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애인과 밥값 얘기를 하다 잠시 서먹해졌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이 오갈 일이 잦아지고, 주머니 사정은 무한하지 않으니 종종 민망하게 사정을 따지게 됩니다.
사랑하니까 그런 건 따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처음에는요. 그렇게 잘 지내다가 문득 “내가 너무 많이 내는 것 아닌가?” 싶을 때, 미묘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납니다. 학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돈을 대어주었으니 이렇게 행동해 주면 좋겠다”고 밀어붙이고, 자식은 인생 알아서 하겠다고 맞서죠. 그러다가 지원을 끊겠다는 말이 나오면 관계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의 돈 이야기는 늘 곤란합니다.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길모어걸스(Gilmore Girls)>는 이런 불편한 감정을 파고듭니다. 부유한 조부모 에밀리와 리처드, 그들의 삶의 방식에 질려 어릴 적 가출한 로렐라이, 그리고 로렐라이의 딸 로리까지. 길모어 집안의 3대는 로리의 학비 문제를 계기로 다시 엮입니다.
돈을 받았으니
원하는대로 행동해야 할까?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던 로리는 조부모에게 학비를 지원받습니다. 덕분에 좋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로리는 그 후로 조부모의 말을 거스를 때마다 은은한 부채감을 느낍니다. 에밀리의 요구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사교 파티에 참석하라거나, 상류층 친구들만 불러 로리의 생일파티를 하자는 거였어요.

나를 위한 행동을 거부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로리는 그 파티들을 딱히 원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조부모의 부탁이기 때문에 들어준 것인지, 후원자의 요구였기에 따를 수밖에 없던 건지 로리도 혼란스럽습니다. 경제적 지원과 기대, 부채감이 뒤섞인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진정으로 나의 의지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로렐라이는 더욱 무력해집니다.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갑자기 목돈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로렐라이는 딸을 좋은 학교에 보냈다는 안도감과 졸업까지는 이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압박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통제는 반항으로 이어진다

드라마를 보면 ‘주주총회의 결과를 봐야 한다’,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회사가 충분한 계산으로 괜찮은 결정을 했더라도 주주들이 반대한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기 어렵습니다. 돈을 전부 회수해버리면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니까요.
부모와 자식 관계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다만 부모와 자식 간에는 감정이 끼어드니 상황이 더 복잡한 것도 같습니다. 조부모는 점차 로리가 만나는 사람까지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자신이 동등한 관계로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해 온 로리는 깊은 배신감을 느낍니다. 돈을 갚을 때까지는 그들이 정해둔 삶의 경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에밀리의 강압적인 태도는 악의가 아니었습니다. 손녀를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는 쪽으로 끌어당기는 사랑의 방식이었죠. 하지만 그의 서툰 접근은 역설적으로 로리가 조부모로부터 경제적・정서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계기가 됩니다.
경제적 독립이
단절이 되지 않으려면

로리의 아빠 크리스토퍼가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으며 상황은 전복됩니다. 크리스토퍼는 그동안 버팀목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며 학비를 조건 없이 지원해 주겠다고 나섭니다.
에밀리와 리처드는 이제 로리와 로렐라이에게 연락할 핑계를 잃었습니다. 학비 지원의 대가로 계약했던 3대의 금요일 저녁식사는 해체되고, 공허함이 남았습니다. 로렐라이는 ‘채무 관계는 사라졌지만, 금요일 저녁식사는 참여하겠다’고 말했지만, 에밀리는 돈이 아니면 그들을 붙잡아둘 수 없다고 생각해 “앞으로 올 필요도 없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합니다.
돈 문제가 해소되자 관계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소통했는지, 억지로 요구한 쪽과 자존심을 굽히던 쪽도 드러나죠. 어쩌면 채무 관계가 남아 있었더라도 성숙하게 교류했다면 단절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학비를 핑계로 시작된 교류가 오히려 탄탄한 소통의 기반이 되어 평생을 나누는 관계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돈 문제와 감정 문제는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쪽이 상대를 동등한 생활 수준으로 끌어올려 주며 통제와 기회 중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받는 쪽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하고요.
길모어 집안의 3대는 여전히 삐걱거리며 관계를 조율합니다. 돈은 관계의 위계를 드러내지만, 그 위계에 종속될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채무 관계가 모두 사라진 후에 어떤 관계로 남고 싶은지, 이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의 결정을 존중할 수 있나요? 지금 돈 문제가 아니어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