으로 거품을 내는 그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의지. 이것은 효율성만 강요받는 사회에서 나만의 속도를 되찾겠다는 조용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400년 전, 다성(茶聖) 센노 리큐(Sen no Rikyu)가 정립한 다도(茶道)의 정신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화려한 금잔 대신 투박한 찻사발에, 넓은 연회장 대신 두 평 남짓한 좁은 다실에서 차를 나누었던 리큐. 그에게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세속의 지위와 욕망을 내려놓고 ‘본연의 나’와 마주하는 수행이었습니다.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와 도파민에 절여진 현대인에게, 리큐의 정신을 빌려 오감을 곤두세우는 시간은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우는 확실한 해독제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갈증에 응답하듯,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도 ‘멈춤’을 위한 성소(聖所)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빌딩 숲의 소음 속에서 고요한 틈을 만들어내는 이 공간들은, 우리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단순히 차를 파는 것을 넘어 잃어버린 ‘시간의 감각’을 돌려주는 5곳의 공간을 소개합니다.
마포구 망원동,
티노마드 (Tea Nomad)

“아름다움은 물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 속에 있다.”
_다니자키 준이치로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너무 밝은 빛 아래서는 사물의 깊이가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망원동의 ‘티노마드’는 이 ‘그늘의 미학’을 공간으로 번역해낸 곳입니다. 나무의 온기로 채워진 실내, 얇은 발 사이로 걸러진 빛, 그리고 의도된 어둠. 이곳에 들어서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게 됩니다.
이곳의 암묵적인 약속인 ‘서로의 고요를 방해하지 않는 것’은 타인을 위한 배려이자, 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기 위한 장치가 되어줍니다. 중앙 테이블의 탕관(물 끓이는 주전자)에서 직접 뜨거운 물을 길어오는 불편함조차, 이곳에서는 정적을 깨지 않으려는 하나의 우아한 수행이 됩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쥐고 있노라면, 비로소 가려져 있던 마음의 윤곽을 마주하게 될 수 있을 거예요.
위치 : 서울 마포구 포은로 112 2층
추천 메뉴 : 차세트(말차, 호지차 등) / 말차 빙수
*차와 함께 화과자, 다구 플레이팅을 함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용산구 한남동,
산수화티하우스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_레너드 코헨(Leonard Cohen)
깨진 도자기를 버리는 대신, 그 틈을 옻과 금으로 메워 새로운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본의 공예 기법 ‘킨츠기’. 한남동의 ‘산수화 티하우스’는 차를 매개로 이러한 ‘회복의 태도’를 가르치는 인문학적 공간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차를 소비하는 곳이 아닙니다. 계절에 맞는 찻자리를 여는 차회(茶會)와 킨츠기 클래스를 통해, 우리는 사물에 깃든 세월을 존중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는 법을 배웁니다. 투박한 다기의 물성을 손끝으로 느끼며 차를 마시는 행위는, 어쩌면 일상에서 닳고 상처 입은 나의 마음을 금으로 이어 붙이는 치유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위치 :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20길 21-14
추천 메뉴 : 백서향, 자닮녹차
*기호에 맞춰 추천을 받아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성동구 성수동,
OMOT 오므오트

“같은 찻자리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뿐이다.”
_다도(茶道)의 정신, 일기일회
도심의 시간은 계절을 잊은 채 흐릅니다. 하지만 성수동 ‘오므오트’의 시간은 자연의 보폭에 맞춰 흐릅니다. 타인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호흡해보고 싶다면 차를 통해 계절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성수동의 ‘오므오트’로 향해보세요. 이곳의 ‘티 세레모니’는 매년, 매 계절마다 새로운 주제로 서사를 펼쳐냅니다.
‘일기일회(一期一会)’. 평생에 단 한 번뿐인 만남이라는 뜻처럼, 오므오트는 흘러가는 계절을 차와 다식으로 붙잡아 둡니다. 한국 차를 베이스로 한 5가지의 티 페어링 코스는 마치 기승전결이 있는 한 편의 소설과 같습니다. 빠르게 휘발되는 성수의 트렌드 속에서, 차 한 잔에 담긴 계절의 이야기를 천천히 음미하는 이들의 방식은 우리에게 ‘시간을 소유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이곳에서 계절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지금의 가치를 찾아보기를 추천합니다.
위치 : 서울 성동구 서울숲2길 12 지하1층
추천 메뉴 : 티세레모니(예약제 티코스)
강동구 고덕동,
카페제이 (Cafe J)

“밥 먹고 차 마시는 일, 그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다(일상다반사).”
_선(禪) 불교 격언
다도라고 하면 으레 엄숙하고 무거운 격식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카페제이’는 차가 가진 본래의 성격, 즉 ‘일상성’에 주목합니다. 교토와 서울을 오가며 운영되는 이곳은 예약이라는 높은 문턱을 없애고, 누구나 언제든 차를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렇다고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에요. 교토 현지의 질 좋은 말차를 사용하되,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썩 경쾌합니다. 톡 쏘는 탄산에 말차를 더한 ‘말차 소다’처럼 위트 있는 메뉴들은 낯선 다도의 세계를 가장 친숙한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 내죠. 특별한 날의 의식이 아닌, 매일의 위로가 필요할 때. 이곳은 차가 ‘일상다반사’가 되는 즐거움을 알려줍니다.
위치 : 서울 강동구 동남로82길 19
추천 메뉴 : 교토아이스맛차, 교토박스, 말차소다.
종로구 계동,
델픽 안국 플래그십 스토어

“전통은 불을 보존하는 것이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_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북촌의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창밖 풍경과 달리, ‘델픽’의 내부는 차가운 금속과 거친 돌이 지배하는 현대 미술관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공간적 파격은 델픽이 지향하는 ‘뉴 헤리티지(New Heritage)’를 대변합니다.
이곳은 차를 마시는 찻집을 넘어, 차 문화를 큐레이션 하는 플랫폼입니다. 복잡한 등급 대신 직관적인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는 블렌딩 티를 제안하고, 갤러리처럼 다구를 전시합니다. 박제된 전통이 아니라, 동시대의 라이프스타일과 호흡하는 감각적인 차 문화. 델픽은 차가 고리타분한 옛것이 아니라, 가장 세련된 취향의 영역임을 증명해 보입니다.
위치 : 서울 종로구 계동길 84-3 2층
추천 메뉴 : 드 미테라De Mitera(시그니처) / 밀리 필리Mili Fili(시그니처) / 케이티 디드 Katy Did
“Teaism is a cult founded on the adoration of the beautiful among the sordid facts of everyday existence.” (“다도(茶道)는 일상의 비루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의식이다.”)
_오카쿠라 카쿠조(Okakura Kakuzo), ‘차의 책(The Book of Tea)’
우리가 굳이 씁쓸하고 느린 찻물을 찾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달콤한 회피가 아니라, 냉정한 직면을 위해서에요. 앞서 둘러본 공간들이 보여주었듯, 차는 환한 조명 아래서 우리가 외면했던 내면의 그늘을 응시하게 하고, 마음의 갈라진 틈을 금으로 메우듯 어루만지게 합니다.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조차 삶의 무늬로 받아들이는 과정. 차가 수천 년간 우리 곁을 지킨 힘은 바로 이 지점, ‘나의 불완전한 일상조차 긍정하게 만드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오카쿠라 카쿠조가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기어이 아름다움을 찾아냈듯, 우리네 먼지 쌓인 일상에서도 빛나는 순간을 발견해 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쌉싸름한 찻물 끝에 번지는 은은한 단맛처럼, 여러분의 삶에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고요한 여유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