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억하는
그들만의 방식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라
예술을 차용한 현대사회의 추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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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홀로코스트. 편견과 혐오로 얼룩진 홀로코스트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인류 대학살을 의미합니다. 나치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는 600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갔을 정도로 범지구적 현대사에서 벌어진 최악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는데요. 20세기 역사에서 인류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참혹한 범죄에 대해 가해국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참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해국에 대한 전쟁 보상금과 더불어 난민 수용, 치열한 역사 교육을 통해 반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죠. 그중에서도 예술을 통해 역사를 반성하고 복기하는 이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예술,
독일의 슈톨퍼슈타인

독일의 슈톨퍼슈타인, 프라이브루크 동네 길가에 박혀있는 가로 세로 10cm의 동판
이미지 출처: KBS 뉴스
슈톨퍼슈타인을 들고 있는 남성, 흑백 이미지
이미지 출처: KBS 뉴스

슈톨퍼슈타인(Stolperstene)은 독일의 프라이브루크 동네 길가에 박혀있는 가로 10cm, 세로 10cm 크기의 작고 네모난 놋쇠 동판입니다. 프라이브루크 길을 걷다 돌부리에 발이 채여 멈춰 서면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는 네모난 동판을 만날 수 있는데요. 동판 안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붙잡혀가고 살해됐던 유대인들로, 해당 동판이 박힌 곳은 바로 그들이 살았던 집 앞으로 추정됩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 슈톨퍼슈타인은 독일의 설치 작가이자 행위 예술가인 귄터 뎀니히(Gunter Denmig)가 지난 1993년부터 시작한 예술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전했는데요. 현재까지 베를린 시내에만 7천여 개의 동판이 설치되었고,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우크라이나 등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 20개국에 6만 개 이상의 슈톨퍼슈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박물관 야드 바셈의 모습, 내부 돔 형태의 안쪽에 희생자의 사진이 빼곡히 붙여져 있는
야드 바셈,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의 과정을 살펴보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합쳐 진행됐다는 사실이 따듯한 울림을 전해줍니다. 개당 120유로 남짓이 드는 제작 비용은 모두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고,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야드 바셈(Yad Vashem)’은 희생된 유대인들의 주소록과 같은 주요 자료를 프로젝트 관계자들에게 제공했다고 밝혀졌죠. 수많은 독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자료 정리를 돕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시민 단체들은 슈톨퍼슈타인의 청소와 유지 관리를 주기적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길거리 곳곳에 새겨진 걸림돌은 시민들의 반성하는 공동체적인 의지가 담긴 조형물로 자리 잡은 것이죠.

알쓸신잡 자료 이미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 "슈톨퍼스타인"
이미지 출처: <알쓸신잡3>

지식 여행 프로그램 <알쓸신잡3>에는 슈톨퍼슈타인과 함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언급됐습니다. 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란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이들이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인데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생학을 외치고 유대인을 학살했던 사람들 역시 특별하게 악한 이들이 아닌 평범한 독일인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모습이었죠. 사람 어딘가에 내재된 악이 만들어낸 슬픈 역사 속에서, 우리의 과오를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슈톨퍼슈타인이라는 걸림돌이 제공해주고 있던 셈입니다.


주인을 잃은 신발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헝가리 다뉴브강의 신발

강가에 모아져있는 신발을 찍고있는 사람들
이미지 출처: 매일경제
강가에 모아져있는 신발
이미지 출처: 윤스테이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의 신발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머르기르트 다리와 세체니 다리 사이에 설치된 조형물입니다. 해당 작품은 헝가리 출신 영화감독 캔 토게이(Can Togay)와 조각가 퍼우에르 줄러(Gyula Pauer)가 제작한 60쌍의 신발 모양을 띤 조형물인데요. 얼핏 보면 강가 근처에 버려진 평범한 신발들 같지만 각각의 신발에는 유대인들의 비극적인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화살 십자당 민병대원들이 대화를 나누는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 부다페스트에는 히틀러를 추종하는 나치즘 성향의 화살 십자당(Arrow Cross)이라는 헝가리 민병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치에 버금갈 정도로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악명 높은 단체 중 하나였는데요. 화살 십자당이 행한 일 중 가장 끔찍했던 학살은 다뉴브 강변에 신발을 벗긴 유대인들을 세워두고 총을 쏴 산 채로 강 아래에 밀어버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2만여 명의 유대인이 다뉴브 강가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실제로 이곳에 방문하면 여성의 구두, 남성의 부츠, 아이의 신발까지 다양한 신발 조형물이 강가를 따라 놓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나이, 성별, 직업에 관계없이 다뉴브강에 선 이들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을 실제 크기와 디테일을 담은 신발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80만 명이 넘었던 헝가리 유대인 가운데 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나치,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국의 민족을 학살한 또다른 헝가리인들이 있있습니다. 다뉴브강의 신발은 한 편으로는 피해자, 또 한 편에서는 가해자였던 헝가리 국민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반성의 거울입니다.


쇳소리가 만들어낸 끔찍한 사운드,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샬레헤트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전경
이미지 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파사드
이미지 출처: 맥

2001년 9월에 정식으로 개관한 베를린 유대인 미술관 오늘날 베를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로 꼽힐 정도로 세계적인 명소입니다. 이곳은 독일의 역사에 대한 속죄의 뜻이 담긴 대표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곳인데요. 박물관 건물은 나치의 대학살로 희생된 수백만 유대인의 비극적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건물의 지그재그형 구조는 유대인의 표식인 ‘다윗의 별’이 부러진 모양을 띠고 있으며, 구부러진 건축은 관람객들에게 복잡하고 긴 동선을 제공하며 해당 공간 내에서 유대인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추모할 수 있는 통로로 이들을 유도합니다.

복잡한 동선을 통해 내부를 걷다 보면 박물관 2층에 있는 ‘공백의 기억’이라는 공간을 만날 수 있는데요. 관람객들은 이곳을 통과하며 노출 콘크리트 벽이 높이 서있는 기다란 공간 밑에 깔린 “샬레헤트(Shalechet)”라는 작품 위를 직접 걷게 됩니다.

메나셰 카디슈만, “샬레헤트”, 1997-2001, 이미지 출처: 겟어바웃

세계에서 가장 낮은 기념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이스라엘의 조각가 메나셰 카디슈만(Menashe Kadishman)이 제작한 것으로, 쇠로 만든 사람의 얼굴 조각 1만 개를 바닥에 깔아 둔 작품입니다. 그는 “샬레헤트”를 홀로코스트 기간에 희생당한 유대인뿐만 아니라 폭력과 전쟁으로 사망한 모든 이들을 기리며 만들었다고 전했죠. 1만 개의 조각들은 각기 다른 크기를 지니고 있지만 그 표정들은 한결같이 불행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듯한 기운을 띠고 있습니다.

실제로 관람객들이 그 위를 지나가면 쇠로 만든 얼굴이 서로 부딪히며 삐걱거리고 흐느끼는 것만 같은 괴상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요.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를 통해 그 당시 인권이 유린당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의 불안과 공포를 조각 위를 걷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일상 속 눈에 계속해서 밟히는 돌 무리, 강가에 놓인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신발들, 그리고 시각과 청각, 촉각을 동원해 느낄 수 있는 쇳조각들까지. 다양한 예술적 방식을 빌려 현대사의 비극을 추모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진심 어린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비록 슬픈 역사였지만 어딘가 우리의 마음을 따듯하게 위로해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이 우리가 꼭 말해야 하는 핵심이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지만 살아남은 유대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말입니다. 예술로써 과거를 반성하고, 예술로써 미래를 다짐하는 누군가의 방식을 보며 조금 더 밝은 우리들의 역사를 기대해봅니다.


고수연

고수연

누군가의 관점이 담긴 모든 것이 예술이라 믿습니다.
ANTIEGG와 함께 예술을 기록하고,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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