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이나 이미지 피드를 넘기다 보면, 가끔 멈추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분명 예전에 본 것 같은 이미지인데, 설명은 달라져 있고, 맥락은 어긋나 있으며, 이상하게도 낯섭니다. 익숙해야 할 장면 앞에서 우리는 종종 의심부터 꺼냅니다. ‘표절’이라는 단어입니다.
반복되는 이미지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빠르게 의혹을 결론으로 바꾸는 걸까요. 동시대 사회는 새로움을 성과처럼 요구하고, 오리지널리티를 창작의 최소 조건으로 삼아왔습니다. 그 결과 이미지를 다시 사용하는 행위는 종종 게으름이나 침해로 단정됩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에서 반복과 차용은 반드시 ‘모방’이라는 윤리적 판단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1970~8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한 전유미술(Appropriation Art) 혹은 차용미술의 흐름은,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는 행위 자체보다 이미지가 어떤 구조 안에서 의미를 획득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 글은 모방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이동시키려 합니다. 이것은 표절인가가 아니라, 이 이미지는 왜 지금 다시 호출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의미가 재배치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미지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권위·맥락·해석 방식을 다르게 작동시키는 방법론으로 다뤄온 작가들의 작업을 큐레이션합니다.
새로 만들지 않는 선택
동시대 미술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는 선택은 더 이상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선택은 이미지를 둘러싼 질서 전체를 다시 들여다보겠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이미지는 늘 생산되어 왔고, 이미 충분히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가 어떻게 의미를 얻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다시 묻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 지점에서 전유미술(appropriation art)과 차용미술은 ‘창작의 대안’이 아니라, 창작을 성립시키는 조건을 질문하는 방법으로 작동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새로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이미지를 어떤 위치와 맥락에 다시 놓았는지입니다. 이 글이 다루는 작업들은 모두 이러한 선택을 공유합니다. 이미지를 복사하는 대신, 이미지의 권위·목적·해석 주체를 다르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의미를 이동시킵니다.
저자의 삭제
— 셰리 레빈(Sherrie Levine)

셰리 레빈은 1980년대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개념미술 작가로,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거의 변형 없이 다시 제시하는 작업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는 사진, 회화, 조각 등 미술사 안에서 이미 ‘정전(canon)’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을 반복적으로 호출해 왔습니다.
‘After Walker Evans’ 연작에서 레빈은 사진가 워커 에번스가 대공황 시기에 촬영한 농민들의 초상을 다시 촬영합니다. 이 작업은 단순한 재현처럼 보이지만, 제목에서부터 명확한 방향을 드러냅니다. After라는 단어는 시간적 이후이자, 원본에 대한 거리 두기를 의미합니다.
레빈의 작업에서 이미지 자체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이 전면으로 떠오릅니다. 이 이미지의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사진을 만든 손인가, 아니면 그 손에 부여된 이름과 역사인가. 전유미술의 관점에서 레빈은 리포토그래피(rephotography)라는 방식을 통해 이미지의 저작권과 저자(author) 개념을 비워냅니다. 이 작업을 볼 때 중요한 것은 사진의 ‘내용’이 아니라, 사진 아래 붙은 이름과 맥락입니다. 관객은 레빈의 사진을 보면서 동시에 워커 에번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이미지의 의미는 사진 자체가 아니라 ‘누가 찍었는가’라는 조건 위에서 형성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레빈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이미지의 가치를 떠받치던 권위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맥락의 이동
—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리처드 프린스는 광고와 대중문화 이미지를 미술의 영역으로 옮겨온 작가로, 차용미술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신문, 잡지, 광고 등 이미 대량으로 유통되던 이미지를 다시 촬영해 작품으로 제시합니다.‘Cowboys’ 시리즈에서 프린스는 말보로 담배 광고 속 카우보이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이 카우보이는 미국적 남성성, 자유, 개척 정신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오랫동안 소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미술관 벽에 걸리는 순간, 기능은 달라집니다. 상품을 설득하던 이미지는 목적을 잃고, 대신 이미지가 어떻게 욕망을 조직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프린스의 차용은 이미지의 외형을 훔치는 일이 아니라, 이미지가 놓인 맥락을 이동시키는 전략입니다.
관객은 이 이미지를 볼 때 더 이상 ‘담배를 사고 싶은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은 이렇게 바뀝니다. 왜 우리는 이 이미지를 자유롭다고 느껴왔을까. 프린스는 광고가 숨겨왔던 욕망의 구조를, 미술관이라는 장소 변화만으로 노출합니다. 의미는 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지가 작동하던 목적이 제거되면서, 그 구조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언어의 개입
—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바바라 크루거는 그래픽 디자인과 사진, 텍스트를 결합한 작업으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대중 매체에서 가져온 익숙한 이미지 위에 짧고 단호한 문장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에서 크루거는 여성의 얼굴을 좌우로 분할하고, 그 위에 문장을 얹습니다. 처음 이미지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광고나 잡지에서 보아온 시각적 문법을 떠올리지만, 곧 그 시선이 멈추게 됩니다. 이 이미지는 감상하거나 해석하라고 놓인 대상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해 배치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떤 위치에서 보게 되는가입니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라는 문장은 이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관객을 직접 호명하며,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관객은 중립적인 관찰자의 자리에서 밀려납니다. 이미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관객은, 어느새 이미지가 설정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 작업은 이미지를 감상하는 경험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특정한 입장에 놓이는 경험을 만듭니다.
이 지점에서 크루거의 차용은 시각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적 개입으로 작동합니다. 그는 이미지를 바꾸지 않습니다. 대신 텍스트를 통해 이미지를 해석하는 주체를 바꿉니다. 관객은 더 이상 이미지를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가 요구하는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크루거에게 차용이란 이미지를 다시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이미지를 둘러싼 권력 관계와 시선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방식입니다. 이미지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만드는 것—그것이 그의 작업이 작동하는 핵심입니다.
동일한 반복
— 엘레인 스터티번트(Elaine Sturtevant)

엘레인 스터티번트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거의 동일하게 반복 제작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등의 작품을 ‘비슷하게’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똑같이’ 재현합니다.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차이가 없을 때, 우리는 작품 내부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작품을 둘러싼 조건—저작, 서명, 제도—를 보게 됩니다.
관객은 이 작품 앞에서 계속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워홀인가, 스터티번트인가. 그러나 그 질문은 곧 무의미해집니다. 스터티번트는 동일한 반복을 통해, 창작의 기준이 작품 내부가 아니라 제도와 이름에 의해 성립해왔음을 드러냅니다. 반복은 차이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창작의 조건을 가장 급진적으로 노출합니다.
판단 대신 질문으로
이 작업들은 모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미지를 전유하고 차용합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왜 이 이미지는 지금 다시 등장했는가. 그리고 이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다시 배치되었는가.
전유미술과 차용미술은 모방을 윤리적 판단의 대상에서 이미지를 읽는 인식 구조의 문제로 이동시킵니다. 새로움은 반드시 새로운 이미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익숙한 이미지를 낯설게 만드는 시선에서 비롯됩니다.
이 글이 제안하고 싶은 것은 결론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이미지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이 이미지를 어떻게 읽어왔는지를 돌아보는 일. 그 질문이 모방 이후의 창작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출발점일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