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의 세상을 기억하시나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죠. 길을 걸으며 음악을 들으려면 MP3가 필요했고,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가 필요했으니까요. 메모를 하기 위해서 노트와 펜도 빼놓을 수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이 모든 것이 스마트폰 하나면 가능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가방이 훨씬 더 가벼워졌죠.
이렇게 세상은 더 간편하고 편리하고 가벼운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속도도 전보다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고요. 간편하지 않았던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이 참 살기 좋아졌다고요. 하지만 과연 좋아지기만 했을까요? 발전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 발전의 이면을 담은 세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이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발전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소거하는지 확인해보고, 더 나아가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모던타임즈>
인간의 ‘실존성’ 소거

첫 번째로 살펴볼 영화는 1936년에 개봉한 <모던타임즈>로, 잿빛의 사회 속에서 많은 이들에게 화려한 웃음을 선사했던 찰리 채플린의 영화입니다. <모던타임즈>는 산업화가 극심하게 진행됐던 1930년대 미국 사회를 현실적으로 담아낸 흑백 무성 영화죠. 주인공 찰리는 대형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부품의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는 역할로, 당시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여주었어요.
영화에서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찰리의 작업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곧 그는 보이는 것마다 나사를 조이는 이상 증세를 보이게 되어 정신병원에 가게 됩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찰리는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다가 시위 군중에 휩싸여 감옥에 가고,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합니다. 이토록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한줄기의 희망을 건네며 마무리 됩니다. 그 희망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찰리 채플린은 특유의 연기로 관객들을 웃게 만들죠.
하지만 웃고 넘기기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약 100년 전의 사회상을 담고 있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와 무관하지는 않기 때문인데요. 영화는 대공황 시대의 실업과 빈곤 문제를 담아내며 동시에, 인간이 마치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죠. 바로 찰리가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톱니바퀴 사이사이에 끼어 다니면서도 계속 나사를 조이는,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장면인데요. 사실 현실에서 공장 직원이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공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대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회는 우리가 그 비극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고, 즉 일시적인 기계 오작동처럼 간단한 일로 여기도록 합니다.
하나 하나의 부품들이 만들어낸 커다란 흐름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훨씬 더 풍족하게 일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 하나의 부품들은 톱니나 나사 따위가 아니라 사랑할 수도, 슬퍼할 수도, 두려워할 수도 있는, 고유한 한 명 한 명의 인간들이죠.
세상은 그런 한 명 한 명의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목적을 부여합니다. “너는 ‘그것’을 해야만 해. ‘그것’을 하지 않으면 너는 쓸모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스스로 위축되게 만듭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로 여기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품들이 아닙니다. 인간의 도구화 현상을 막기 위해 발전 자체를 중단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 옆에 있는 한 명의 찰리를 톱니바퀴 사이에서 빼내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돌고 돌아 언젠가 톱니바퀴 사이에 낀 나를 빼내어 주는 일이 되겠죠.
<월•E>
인간의 ‘자발성’ 소거

2008년에 개봉한 픽사 스튜디오의 <월·E>는, 오염된 지구에 남아 홀로 수백 년을 산 청소 로봇 ‘월-E’가 지구 탐사로봇 ‘이브’와 만나며 벌어지는 모험을 다룬 애니메이션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뒤로,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지구가 오염되어 인류가 지구를 떠나고 난 후입니다. 인간들은 거대 우주선에서 기계들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홀로 지구에 남아 매일 청소를 하던 월-E가 작은 새싹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브가 본부에 보고하면서 인류의 지구 귀환 가능성이 생기죠.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인간들의 생활을 관리하던 자동조종장치 오토가 지구로의 귀환을 막으려고 이들을 통제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후반부에, 수백 년 동안 기계 위에서만 생활해 온 사람들이 직접 기계에서 내려와 두 발로 걸으며 월-E, 이브와 함께 지구로의 귀환을 성공시키며 관객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렇기에 두 로봇 주인공에 몰입하다가도 인간인 우리는 영화에 배경처럼 깔려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꾸 시선을 주게 되죠.

기계 위에서 자고, 먹고, 생활하며 살이 오른 사람들은 사방에 사람들이 있어도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지 않고, 눈앞에 수영장이 있어도 모니터만 보며 물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옷 색깔은 유행에 따라 기계에 의해 저절로 바뀌고, 식사 또한 기계들의 추천에 의해 제공됩니다. 우주선 속에서 인간들은 아무도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개인에게 많은 정보의 유입이 가능해지며 경험과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진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이 기계의 통제 아래 이루어졌던 영화 속 세상과 지금 우리의 세상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컨텐츠를 선택하고 직접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는 알고리즘 그리고 자동화된 구조의 지배 아래에서 발생합니다.
발전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자발적으로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점차 앗아갑니다. 그것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조차 없을 만큼 우리가 기술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들죠.
걷는 법을 잊어버린 영화 속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쏟아지는 기술과 정보들을 무분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그것을 얻음으로써 내가 잃거나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한 번쯤은 되짚어보고 생각해보는 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얼굴>
인간의 ‘가시성’ 소거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최근인 2025년에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영화 <얼굴>은 숨겨진 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각장애인 도장 장인 ‘영규’의 아들 ‘동환’이 어느날 어머니 ‘영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으며 영화는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하죠.
추적의 과정에서 영희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영희 걔는 아주 못생겼었어.” 하지만 영화는 영희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며 전개됩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관객은 영희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게 되고요. 영화는 자연스럽게 관객이 미와 추를 구분짓도록 유도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단순히 외적인 미와 추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고도성장을 이뤄온 한국의 근대사가 지우려고 했던 하나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혹은 지우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작품을 만들어 냈다.” (<영화 <얼굴> 연상호 감독 인터뷰 “마지막 장면으로 많은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아이즈매거진)

이 인터뷰에서 언급된 감독의 고민을 되짚어보며 영화를 다시 본다면, 조금 다른 진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진실에 대한 실마리는 영화의 배경을 살펴보면 찾을 수 있는데요, <얼굴>은 한국이 고도로 성장했던 1970년대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됩니다. 왜 하필 70년대의 이야기였을까요?
같은 인터뷰에서 감독은 영희의 남편인 영규에 대해 “성장 중심 사회를 지나온 한국을 의인화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고로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영희의 죽음’, ‘영희의 얼굴’을 다루고 있지만, 좀 더 내밀하게는 그런 영희를 숨기고 지우려 한 영규를 통해 영희의 존재 자체를, 즉 한국의 발전 아래 지워진 개인들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 영화는 한국이 발전이라는 미 아래 수많은 추—이는 ‘영희’가 아니라 ‘영희를 지우고자 했던 움직임들’을 일컫는 것—를 숨겨두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영희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폭력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면 영희 또한 그렇게 사라져버립니다. 영희라는 존재는 원래 없었던 존재가 되어버리죠. 이렇게 발전은 ‘없던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있던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는데요. 만약 이러한 태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세계는 개인에게 그 어떤 폭력도 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폭력의 대상자가 소거된다면 폭력에 대한 책임 또한 소거될 테니까요.
영화는 사건을 해결하거나 희망을 제시하기보다는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남기며 과거의 문제를 더이상 과거의 것이 아닌 지금 우리의 것으로 가지고 옵니다. 우리는 이 영화가 남긴 잔상을 오래도록 곱씹으며 우리사회가 이미 지나온 과거를 어떻게 다시 기록해야 할지, 그리고 우리사회에 앞으로 당도하게 될 미래를 어떻게 구성해나가야 할지 오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조금씩 소거되다 언젠가 완전히 <얼굴>의 영희처럼 사라져버린다고 해도 세상의 발전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겠죠. 분명히 인류 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만약 발전에 뒤따라오는 단점들을 우리가 못 본 척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언젠가 장점이 더이상 장점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오래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놓치고 간 것들을 다시 주워 담고 우리가 지워낸 것들을 다시 우리의 도화지 위에 그려내야 합니다. 1층을 튼튼하게 짓지 않는다면, 2층, 3층 그 이후로 아무리 튼튼하게 지으려 노력한다고 해도 건물은 금방 무너져내릴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