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발전(發展)함에 대해 우리는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지만, 연속성을 가진 성장과 달리 발전은 도약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솟구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시류와 함께 떠오르지만, 더딘 속도로 낙오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죠.
그렇게 발전은 세계를 필연적으로 양분해 왔습니다. 물론 ‘more than’, ‘better than’을 성장의 표어로 삼는 21세기에는 당연한 적자생존의 원칙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분투는 뒤처진 이들을 빠르게 궤도 밖으로 밀어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아티클에서는 발전의 외연적 의미 대신 그 이면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나아감으로 도달하게 된 결과가 아닌, 어디론가 전개되는 변화의 흐름으로서의 발전입니다. 도약이 만들어낸 균열과 충돌의 순간을 담은 영화 세 편을 통해 분진 속에 가려진 세계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낙오된 세계의 총구가 향하는 곳
〈택시 드라이버〉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체제에 미국을 지배한 건 패권국으로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정신이었습니다. 공산주의로부터 평화를 지킨다는 자부심은 청년들로 하여금 기꺼이 전쟁터로 향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이런 믿음은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한 60년대 말부터 미국 사회의 여론이 양극화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1973년 미군 철수를 끌어냈습니다.
당연하게도 실패한 전쟁에서 돌아온 몰락한 영웅의 귀환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전쟁범죄의 공범이라는 차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죠. 당시 미국은 분열된 사회를 봉합하고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고,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참전용사들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전쟁을 극복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의 발전 속에 그들의 자리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그렇게 낙오되어 뉴욕 사회를 부유합니다. 트래비스를 괴롭히는 불면은 그의 존재 자체가 시대와 불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요. 모두가 잠든 밤, 택시를 몰고 밤거리를 헤매던 트래비스는 뉴욕을 더럽히는 오물 같은 인간들을 목격하면서 잃어버린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금 상기합니다.
거울 앞에 선 트래비스가 총을 겨누며 반복하는 대사(“You talkin’ to me?”)는 궤도 밖으로 밀려난 존재가 스스로를 다시 호명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요. 사회가 규정한 ‘낙오자’로서의 정체성과 ‘심판자’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이 장면은 트래비스라는 개인의 분열이 곧 사회와의 충돌임을 상징합니다.
한때 트래비스는 영웅을 꿈꿨지만, 진보로 나아가는 사회의 흐름 속에 시대와 분열했습니다. 그렇게 “선택의 여지가 없”이 낙오되어 버린 트래비스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도약하는 세계에 기꺼이 돌진합니다. 영화 속에서 트래비스의 총구는 시대를 이끄는 또 다른 영웅을 향하기도, 청소해야 마땅한 쓰레기를 향하기도 하는데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충돌이 외면이라는 사회의 거대한 폭력이 만들어낸 균열의 반작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소멸하는 시대의 얼굴들
〈바빌론〉

하지만 모든 균열이 총성을 동반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도약하는 세계에 돌진하는 대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소멸하기도 하죠. 〈택시 드라이버〉의 발전이 참전용사들을 진보의 궤도에서 적극적으로 밀어냈다면, 〈바빌론〉이 조명하고 있는 기술의 발전은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궤도 밖에 남겨두었습니다.
영화 〈바빌론〉의 배경인 1920년대 할리우드는 아메리칸드림을 수출하는 꿈의 공장이었습니다.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이를 대표하는 스타들은 영화를 동경하고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탈출하고 싶은 청년들을 이 불야성으로 이끌었는데요. 그렇게 서로의 욕망이 뒤섞여 뜨겁게 타오르던 황금기의 할리우드는 ’목소리’를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로 도약합니다. 이는 단순히 사운드의 도입이라는 기술의 발전에 그치지 않고, 스타들을 존재의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심판대 위로 소환하게 되죠.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소리 대신 몸짓으로 매혹하던 스타들은 어느 순간 웃음거리로 전락합니다. 새어 나가는 발음 하나, 어색한 침묵 한 번이 그들을 무대 밖으로 끌어내리고 있었죠. 그렇게 이제는 누구도 스크린 위의 ‘나’에게서 꿈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잭으로 하여금 스스로 완전한 침묵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렇게 기술의 발전으로 더 선명하고 화려해진 은막 뒤에서, 한때 할리우드를 밝히던 스타들은 빠르게 지워집니다.


그들과 함께 할리우드에 몸을 던졌던 제작자 매니는 그렇게 저물어가는 시대를 목격합니다. 모두가 발전에 발맞춰 나갈 때에도 끝내 걸음을 떼지 못한 것은, 그의 꿈이 보다 나은 영화가 아닌 영화를 사랑하게 해준 그 시대 자체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의 도약이 만들어낸 이 침묵의 충돌 속에서 매니는 사라진 얼굴들을 기억하는 목격자로서 남기를 선택합니다.
균열 이후를 응시하는 일
〈오펜하이머〉

발전의 순간,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그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떤 도약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나아가 세계의 조건을 완전히 재편하기도 하죠. 지금의 선택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앞선 두 작품이 발전이 만든 당대의 균열을 조명했다면,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 균열을 이끈 인물을 따라 이후의 세계를 지켜봅니다.
영화 속에서 트리니티 핵 실험이 재현되는 순간, 폭발과 함께 찾아오는 침묵은 관객을 영화 바깥의 현실로 돌려놓습니다. 이어 화면을 채우는 섬광은 원자폭탄의 탄생이 단순한 과학적 성취가 아니라 세계를 재구성한 역사적 순간임을 상기시키죠. 흥미로운 지점은 실험이 성공한 뒤 오펜하이머의 표정입니다. 도약의 순간 그가 느낀 미세한 균열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여진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오펜하이머가 직감한 대로 그가 추동한 발전은 시대를 넘어 인류 문명의 도약을 이끌어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파괴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은 원폭 참상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연쇄적으로 일어날 균열에 대한 자조적 예감에 가깝습니다. 원자폭탄의 탄생은 세계, 나아가 인류의 전제조건을 재구성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이 발전은 개인의 책임이나 기억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오펜하이머 시대의 여진은 세대를 건너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발전의 선두에 서 있던 그는 이제 자신이 뒤바꾼 세계의 궤적을 관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영화는 도약 이후 불가역적으로 확장될 미래를 외면할 수 없도록 우리를 관찰자로 남겨둡니다.
발전의 언어는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누군가는 밀려나고, 어떤 세계는 소멸하며, 때로는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기도 합니다. 우리는 발전으로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지만, 어쩌면 우리가 목격하는 건 반복되는 충돌의 여진일지도 모릅니다.
도약의 순간은 섬광처럼 찾아오지만, 그렇게 분열한 세계는 쉽게 봉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결하지 못한 균열을 안고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그렇기에 충돌을 감각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발전의 빛에 눈이 먼 사이 또 어떤 세계를 잃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충돌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느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어쩌면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지금, 세계의 균열을 끝까지 응시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몫일지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