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도덕을 분리해
생각할 수 있을까

예술은 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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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유독 사건 사고가 많은 문화예술계라고들 합니다. 한때 유명 연예인들의 불륜, 불법 도박 소식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었는데요, 최근에는 연예인들의 학폭 미투, 갑질 논란이 불거져 많은 이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는 2017년 문학계로부터 시작된 성범죄 미투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한번 아티스트의 도덕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으로 작용했습니다.

살아있는 도마뱀, 메뚜기, 귀뚜라미와 바퀴벌레를 한 곳에 가두고 아무런 먹이를 주지 않아 동물학대 논란이 일었던 후안 용 핑의 '세계의 극장(1987-1993)' / 이미지 출처: public delivery
살아있는 도마뱀, 메뚜기, 귀뚜라미와 바퀴벌레를 한 곳에 가두고 아무런 먹이를 주지 않아 동물학대 논란이 일었던 후안 용 핑의 ‘세계의 극장(1987-1993)’ / 이미지 출처: public delivery

아티스트의 도덕성 논란 못지않게 자주 도마에 오르는 주제가 있으니 바로 작품 그 자체의 윤리성입니다. 2020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오른 정윤석 작가의 ‘내일’은 여성 폭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리얼돌’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이를 본 관객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1993년, 동물 보호 운동가들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된 ‘세계의 극장’은 나무 틀 속에 굶주린 도마뱀과 메뚜기, 귀뚜라미와 바퀴벌레를 가두어 전시하였습니다. 작가 후안 용 핑(Huang Yong Ping)은 이를 두고 ‘적자생존’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공간을 구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죠.

예술과 도덕, 이 둘은 별개의 개념일까요? 도덕성이 결여된 아티스트의 작품을 소비하는 행위, 비윤리적인 내용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작품을 전시하는 행위는 ‘예술’이라는 카테고리 내에서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번 위클리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도덕주의와 자율주의

절대적 도덕주의를 주장한 철학자 플라톤 / 이미지 출처: 인스티즈
절대적 도덕주의를 주장한 철학자 플라톤 / 이미지 출처: 인스티즈

도덕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의 우열을 가리려는 시도는 따지고 보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미’를 동일시하던 고대에는 예술과 도덕성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여겼고, 도덕적 가치가 미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고가 우세했습니다. 이처럼 예술이 도덕적 선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도덕주의’라고 합니다. 도덕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플라톤은 “좋은 말과 좋은 곡조와 우아함과 좋은 장단도 좋은 인품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예술에 있어 도덕적인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적 가치의 추구가 진리 탐구와 덕성 함양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조했던 그는 예술 작품에 대한 도덕적 검열이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도덕주의자의 입장에서 예술은 사회의 산물이므로 그 자체로 자율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죠.

“시가 도덕적이라든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삼각형은 도덕적이고 이등변 삼각형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는 말을 남긴 스핑건 / 이미지 출처: 인스티즈
“시가 도덕적이라든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삼각형은 도덕적이고 이등변 삼각형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는 말을 남긴 스핑건 / 이미지 출처: 인스티즈

한편, 도덕주의가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며 이에 반대하는 세력 역시 등장하게 됩니다. 예술의 순수함과 독립성을 최고로 중시하는 이같은 입장을 ‘심미주의’, 또는 ‘유미주의’라 부릅니다. 심미주의는 도덕적 가치와 미적 가치는 무관하며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예술의 형식이지 그 내용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심미주의 지지자들은 예술의 가치를 실제적 삶과 도덕적 효용에서 찾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데요, 미국의 문학자이자 비평가였던 스핑건은 “시가 도덕적이라든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삼각형은 도덕적이고 이등변 삼각형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며 예술이 도덕적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역설했습니다.


아티스트의 도덕성과
작품을 구분할 수 있을까?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범죄, 혹은 비윤리적인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킨 예술가의 작품을 예술 자체로만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앞서 살펴본 도덕주의와 심미주의 각각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전자는 불가, 후자는 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을 것입니다. 한때는 후자, 즉 ‘예술적 성과와 작가의 도덕적 평판을 별개로 봐야 한다’는 심미주의적 관점이 도덕주의적 관점보다 더 우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바뀌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바뀌었다고 할 수 있죠. 이제는 온전히 예술적 성취만으로 작가와 그의 작품을 바라보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시대가 변해서’라는 다소 단순한 표현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대가 변화함에 따라 시대와 시대정신 역시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의 행동 윤리 등 예술과 예술작품, 그리고 그에 연관된 모든 주체들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합니다. 특히 예술가의 사생활과 직결된 그의 도덕적 평판을 예술 작품과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은 명백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한 설득력을 잃어갈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2017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계로부터 촉발된 ‘#미투(Me Too)’(이하 ‘미투’) 운동이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와인스타인(컬러)과 성추행 피해자들(흑백) / 이미지 출처: 익스트림 무비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와인스타인(컬러)과 성추행 피해자들(흑백) / 이미지 출처: 익스트림 무비

미투 캠페인은 2017년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폭로로 인해 촉발된 운동으로, 와인스타인에게 당한 사실을 처음 공개한 배우 애슐리 주드에 이어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셀마 헤이액 등 100여 명의 피해자들이 연달아 그들의 피해사실을 줄줄이 세상에 알림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후로도 로만 폴란스키, 우디 앨런 등 영화계에서 ‘대물’로 꼽히던 감독들의 성범죄 사실이 잇따라 알려졌고, 사람들은 예술적 성취로 인해 가려진 이들의 추악한 이면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명백한 위법임에도 포괄적인 사회적 배신 수준으로만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약물, 도박 등의 범죄와 달리, 성범죄를 포함한 폭력 문제는 사건의 피해자가 나와 내 주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다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했는데요. 이렇게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된 미투 운동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시인 고은, 연출가 이윤택, 연기자 조민기, 영화감독 김기덕 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 고발을 낳았습니다. 후배 문인들을 성희롱·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는 고은 시인의 경우 그의 작품이 다수의 중·고교 교과서에서 삭제 되기도 했죠. 이는 예술작품이 올바른 도덕적 교훈을 제공해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입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방금 본 내용처럼 오늘날 예술계는 더 이상 ‘예술’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범죄와 다름없는 일탈 행위를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술의 향유는 전근대처럼 소수만의 특권이 아니며 특히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이 창작자의 비윤리적인 부정, 곧 삶과 작품에서 오는 괴리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의식이 성장한 것은 물론, 이에 더해 예술의 권력이 공급자(예술가)에서 소비자(관객)으로 바뀌면서 예술가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잣대는 점점 더 엄격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발표된 작품’은 작가 소유가 아닌 공적 소유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계의 관점’이 아닌 ‘사회의 일반적 통념’에 비추어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의 의견도 존재하는데요.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보면 결국 예술에서도 ‘에토스(ethos·작가의 도덕성)’에 대한 판단이 ‘파토스(pathos·작품에 담긴 감성)’에 대한 판단보다 우선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논란이 되는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해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작품’ 그 자체가 비윤리적이라고 인식되는 경우는 어떠할까요? 다양한 형태를 띄는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담는 예술은 때로는 그것을 향유하는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글의 초반에 등장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내일’의 예시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죠. 국립현대미술관의 연례 전시 중 하나인 ‘올해의 작가’전은 미술관이 선정한 작가 4명에 대한 지원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2020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 리얼돌을 주요 소재로 다룬 영상이 전시되면서 작가는 물론 전시를 담당했던 미술관까지 비난 여론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0'에 전시된 정윤석 작가의 작품 '내일'은 리얼돌의 모습이 묘사된 사진과 영상으로 논란을 빚었다 / 이미지 출처: 한국일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0’에 전시된 정윤석 작가의 작품 ‘내일’은 리얼돌의 모습이 묘사된 사진과 영상으로 논란을 빚었다 / 이미지 출처: 한국일보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인간과 닮은 인간의 대체물을 만들거나 소비하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중국의 한 섹스돌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과 그 ‘대체물’을 소비하는 남성 소비자 등을 다뤘는데요. 작품을 제작한 정윤석 작가와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해당 작품이 여성을 상품화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상당수의 관객이 리얼돌을 재현하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다는 감상을 남겼습니다. 일부는 정윤석 작가의 ‘올해의 작가상’ 후보 자격 철회와 전시 중단을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죠.

도덕주의의 관점에서 해당 사례는 절대 용인되어서는 안될 반사회적 예술입니다. 모든 예술 작품은 고결한 품성과 올바른 행위를 포함하며 도덕적 본보기를 제공할 의무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작 방법은 작품 자체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며 사회 모순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반대 견해가 존재하는데요, 이는 다시 ‘시스템을 고발하기 위해 포착한 장면에 시각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논리로 재반박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작품의 내용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작가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적어도 관객이 느낄 시각적 불쾌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연출을 고민하는 것이 그의 몫이자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죠.

반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옹호하는 심미주의는 도덕적으로 논란이 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예술에 속한다면 이를 대중에게 전시, 또는 판매하는 행위를 허용할 것입니다. 심미주의자들은 예술의 가치를 도덕적 효용에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예술과 관련된 미적 판단은 보편적 성격을 띨 수 있다’는 심미주의와 도덕주의의 공통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할 확률이 큽니다. 아름다움과 추함, 즉 미와 추의 경계는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영역입니다. 게다가 해당 작품을 본 많은 대중이 거부감과 불편함을 표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아름다운 예술’로서 보편적인 인정을 받았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가며

이번 위클리에서는 도덕(선)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크게 도덕주의와 심미주의로 양분되는 예술(미)을 바라보는 입장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아티스트’, 그리고 ‘작품’의 도덕성에 적용해보며 문화예술계에 논란을 일으켰던 몇가지의 사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우예솔 에디터의 글(예술에서 ‘추 Ugly’는 왜 필요할까)에서 보았듯 미와 추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합니다. 도덕적 기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불경스럽고 모욕적이라는 혹평을 받는 예술이 다른 곳에서는 너그러이 용인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극단적이고 충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많은 작품들은 우리가 미술에 대해 가지는 근원적인 편견을 깨뜨리고 고정관념을 뒤집기도 합니다. 백인과 흑인, 서구와 제 3세계,  문명과 원시를 나누는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었던 크리스 오필리의 <성모 마리아>(1996)처럼 말이죠. 이러한 측면에서 도덕주의와 심미주의는 그 둘 중 더 ‘맞는’것이 무엇인지를 따지기 보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예술을 찾는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대중은 자신에게 ‘좋은’ 예술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요, 이에 상응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표현의 자유’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진행할지는 모두 작가의 표현의 자유에 달린 것으로 이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예술에 있어 작가의 모든 자율성을 보장하는 ‘프리패스’처럼 작용한다면 이는 곧 크나큰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성을 대상화하거나 그 존재 자체를 수단시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 이를 ‘외설’이라 하는데요, 외설은 도덕주의나 심미주의의 대상이 아닌 금지되어야 할 사회악입니다. 이는 훌륭한 예술작품의 생산 및 감상 기회를 줄어들게 하고 소비자의 모방심리를 부추겨 악순환의 반복을 낳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란 작가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든 간에 일단 세상에 발표되고 나면 그것은 더는 작가의 의도대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 나머지는 관객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죠. 다수의 사람이 보기에 불온한 생각을 가진 예술가들의 작품은 정말 공개, 또는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단 불쾌감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우선으로 보장해 주어야 할까요. “예술은 과연 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논쟁은 당분간 쭉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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