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문학 등 영상이 아닌 콘텐츠를 영상화하는 작품은 언제나 큰 관심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원작 팬들의 기대와 우려를 동반하죠. 디테일을 살려 원작의 분위기와 비주얼을 잘 구현하고, 세련된 각색과 연출을 얹으면 평단의 호평과 단단한 팬덤의 응원을 받게 됩니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또한 영상화된 작품이 많은데요. 오늘은 그중 도서가 원작인 작품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화려한 라인업과 볼거리를 내세우기보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작품성을 드러내는 시리즈 3편입니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2020년 공개된 4부작 시리즈로, 뉴욕의 폐쇄적인 종교 집단에서 자란 주인공이 그곳을 탈출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시리즈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하시디즘 공동체인데요. 하시디즘 공동체는 하레디의 한 분파이며, 하레디는 극 정통파 유대교입니다. 쇼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생활은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오죠. 자유의 도시인 뉴욕 한복판에서, 그들은 현대의 문명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들은 인터넷을 쓰지 않습니다. 여성은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도 없어요. 그리고 결혼하는 동시에 삭발하고, 시부모의 감시하에 임신과 출산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들의 복식은 구약성경을 따릅니다. 남성은 검은 정장과 모자를 착용하고 수염과 구레나룻을 길게 기르며, 여성은 긴 치마와 목과 팔을 덮는 옷을 착용하고 가발을 씁니다. 이렇게 엄격한 규율을 견디지 못한 주인공은 결국 공동체를 떠나, 그의 어머니가 있는 독일로 향합니다.
시리즈의 원작인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는 회고록입니다. 저자 데버라 펠드먼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시작한 하시디즘 공동체인 사트마에서 성장하고, 그곳을 탈출한 과정을 기록했죠. 책은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요. 저자는 공동체를 떠난 어머니와 정신 장애가 있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기에 조부모에게서 자랍니다. 어린 그는 신앙심이 깊었고,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시어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몰래 책을 읽으면서 책을 통해 신앙이 아닌 이성을 좇게 됩니다. 이후 데버라는 중매를 통해 남편을 만나고 아이를 낳지만, 공동체는 여성에게 오직 출산만을 강요하기에 결국 그곳을 떠납니다.
시리즈와 책의 내용은 약간 다른데요. 제작진은 저자와 주인공의 베를린살이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유명한 사회 참여 지식인이지만, 주인공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뉴욕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는 장면들은 책을 바탕으로 인물들의 세계와 공간이 정밀하게 구현되었고, 뉴욕을 떠난 후 독일에서의 이야기는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시리즈는 소외된 공동체를 그릴 때 그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배우들뿐만 아니라 하시디즘 공동체 출신의 사람들을 곳곳에 참여하도록 했죠. 이와 같은 디테일과 섬세한 연출 덕분에 시청자는 극에 쉽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평단의 호평을 받은 시리즈는 에미상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2017년 공개된 6부작 시리즈입니다.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주인공 그레이스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죠. 그레이스가 살인범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정신과 의사 조던이 정신병으로 인한 사면을 검토하러 그레이스를 찾아옵니다. 시리즈는 그레이스와 조던의 대화로 진행되는데요. 공범의 진술과 그레이스의 진술은 엇갈립니다. 이에 조던은 그레이스와의 상담을 통해 사건의 진상과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파헤치려고 하지만, 상담이 계속될수록 혼란스러워질 뿐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인지, 누명을 뒤집어쓴 피해자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그레이스. 그리고 그를 욕망하는 남자들의 시선에 따라 알 수 없고 묘한 존재로 묘사되어 온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진실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레이스>의 원작은 부커상을 2번이나 수상한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그레이스』입니다. 소설은 캐나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여성 범죄자인 ‘그레이스 마크스’의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는데요. 저자는 왜 이 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썼을까요? 바로 그레이스가 본인의 말로 사건을 서술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역사 속의 그레이스는 사건 당시 16세였으며, 그를 도와준다는 이들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30년간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오갔다고 하죠. 그래서 저자는 그레이스 본인이 자기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전개하며 사건의 진실과 진짜 그레이스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시리즈와 원작은 모두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오가며 억눌린 심리와 대상화된 여성을 그립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 그를 희롱하는 집 주인 나리, 거칠게 구는 동료 하인. 그레이스 주위의 남자들은 모두 폭력적이고 자기 뜻대로 그를 휘두르려고 하는데요. 그레이스를 찾아온 정신과 의사 조던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이 그를 멋대로 다루고 생각한 것처럼 조던 또한 그를 욕망하고 진단하기 때문이죠. 시리즈는 건조한 내레이션, 배우들의 케미와 열연으로 책의 긴장감을 그대로 재현합니다. 카메오로 원작자인 마거릿 애트우드가 출연하기도 한답니다.
<조용한 희망>
<조용한 희망>은 2021년 공개된 10부작 시리즈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의 학대를 피해 딸을 데리고 집을 나온 여자의 이야기죠. 주인공 알렉스는 조울증 환자인 어머니와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기에 배운 것도, 아는 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출장 청소부 일을 시작하는데요. 힘들지만 보수는 형편없는 와중에 남편은 양육권 소송을 걸어오고, 어머니는 짐이 됩니다. 당장 오늘 끼니와 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알렉스. 알렉스는 본인이 물려받은 가난과 가정 폭력을 딸에게는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용한 희망>의 원작은 스테퍼니 랜드의 에세이 입니다. 남자친구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그는 딸과 함께 집을 나와 노숙인 쉼터에서 살게 되는데요. 저자는 싱글맘이 된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아이를 키웁니다. 그리고 6년간의 가사도우미 생활 끝에 대학 진학에 성공하죠. 저서에는 가난과 싱글맘에 대한 사회의 편견, 저소득층이 겪는 빈곤의 악순환, 끊임없이 가난을 증명해야 했던 본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았습니다. 현재는 유명 신문사들에 칼럼을 기고하며 싱글맘의 처지와 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네요.
시리즈는 원작에 충실한 편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체적 폭행과 달리 증명하기 어려운 정신적 학대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기록하는데요. 그 기록을 바탕으로 책을 출간합니다. 그 책은 ‘Maid’, 바로 <조용한 희망>의 원제입니다. 극적인 장치보다는 알렉스가 엄마와 여성으로서 힘겨움을 담담하게 이겨내는데 초점을 맞춘 연기와 연출은 마음을 울립니다. 극 중 모녀로 등장하는 알렉스와 그의 어머니 폴라는 실제 모녀인데요. 그들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극의 몰입을 돕고 있죠.
오늘 소개한 작품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를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실화인 원작을 바탕으로 구성했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영상화된 콘텐츠는 저자의 날카로운 묘사와 소설의 문학적인 표현, 무엇보다 글을 읽는 독자의 상상을 실현합니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훨씬 풍부한 감정을 느끼고 싶다면, 원작 도서와 함께 영상 콘텐츠를 감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