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나 헤드바 :
우리는 모두 아픈 여자가 된다

자본주의 속도전에 맞서는
아픈 여자의 생존법

누워 있으면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은 정말 무능한 존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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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움직이지 않는 신체를 ‘실패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움직임과 성과를 통해 생산성을 증명하는 신체만을 가치있는 자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아프고 나이 든 이들의 신체는 ‘돌봄을 받아야만 하는’ 수동적인 상태로 규정되며, 그들의 의존성은 종종 무능함이나 나태함이라는 낙인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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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취약계층’이나 ‘소수자’라는 이름표 아래로 분류될 뿐, 치열한 생존 투쟁의 장에서는 대개 소외되기 일쑤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주체라면 모름지기 역동적으로 거리로 나가 깃발을 흔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우리 무의식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워 있다’는 말과 ‘세계를 바꾼다’는 말 사이에 결코 좁혀지지 않을 척력이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해 보이는 조합을 삶으로 증명하며, 그 척력을 연대의 동력으로 바꿔낸 인물이 있습니다.

서서히 치닫는, 그러나 저항하며 돌보는 ― 요하나 헤드바 아티스트 토크, 이미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이행진

바로 작가이자 예술가, 요하나 헤드바(Johanna Hedva)입니다.

헤드바를 어떻게 소개해야 그녀에게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녀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명확하지 않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느 쪽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이방인인 그녀는, 화가이자 작가이며 동시에 점성술사이기도 합니다.  소설, 회화, 조각, AI, 비디오 게임을 넘나드는 그녀의 작업물은 단 하나의 카테고리로 구획될 수 없습니다. 그녀의 정체성을 하나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그녀가 가진 다층적인 스펙트럼을 훼손하는 서툰 재단 행위가 될지도 모릅니다.

Johanna Hedva-God Is an Asphyxiating Black Sauce, 이미지 출처 : zineseminar
≪모든 두려움은 매혹적이다≫, 이미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침대 위에서 던진 질문 :
“어떻게 벽돌을 던질 것인가?”

헤드바는 정치를 ‘공공의 장소에서 행해지는 가시적 행동’으로 정의하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고전적 이론에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합니다. 

흔히 저항이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행진하는 역동적인 활동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들을 정치적 주체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거리에 서있을 수 없는 자는 정치적 목소리조차 가질 수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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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헤드바는 역사에 남을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은행 창문에 벽돌을 던질 수 있는가?”

_요하나 헤드바, 『아픈 여자 이론 』

만약 깃발을 들고 거리를 나가는 활력만이 정치적 존재의 증거라면, 침대 밖을 나설 수 없는 이들은 무력한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요? 그들은 시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로 인해 ‘정치적 주체’가 될 자격조차 박탈 당하는 현실과 먼저 투쟁해야만 합니다. 헤드바는 여기서 정치의 장소를 거리에서 침대로, 외침에서 신음으로 옮겨 옵니다. 그녀에게 정치란 더 이상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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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질문은 이어집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일하며 생산성을 증명해야만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숨을 쉬며 버티는 것 – 그것은 그 자체로 체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정치적 행위가 아닐까요? 누구의 신체가 보호받고 있으며 누구의 신체가 방치되고 있는가를 묻는 이 생존의 현장이 바로 정치의 최전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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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굴러가야 하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되기를 거부하고 침대 위에서 오직 자신의 생명을 지켜내며 버티는 신체 그 자체를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로 규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픈 여자 이론(Sick Woman Theory)’의 시작입니다. 


『아픈 여자 이론 번역본』 읽으러 가기


‘아픈 여자’,
자본의 오만을 폭로하는 이름

헤드바의 세계에서, ‘아픈 여자(Sick Woman)’는 특정 성별이나 질병의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 개념을 통해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거대한 배제의 목록을 호명합니다.

“아픈 여자는 특권적 존재, 혹은 특권적 존재가 되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부인하는 자라면 누구든 속할 수 있는 정체성이자 신체이다.”

_요하나 헤드바, 『아픈 여자 이론 』

헤드바가 말하는 ‘특권적 존재’란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산층 등 사회 전반에서 그 중요성이 명확하게 인지되고 그들을 위한 보살핌이 타인의 희생 위에 견고하게 유지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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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헤드바가 ‘여자’라는 명칭을 채택한 이유는 명쾌합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이라는 단어가 대변해온 보호 받지 못한 자,  부차적인 사람, 억압 받는 존재들의 위치를 빌려와 우리 모두가 처한 취약성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특권적 존재가 되리라는 환상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아픈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헤드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건강’ 담론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녀에게 ‘건강’이란 자본주의 규격에 맞춘 노동 생산성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합니다. 사회 시스템은 이러한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 이면에 깔린 수많은 돌봄 노동의 가치들을 의도적으로 지워 버립니다.

돌봄’을 비생산적인 ‘허드렛일’이나 ‘당연한 희생’으로 치부해야만 그 무급 노동을 디딤돌 삼아 쌓아 올린 자본의 이윤을 아무런 부채감 없는 ‘정당한 성공’으로 포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드바는 이러한 체제를 ‘비장애중심주의 (ableism)’라 정의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은폐해 온 이 거대한 모순의 벽을 향해, 침대 위에서 벼려낸 ‘비판’이라는 벽돌을 맹렬히 던집니다.


자립이라는 환상,
의존이라는 정직한 선언

우리는 흔히 제 힘으로 서 있는 상태를 ‘자립’이라 부르며 찬양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진정한 의미의 독립된 자아란 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홀로 서 있다고 믿는 그 순간조차, 사실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타인의 노동과 사회 시스템에 철저히 기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즉, 홀로 설 수 있다는 믿음은 단지 나에게 제공되는 의존의 토대들이 너무나 당연하여 감각되지 않을 뿐인 ‘가려진 환상’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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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바는 이러한 자립의 신화가 노동력을 상실한 존재를 낙오자로 규정함으로써 유지된다고 지적합니다.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성을 증명해야 하는 굴레는 사회 체제의 무한 성장을 돕지만, 동시에 인간을 강렬히 고립시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쳐오며 이 견고한 믿음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비생산적’이라 치부했던 돌봄 노동자들이 사실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최전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결코 개인의 실패가 아니며 , 무능의 증거도 아닙니다. 

헤드바에게 의존은 오히려 하나의 정치적 거부권입니다. 그것은 비장애인의 신체만을 표준으로 삼고 생산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치부해온 세상의 오만함을 폭로하는 저항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취약함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도덕적 합의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God Is an Asphyxiating Black Sauce≫ (Photo by. Juan Saez)

실천으로서의 의존 :
‘성공의 시달림’으로부터의 회복

헤드바의 정치는 이론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녀는 기관과 협업할 때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거나 극복해야 할 도전 과제로 두지 않습니다. 대신  ‘장애 접근성 조항(Disability Access Rider)’을 당당히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둡니다. 유연한 일정과 원격 참여 같은 요구는 단순히 개인적 편의를 구하는 양해가 아닙니다. 이는 장애를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하며 배제해왔던 사회적 관습에 제동을 거는 적극적인 개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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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 조항을 통해 비장애 중심적 체계 안에서 무비판적으로 굴러가던 사회적 관성을 멈춰 세우고, 우리가 서로 어떤 위치에 놓여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도적인 일깨움을 선사합니다. 

To Those Mad, Sick, Crip Selves, reading and conversation with Lara Mimosa Montes, 이미지 출처 : 요하나 헤드바

헤드바는 이를 ‘성공의 시달림부터의 회복’이라 명명합니다.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독립적 자아의 강박에서 벗어날 때 , 그 빈자리에 비로소 ‘기대어 있음’이라는 정직한 상태가 들어섭니다. 사실 진정한 독립이란 단 한 사람의 도움도 받지 않는 고독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견고한 기둥을 마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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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기대어 있음’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역동적인 연대의 시작점이 됩니다. 내가 나의 취약성을 솔직하게 내보일 때 비로소 상대도 타인의 취약성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심리적 안전 지대가 형성되며,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지는 수평적인 연결이 가능해집니다.

내가 당신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개인의 결함이 아닌 인간 공통 조건임을 인정하는 순간 ,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이 시스템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라는 공동의 질문이 비로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우아한 저항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누워 있으면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

요하나 헤드바의 삶과 작업은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세계의 변혁은 비단 곧게 서있는 존재들의 신체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립’이라는 뿌리 깊은 허상을 깨고, 기꺼이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누워 있는 몸’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는 가장 인문학적인 혁명이 될 수 있습니다. 

현 시대의 기본적 존재 방식인 ‘직립’은 그저 수많은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 결코 정상성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의존’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목소리와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기꺼이 서로의 삶에 개입하겠다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그늘에 가려진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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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바는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서로를 돌보느라 세상이 말하는 혁명에 늦었다 하여도, 그 돌봄 자체가 이미 가장 급진적인 행위​라는 것을요. 누군가의 곁을 지키느라 지체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효율성에 가려졌던 인간의 존엄이 고요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진실을 발견합니다. 이 지독한 상호의존이야말로 우리가 자본주의의 속도전에 맞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도 단단한 저항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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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질문은 우리에게 향합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무게를 감당할, 그리고 누군가에게 당신의 무게를 기꺼이 건넬 준비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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