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의
그림자

영화 속 재현된
'가족신화' 해체하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 말, 바로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입니다. 간결하게 쓰여진 이 문장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확실한 건 속속들이 알기 어려운 이웃의 가정사를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이 없다는 겁니다.

가정은 생활 공동체로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집단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을 중심으로 하던 가정의 형태는 유연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한 지붕 아래에서 가족(家族)은 여전히 서로에게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절대적인 것으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잘못된 신념과 기대를 의미하는 심리이론을 가족신화(family myth)a)라고 하는데요. 흔히 “가족인데 그럴 수 있지.” 하는 통념들이 바로 가족신화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집단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필연적으로 역할을 부여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이라는 집단 안에서도 각자에게 역할이 주어지고,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요구되는데요. 물론 여느 집단처럼 가정 또한 역할 수행이 잘 이루어져야 목표하는 형태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지점은 이러한 믿음이 가족신화로 이어지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라는 역할과 사라진 ‘나’
<어디갔어, 버나뎃>

이미지 출처 :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컷, 왓챠

시애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세 가족의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회사 대표인 남편 엘진의 아내이자 하나뿐인 딸 비의 어머니 버나뎃은 사회성 없기로 소문난 문제적 이웃입니다. 수면 장애를 비롯해 여러 불안 증상을 앓고 있는 그녀는 특유의 괴짜스러움으로 주변과의 불화가 끝이 없는데요. 그런 그녀에게 비가 남극 여행을 제안하면서 버나뎃의 신경증은 커다란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혼자 남극으로 떠난 그녀를 보며 관객들은 비로소 진짜 버나뎃과 마주하게 됩니다. 트라우마로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건축계에서 주목 받는 천재였던 버나뎃은 이 일이 아니어도 된다고 자신을 설득하며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에 몰두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를 괴롭혀온 건 그렇게 지워지고 있던 ‘나’에 대한 공허함이라는 걸 알게 되죠.

이미지 출처 :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컷, 티빙

버나뎃은 힘든 순간 가족신화에 기대는 것을 선택한 인물입니다. 아마도 다른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가족 하나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일 겁니다. 그렇기에 남편 엘진 또한 그런 그녀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버나뎃의 문제적 일상을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제목처럼 사라진 아내 또는 어머니를 찾는 가족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이름 아래 사라진 자기 자신을 찾는 버나뎃의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나’로 존재함에 버거움을 느낄 때 기꺼이 안락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가정의 몫일 겁니다. 하지만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버틸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또한 가족의 역할이라는 것을 가족신화가 부여한 가정의 특별한 지위 아래 간과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모성 신화와의 불화
<케빈에 대하여>

이미지 출처 :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IMDb

버나뎃이 자기 자신보다 가정에서의 역할을 우선하게 된 데에는 딸 비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식의 존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머니’들은 모성이라는 신화 아래 응당 그래야만 했죠.

임신과 출산을 통해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한 모성애에 대한 환상은 가족신화를 유지해 온 커다란 축입니다. 하지만 신화란 표상이 반영되었을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어머니가 된다는 것 역시 본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양육에 대한 학습을 통해 얻어집니다b).

우리가 배우고 익혀온 많은 것들처럼 모성 역시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모성과 불화하는 어머니 에바가 등장하는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 학습의 또 다른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두고 케빈과 에바의 유대관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사람이 형성해 간 파괴적 관계에 앞서 토대가 된 가정의 역학관계에 주목하려 합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IMDb

여행가로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에바에게 무조건적인 돌봄이 필요한 아들 케빈은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내 아이의 존재, 즉 모성애의 부재에 에바는 혼란과 버거움을 느끼는데요. 어머니가 된 에바에게 이러한 의무와 책임이 자연스레 뒤따른 것과 달리 영화 안팎에서 남편 프랭클린의 존재감은 희미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가정의 현실보다 신화에 기대는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프랭클린에게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건 당연하고 자라는 아이의 허물을 자애롭게 품고, 때로는 단호하게 훈육하는 것 역시 어머니의 몫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기대되는 관계 속에서 에바는 양육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며 고립되어 왔습니다.

물론 이 영화를 두고 케빈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찾는 건 무용한 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말 그대로 케빈에 대해 더 이야기 하는 것1)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케빈의 성향이나 에바와의 관계가 아닌 가정의 형태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케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에바에게 “모성애가 부족한 탓”이라 비난하고 넘긴 결과를 우리는 이미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1.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 사랑
<기억의 집>, <간호중>

이미지 출처 : 영화 ‘기억의 집’, 서울독립영화제

앞서 버나뎃이 수행하고 에바에게 강요된 어머니의 역할은 지극히 기능적입니다. 가족 구성원을 잘 돌보는 것은 이상적인 가정의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부모와 자식 간의 특별한 지위는 이러한 일방 의존적 돌봄 속에서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생애주기 안에서 가족 구성원은 모두 필연적으로 보호자와 피보호자를 모두 수행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기억의 집〉은 이러한 돌봄의 굴레를 담은 단편영화입니다. 영화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딸이 보는 환시를 통해 전개되는데요. 치매 환자인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며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 온 딸의 지난 일상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공포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특히 두 사람이 머무는 집 안은 사물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데, 이러한 공간 연출은 그 자체로 그늘에 가려진 가정 내 돌봄을 연상케 합니다.

오직 내 가족만이 있는 공간에서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가족의 삶, 과연 사랑 하나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가족을 살해한 후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의 주요 범행 동기가 ‘생활고’와 ‘돌봄’ 문제로 분석될 만큼c) 가정 내 돌봄은 시급히 다뤄져야 할 의제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안타까운 가정사라는 인식에 머무는 듯합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간호중’, 씨네21

한국판 오리지널 SF 앤솔로지로 제작된 SF8의 〈간호중〉은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돌봄 노동의 책임과 무게를 잘 포착하고 있는데요. 간병 로봇이 대중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10년째 식물인간인 어머니와 기약 없는 돌봄에 지친 딸 정인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사실 여기서 실질적인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건 ‘간호중’ 입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어머니를 위해 병원을 찾는 정인을 뒤따르다 보면, 벗어날 수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는 병동 속에서 그녀를 짓누르는 기약 없는 돌봄의 아득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겁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기에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의무와 책임으로 돌아오지만, 그러므로 정인을 위해서 어머니가 사라져야 한다는 ‘간호중’의 판단이 완전히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간병 로봇과 함께 남편을 돌보던 또 다른 보호자 정길을 보며 우리는 가족 간의 사랑은 감정일 뿐 절대적인 무언가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데요. 비록 정인이 바라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녀를 위해 행동한 ‘간호중’의 존재처럼 가족신화 아래 돌봄의 무게에 짓눌리는 이들에게는 가정 밖에서 그들의 현실을 지탱해줄 무언가가 절실해 보입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결혼 이야기’, 스틸컷, IMDb

흔히 가족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 아래 우리는 가족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소중하니까 희생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감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오히려 서로에게 의존할 수 없는 기형적인 관계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우리가 의지해온 건 가족이 아니라 가족신화가 만든 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가족은 특별해야 한다는 믿음은 ‘타자’를 구분 짓는 경계가 되기도 합니다. 가족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가족이니까, 라는 섣부른 믿음이 만드는 그림자 아래 ‘나’와 연결된 ‘너’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은 건강한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익숙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으로, 사회로 확장되는 공동체는 더 넓은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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