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더 피트’를
봐야만 하는 이유

의학 드라마가 나아갈
다음 단계를 보여주는 시리즈

병원에서 오랜 시간 대기해본 적 있으신가요? 막연히 몇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모든 것이 한 번에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의학 드라마는 매력적입니다. 극 중 의사는 환자를 진찰해 어떻게라도 진단을 내리고 해결해내는 영웅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의학 드라마로는 <ER>, <하우스>, 그리고 현재까지도 방영 중인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작품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국내 역시 1994년 최초로 방영된 <종합병원>부터 시작하여, 인기리에 방영된 <하얀거탑>, 시즌제를 성공적으로 안착한 <낭만닥터 김사부>, 최신작 <중증외상센터>와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까지, 의료 현장을 작품으로 다룬 역사가 깊은 편입니다.

<더 피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병원 중증외상센터의 응급실을 다루는 의학 드라마입니다. 의학 드라마 중에서도 2025년 1월 최초 방영을 시작한, 가장 최신 시리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근래에 논의된 주제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다뤄지고 있지요. 코로나-19 팬데믹의 트라우마로 인한 PTSD부터, 노숙자와 의료 보험 등의 사회적 문제, 더 나아가 가장 최근 시즌에서는 AI를 활용하여 환자의 차트를 작성하는 것에 대한 논의까지도 극 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더 피트>를 주목해야 하는 데에는, 현재까지 나아간 사회상을 빠르게 되짚고 있다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극히 현실을 묘사하는 형식

이미지 출처 : HBO Max

이 시리즈가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데에는 우선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1시간 분량의 한 에피소드가 응급실에서 실제 벌어지는 1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한 시즌을 통해 오전 9시부터 시작한 주간 교대의 입장에서 하루 내내 겪은 사건들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형식은 등장인물들과 함께 출근해 같은 공간에 머무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듭니다.

응급실에 대한 재현 역시 뛰어납니다. 한 번이라도 응급실에 방문해봤다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로 빽빽한 대기실에서 끝없이 기다려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위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 <더 피트>의 프레임 안에는 언제나 오고 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카메라가 중심 인물을 주목하고 있을 때에도 뒤에서는 들것이 지나가고, 누군가는 서류를 들고 뛰어가는 등 응급실 특유의 분주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면의 자연스럽고 낮은 대비의 색감은 이런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대화합니다.

게다가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배경 음악이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들의 말소리와 응급실의 소음만 존재할 뿐입니다. 음악을 통해 인위적으로 상황을 강조하기보다, 극이 진행되면서 쌓이는 무게에 집중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때문인지 실제 병원에서 근무하거나 방문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지속적인 긴장감이 끊어지지 않고,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가수 트로이 시반(Troye Sivan)은 <더 피트>를 시청하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너무 많이 본 나머지 현실 감각을 잃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만큼 강렬하고 생생한 현장감을 느낀 것이겠지요.

이미지 출처 : 트로이 시반 인스타그램 (@troyesivan)

수수께끼 해결 장소가 아닌
업무의 현장, 병원

이미지 출처 : HBO Max

하지만 이런 형식만이 <더 피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더 피트>는 의사만을 다루는 대부분의 의학 드라마와 달리, 병원 전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사를 비롯해 간호사, 이송 요원, 사회복지사, 접수원, 행정 직원, 경비원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통해 병원의 업무는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데에만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환자가 병원에 들어와서 나가기까지, 병원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한 팀이 되어 협력해야 모든 과정이 온전히 진행된다는 걸 전달하는 것입니다. 주조연 캐릭터, 심지어 엑스트라마저도 의사의 수수께끼를 해결을 보조하거나 권력 다툼에 낀 이들이 아닌, 모두가 시스템에서 책임을 가지고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 강도 역시 오롯이 묘사됩니다.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갈 틈도 없이 들어오는 환자들,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 각자의 배경으로 인한 가치 판단과 선택까지, 응급실이라는 혼란스러운 현장에 존재하는 모든 이가 어려운 선택을 직면하고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피로와 갈등, 책임의 무게는 그들이 배경에 불과한 사람들이 아니라 구조를 유지하는 개인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응급실은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병원은 특정 계층에게만 한정된 게 아닌,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비롯해,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 역시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요. 시즌 초반부터 거처가 없는 싱글맘, 급성 약물 중독, 치매 환자, 인종 차별 범죄의 피해자로 추정되는 외국인 여성과 그를 돕다 다친 시민까지, 다채로운 사례의 환자들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사회의 갈등과 불균형이 극 중에서도, 그리고 이 시리즈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먼 거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즉, 병원이야말로 세상이 밀려드는 현장임을 <더 피트>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삶에는 교훈도 악인도 없다

이미지 출처 : HBO Max

기존 의학 드라마는 한 에피소드가 환자 한 명의 큰 사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한 에피소드 내에 그 환자는 치료를 받고, 의사는 이 과정에서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지 않습니다. 모든 환자의 사례는 칼같이 시간에 맞춰 치료가 진행되지도 않을 뿐더러, 반드시 삶의 교훈으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더 피트>는 오로지 응급실이라는 특성 상 긴급한 환자, 더 나아가서는 손쓸 도리가 없어 인도적인 처치가 한계인 환자까지 가감없이 묘사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의료진과 환자 또는 보호자와의 갈등 역시 담담하게 보여주기만 하며, 에피소드의 마무리가 치료의 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또한 드라마가 진행될 때에, 갈등의 대상은 언제나 주연을 어려움에 겪게 하는 ‘악인’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뚜렷한 악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책임해 보이는 보호자의 뒤에는 사회적·경제적인 압박이 있고, 규정을 고수하는 병원 관계자의 뒤에는 법적 책임의 문제와 리소스의 한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걸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자연히 인물의 옳고 그름에 집중하기 보다 ‘이 구조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더 피트>는 우리의 삶에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직시해야함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의학 드라마에서 더 나아가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작품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동영상 출처: 쿠팡 플레이 공식 유튜브 채널

사실 <더 피트>는 앞서 언급한, 1994년부터 2009년까지 방영한 <ER>이라는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습니다. <ER>에서 어리숙한 의대생 역할을 맡았던 노아 와일리(Noah Wyle)가 <더 피트>에서 응급실을 총괄하는 의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극의 분위기를 위해서뿐만 아닌 다분히 의도적인 캐스팅입니다. 한 세대의 시간이 흘렀고, 바뀐 의료 현장을 다시 응급실이라는 공간에 담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입니다. 물론 <더 피트>는 결과적으로 <ER>과는 분리된 시리즈가 되었지만, 최초 기획 단계에서 이 시대의 현장과 의료계에 종사하는 새로운 세대를 다루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의학 드라마가 영웅의 결단에 집중해왔다면, <더 피트>는 더 나아가 그 결단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적 같은 순간을 위해 마련된 시스템,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들, 모두가 영웅이 아닌 주인공인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숨죽이고 지켜보는 시청자들 역시 그 구조 안의 시민이라는 점을 조용히 환기하며, <더 피트>는 ‘의학 드라마’라는 장르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사의 경계를 오고 가는 응급실의 현장은 사실 누구나 멀지 않은 현실이자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피트>는 이런 의미를 넘어, 한 번 보면 멈출 수 없는 재미를 가진 시리즈입니다. 함께 시청하고 응급실 현장으로 ‘출근’해보는 건 어떨까요?


<더 피트> 보러 가기


ANTIEGG - 프리랜서 에디터 공동체


• 위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 ANTIEGG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 위 콘텐츠의 사전 동의 없는 2차 가공 및 영리적인 이용을 금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