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껏 모성을 지나치게 신화화해 왔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사랑이 생의 모든 것을 책임져줄 수 있는 것처럼 그것에 의존하곤 했죠. 하지만 모성이란 사실 그렇게 완벽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것이라는 걸 이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꿔온 모성이 정말로 가능하던가요? 그것이 정말로 ‘어머니’여야만 했던가요? 그렇다면 모성은 또 무엇에 의존하여 우리에게 그 많은 것들을 내어줄 수 있던가요?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한 듯한 스페인과 중남미의 영화 세 편을 소개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족주의적인 문화를 지닌 곳들인 만큼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 영화는 모성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대신 우리 사회가 어머니에게 흔히 기대하곤 하는 것들을 ‘어머니를 대신하여 하는 이들’을 통해 넌지시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세컨드 마더’, ‘로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적 모성이 아닌 그저 돌봄,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스페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작품 <내 어머니의 모든 것 Todo sobre mi madre>은 ‘어머니’로 치환되어 온 다양한 돌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주인공 마누엘라는 아들 에스테반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에스테반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바르셀로나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한때 자신의 남편이었던 에스테반/롤라가 임신시킨 또 다른 여성 로사를 알게 됩니다. 한편 원가족과의 사이가 소원한 로사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마누엘라와 함께 살 것을 제안합니다.

언뜻 보기에 마누엘라는 계속해서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마누엘라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머니를 통한 일방적 돌봄, 깊은 애정, 유대감이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로사에 대한 마누엘라의 감정은 같은 이를 사랑한 데서 오는 동질감과 아픈 몸으로도 원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데 대한 연민이 공존합니다. 로사는 그런 마누엘라를 위해 아이의 이름을 ‘에스테반’으로 지으며 돌봄의 관계를 통해 연결된 자매애를 보여줍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로사의 어머니 역시 모성애가 반드시 자연적인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는 분명히 딸을 무척 아끼고 걱정함에도 로사가 태어났을 때부터 거리감을 느껴 왔음을 토로합니다. 그렇기에 출산까지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하는 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마누엘라에게 맡겨 둡니다. 로사가 아이를 낳고 사망한 뒤에는 마누엘라에게 자신의 손자를 맡긴 뒤 천천히 아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습니다.
영화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아들 ‘에스테반’을 잃은 뒤 로사가 낳은 아이인 ‘에스테반’의 어머니가 되는 마누엘라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영화를 평면적으로 독해한다면 마누엘라의 모성만이 돋보일지 모르지만, 마누엘라를 둘러싼 다양한 퀴어 인물들을 돌아본다면 이 영화가 얼마나 이성애 부모와 아이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누엘라는 단순히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왔던 모성을 넘어 애정에 기반한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 감으로써 자신의 두 번째 아이를 지켜냅니다.
모성이거나 노동력이거나,
<세컨드 마더>
브라질의 여성 감독 안나 무이라에르트(Anna Muylaert)의 작품 <세컨드 마더 Que horas ela volta?>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모성의 측면을 다룹니다. 이 영화는 계급의 질서 속에서 타인에게 미루어진 모성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인공 발은 상파울루의 부유한 가정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입니다. 그에게 고용주의 아들 파빙요는 친자식과도 같은 존재이며, 파빙요에게도 발은 ‘두 번째 엄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발은 정작 고향에 두고 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딸이 있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 딸 제시카가 대학 입학을 위해 수도인 상파울루로 건너오며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브라질의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수직적 계급의 문제를 직시하며 그 가운데 생물학적 자녀에게도, 애정을 담아 돌본 마음의 자녀에게도 언제나 ‘두 번째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발의 처지를 지적합니다. 이러한 발의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애정에 기반한 깊은 연결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돌봄을 제공해 줄 노동력인가요? 누군가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해 준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나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발과 제시카 사이의 몰이해, 그리고 파빙요 가족과 발 모녀 사이의 계급 갈등으로만 비춰지던 영화는 후반부에 하나의 반전을 던져줍니다. 사실은 제시카 역시 엄마가 되었으며, 고향에 두고 온 아이와 함께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데요. 영화는 세 식구가 함께할 날을 꿈꾸는 발과 제시카 모녀의 모습을 희망적으로 그리며 끝을 냅니다. 하지만 관객에게는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제시카가 공부를 마치고 일을 하는 동안, 발은 또다시 제시카의 아이를 돌보는 할머니이자 ‘두 번째 엄마’가 되는 것일까요?
계급의 구조와 모성이라는 소재를 엮어낸 이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어머니에게 기대해 온 역할이 계급에 따라 타인의 노동력으로 대체되어 왔다는 사실과 함께, 그 대가로 돌봄의 영역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과연 영화의 결말처럼 우리 곁에 ‘엄마’가 남는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요. 발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받는 현실 속에서 돌봄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의존의 방향은 어디인가,
<로마>
멕시코의 거장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의 작품 <로마 Roma>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라는 이름은 멕시코시티의 부유한 지역 ‘로마’를 가리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1970년대 초반, 멕시코시티의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원주민 여성인 클레오입니다. 클레오는 매일 집 안을 청소하고, 고용주인 소피아의 네 아이들을 돌보고, 가족들의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조용히 흘러가는 것만 같던 클레오의 삶은 한 남자 페르민을 만나 임신을 하며 달라지게 됩니다.

하녀의 위치에 있는 클레오는 <세컨드 마더>의 발과도 닮아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서로 의지하는 클레오와 소피아의 모습이 조금 더 부각됩니다. 클레오가 자신의 임신과 함께 페르민이 떠났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 소피아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별거를 시작합니다. 클레오는 임신한 몸으로도 소피아와 그의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고, 소피아와 그의 어머니 테레사는 아이를 낳을 클레오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클레오의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나고 맙니다. 소피아는 상심해 있는 클레오에게 가족끼리 떠나는 해변으로의 휴가에 함께할 것을 제안합니다. 해변에서의 어느 오후, 소피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세 아이 소피, 파코, 페페가 해변에서 놀던 중 파도에 휩쓸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클레오는 수영을 하지 못함에도 바다에 뛰어들어 세 아이를 모두 구해냅니다. 뒤늦게 달려온 소피아에게 클레오는 갑작스레 자신은 사실 아이를 원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데요. 양수 속에서 죽은 아기와 클레오가 바닷물에서 구해낸 아이들의 모습이 대비되며 죽은 아기에 대한 클레오의 죄책감, 소피아와 그의 아이들에 대한 클레오의 애정, 그리고 그런 클레오에게 마음 깊이 의지하고 있는 소피아의 애정이 진하게 전해집니다.
<로마>는 이러한 방식으로 두 계급 사이의 묘한 상호 의존 관계를 드러냅니다. 클레오는 단지 어머니로서 아이를 혹은 아이에 대한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피아의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와 견줄 수 있을 사랑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클레오와 소피아는 자신을 배신한 남성들이 주지 못한 애정과 연대감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여기에서 의존의 방향은 일방향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모성의 역할이 아닌 서로가 의지할 수 있는 돌봄의 공동체일지도 모릅니다.
세 편의 영화는 어머니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대체된 모성에 대해 그립니다. 영화 속에서 여성 인물들은 모성에게 요구되어 온 돌봄의 자리를 묵묵히 지킵니다. 자신이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더라도요. 하지만 이렇게 어머니를 대신할 다른 존재를 찾는 것이 정말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모성이 완전한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쏠림없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돌봄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어떤 행위와 제도가 필요할까요?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계시다면, 위의 영화들을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