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한
고통을 겪을 때

그럼에도 읽고 쓸
용기를 주는 책 3선

몇 해 전,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그저 생각나는 대로 부정적인 감정을 휘갈겼습니다. 메모장은 ‘감정 쓰레기통’과도 같았습니다. 가끔씩 그 메모들을 공개된 공간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답장해주길 바랬지만, 가까운 지인조차 쉽사리 반응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정제된 글이라기보다는 활자화한 절규에 가까웠으니까요.

The word war spelled out of pills on a blue background
Photo by Gizem Nikomedi / Unsplash

사회학자 엄기호는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에 함몰되는 대신 고통의 곁에 서는 방법으로 ‘글’을 제안합니다. 곁에 선다는 건 마치 타인과 같은 위치에서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알아가는 건데요. 우리가 고통 그 자체를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고통으로 인해 경험한 고군분투와 다양한 감정을 글로 환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에 관한 글을 읽고 쓸 때 우리는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요? 당사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신음이 아닌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 가진 힘은 무엇일까요? 나의 고통에 관해 글을 써보기 앞서 누구의 이야기를 참조하면 좋을까요? 이번 아티클에서 소개하는 세 권의 책이 그러한 질문들에 조금이나마 대답이 되길 바랍니다.


나와 타인을 위한 회고록

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이미지 출처 : 창비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길 잃기 안내서』, 『걷기의 인문학』과 같은 책을 집필한 세계적 비평가 리베카 솔닛. 그는 어떻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고, 세상에 내보였을까요?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은 여성이 침묵하기를 바라는 사회에서 솔닛이 젊은 시절부터 경험한 폭력과 글쓰기란 어떤 것이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회고록이자 동시대 여성들을 향한 편지와도 같습니다.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모든 여성이 겪는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 대한 글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 책의 영문 제목은 『Recollections of My Nonexistence』입니다. ‘비존재(Nonexistence)’는 여성들이 독자성을 지우고 관습에 순응하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인데요. 그런 비존재에 대한 회고는 어둡고 냉철하지만, 동시에 희망과 자유에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솔닛은 이 책이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이라고 말합니다.

기나긴 삶을 회고한다는 건 왠지 두렵고 까마득한 작업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나를 넘어뜨린 돌들로 성을 지었다는 솔닛의 말은 성별을 불문하고 이 시대의 많은 독자에게 쓰는 사람이 되어볼 용기를 줍니다. 침묵을 깸으로써 생기를 되찾고 삶을 꾸려간 그의 여정이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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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서늘한 문학의 힘

진은영,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이미지 출처 : 마음산책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필요한 건 다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엄기호는 “불가해한 자기의 고통을 이해하고 말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열린 것은 ‘입’이 아니라 ‘귀’였다”(267page)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을 우리의 것과 비교하며 우리 자신의 고유함을 찾아갈 수 있는 건데요. 그런 과정이 잘 드러난 책이 바로 진은영의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입니다. 이 책은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존 버거 등 여러 작가들의 삶과 글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도출한 의미와 경험을 시인만의 시선으로 풀어갑니다.

진은영은 작가들이 삶의 고통을 자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글을 썼다는 점에 주목하는데요. 그들의 작품을 자신과 오늘날의 사회로 연결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 역시 세계와 맞지 않지만 시를 쓰는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이 책에 인용된 안나 아흐마토바의 말과 진은영이 덧붙인 해석은 많은 작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겠지요.

고통을 겪은 자라면 단지 낙관을 강변하는 책만을 읽고 싶지 않을 겁니다. 독자는 거짓 환상보다는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삶을,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빛나는 한 개인의 고유함을 기다립니다. 시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와 같은 진은영의 시집을 한번쯤 접하거나 들어보셨을 텐데요. 다양한 작품을 둘러보며 시인의 색이 밴 산문을 읽고, 시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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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와 자기 고백

가와타 후미코, 『할머니의 노래

이미지 출처 : 바다출판사

『할머니의 노래』는 일본의 저널리스트 가와타 후미코가 재일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르포르타주입니다. 후미코는 202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취재하고 일본 정부에 전쟁 관련 책임을 묻는 활동을 지속했는데요. 개정 전 이 책의 제목은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였습니다. 이는 재일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가 남긴 말입니다. 1993년 송 할머니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소송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쿄지방법원에 이어 2000년 도쿄고등법원은 이를 기각했는데요. 실망스런 결과에도 송 할머니는 당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고 합니다.

이후 2003년, 송 할머니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도 기각 판결을 마주했지만,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할머니의 노래』에는 이와 같이 폭력의 역사 한가운데를 살아간 재일 여성들의 고통과 의지 모두를 그리고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뿐만 아니라 히로시마 피폭, 한센병,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거친 파란만장한 일생의 에피소드를 통해서요.

재일 여성들의 고백이 절절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책에는 우리네 할머니들 특유의 유쾌함과 강인함도 녹아져 있습니다. 눈여겨볼 또 한 가지는 후미코가 취재해온 재일 여성들이 글자를 읽지 못했다는 사실인데요. 대신 후미코는 그들의 ‘입말’을 충실히 듣고 담았습니다. 그를 만나 “고생 자랑”, “가난 자랑”을 하며 재일 여성들은 고통의 곁에 섰던 게 아닐까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도 자랑이자 노래로서 전해지는 순간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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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나를 드러낸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를 눈에 띄게 전해야 하는 주목경제의 시대기도 하지만, 나를 드러낼 때는 언제나 논란과 위협, 조리돌림 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리베카 솔닛은 긴 회고록을 썼고, 진은영은 문학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고, 재일 여성들은 가와타 후미코에게 삶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들이 입을 연 까닭은 침묵과 부정이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살아가며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고통의 당사자가 됩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의존해야 할지 몰라 외롭기도 합니다. 그 방황 속에 일방적인 절규만 늘어놓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해를 맞아 내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도 있고, 쓰려고 다짐한 사람들, 혹은 아직은 쓰는 행위가 어색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소개해드린 세 권의 책을 토대로 나만의 문장을 상상해본다면 좋겠습니다. 글쓰기는 고통을 겪는 우리에게 꽤 의존할 만한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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