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알아보는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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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문학상은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에게 돌아갔다. 노벨 위원회는 구르나가 식민주의와 난민에 대한 열정적인 통찰을 보여줬다며 수상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구르나의 수상 소식을 두고 출판업계와 베팅 사이트에서는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수많은 작가들이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된 가운데 구르나의 이름은 한 번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벨 문학상 특수’를 노린 국내 출판업계와 공신력을 높여야 하는 베팅사이트 모두 울상을 짓고 있는 상황이다.

관련 업계가 수상자를 예측하지 못하는 건 놀랍지 않은 풍경이다. 해마다 스웨덴 한림원은 대중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발표를 해왔다. 하지만 대중의 평가로부터 유리된 심사 기준으로 인해 ‘노벨 문학상의 선정 기준은 주관적이며 따라서 문학을 대표하는 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실제로 역대 수상자를 살펴보면 당대 최고의 작가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작가들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밀란 쿤데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프란츠 카프카, 마크 트웨인, 레프 톨스토이, 올더스 헉슬리 등등. 모두 노벨 문학상의 ‘아픈 손가락’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노벨 문학상이 작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상임에 틀림없다. 선정만 되면 출판사들이 판권 계약을 따기 위해 줄을 서고, 각종 강연이나 행사에 초청되는 등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기 때문이다. 또한 노벨상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분야(노벨 물리학상, 노벨 경제학상 등)에서 쌓아온 명예가 덧입혀져 있다. 노벨 문학상과 노벨 평화상이 혜택을 받는 쪽에 속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노벨 문학상은 출판업계 및 매스컴의 도움과 노벨상의 종합적인 권위에 힘 입어 최고의 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는 중이다.

모든 시상 주체가 가장 경계하는 건, 상이 권위를 잃는 일이다.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을 타는 걸 최고의 영예로 여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상 거부’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상이 최고의 명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도 총 3번, 수상 거부를 당했다. 이중 정치적 외압이나 내부자 수상 등의 이유를 제외하고 순전히 자기 의사로 수상을 거부한 사람은 한 명 뿐이다. 『구토』 등의 작품을 남긴 프랑스의 소설가 ‘장 폴 사르트르’다.

오늘의 주인공, 사르트르는 왜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을까. 사르트르가 생전에 뱉은 두 발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작가란 설령 가장 명예로운 형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한 제도로 변형되는 건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름 앞에 ‘노벨상 수상자’라는 수식이 붙는 순간 상을 수여한 단체와 수상자는 하나로 인식된다. 사르트르는 그러한 인식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노벨상을 받으면 작가 생명이 쉽게 끝났겠지만 나는 노벨상을 거부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이건 무슨 뜻일까. 왜 노벨상을 받으면 작가 생명이 끝난다고 말한 걸까.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글에서 ‘참여문학론’의 경전으로 평가받는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영어로 쓰여진 책
이미지 출처: pixabay, @647264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사르트르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어렵다고 정평이 난 저서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전의 해제인 변광배 교수의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읽기』를 토대로 작품의 내용을 핥는 선에서 만족하려 한다. 풀어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에는 실존과 본질, 도구와 사물, 대자와 즉자 등 교양적인 수준의 이해를 가로막는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비전공자인 필자가 이를 좀 더 대중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왜곡됐을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따라서 관심있는 독자는 변광배 교수의 해제를, 능력이 된다면 사르트르의 원전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굵직한 하위 질문들로 구성돼 있다. 사르트르는 위 질문에 포함된 3가지 물음(‘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해 쓰는가’)으로 책의 챕터를 구성했다. 위 질문에 순서대로 답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참여문학론의 본질에 조금씩 다가서게 된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참여문학론의 주요 내용에 대한 저자의 요약을 들어보자. 참여문학론은 다음의 세 과정으로 요약된다. 우선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 작가는 자신과 세상이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 이 세 과정을 거치며 작가는 부당한 세상을 변화시키기로 다짐하게 된다. 이때 작가가 사용하는 도구는 ‘쓰기 행위’ 곧 문학이다. 즉, 작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소를 드러내고 고발함으로써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꿔야 한다. 이것이 참여문학론의 본령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이 근본 강령에 다는 주석이자, 구체적인 방법론을 담은 책으로 볼 수 있다. 「<현대지> 창간사」에서 사르트르는 말한다. “요컨데 우리의 의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도록 힘을 모으려는 데 있다.”

We are better than this!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여자의 뒷모습
이미지 출처: pixabay, @StockSnap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해제를 토대로 사르트르의 주장을 차근차근 따라가 보자. 먼저 사르트르는 ‘참여’할 수 있는 예술의 범위를 설정한다. 회화나 음악을 문학과 구분하고 문학 내에서도 시와 산문을 구분한다. 사르트르가 이들을 나누는 기준은 이렇다. 우선 언어를 질료로 삼는 문학과 색채나 음조를 질료로 삼는 회화나 음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언어는 ‘기호’이고 색체나 음조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기호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라는 기호는 어디에 붙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양 옆에 숫자를 붙이면 덧셈 표시가 되며, 건물 벽에 새기면 병원 마크가 된다. 즉 언어는 맥락 속에서 의미가 형성되며,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사물은 그렇지 않다. 사물은 그 자체로도 부족함 없이 ‘그냥’ 존재한다. 사르트르는 “그 물체들이 화가의 분노나 고뇌나 기쁨을, 말이나 얼굴의 표정처럼 나타내는 건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즉 화가나 음악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며 보는 사람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든 뭐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의도한 메시지를 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이들에게 참여를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의미를 그림으로 그릴 수도, 음악으로 꾸밀 수도 없다. 그런 이상 누가 감히 화가나 음악가에게 참여하기를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문학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사르트르는 한발 더 나아가 시와 산문을 구분하고 이중 오직 산문만이 참여할 자격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시의 언어는 앞에서 살펴본 ‘사물’에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를 사르트르는 어떻게 구분했을까. 두 언어를 비교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유리를 예로 든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 밖을 볼 때 우리는 유리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때 유리는 도구(바깥쪽을 보게 해주면서 안쪽을 보호하는)로 기능한다. 하지만 유리에 무언가가 묻거나 유리가 빛을 반사하는 순간 우리는 유리에 주목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리는 하나의 사물로써 인식된다. 사르트르는 언어를 도구 이상으로 보는 태도에 반대했다. 언어 자체에 천착하는 태도는 참여문학의 강령 곧 언어라는 수단으로 사회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투명한 유리처럼 도구(의미를 전달하는)로 사용하면 충분하다. 시의 언어는 언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유로운 해석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불투명한 유리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시인들에게도 참여를 요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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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사르트르가 말한 ‘문학’과 ‘작가’의 의미가 뚜렷해졌다. 작가가 문학을 수단으로 사회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문학은 산문을, 작가는 산문 작가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산문 작가가 ‘쓰는 행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일까. 사르트르는 “말은 행동의 어떤 특수한 계기이며, 행동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작가의 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건데, 대체 누구의 어떤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뜻일까.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즉 작가의 사명은 ‘쓰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내밀어 사회를 변화키도록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는 것이다. 앞서 산문 작가가 ‘참여’의 자격을 갖고 산문의 언어로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은 이미 살펴봤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작가는 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려 하는가’가 될 것이다. 다음 장에서 이 질문에 답한 뒤,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사르트르의 주장도 이어서 볼 것이다.


왜 쓰는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자에게 부당한 세상을 함께 바꾸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곧 ‘참여’를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질문과 답변 사이에는 우리가 건너뛴 긴 연역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 과정을 차근차근 따라나가다 보면, 우리는 작가에게는 반드시 독자라는 주체가 필요하다는 일차적인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먼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사르트르의 유명한 격언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에서부터 시작한다.

테이블 위에 물컵이 놓여있다. 물컵의 ‘물을 담는 도구’라는 존재의미를 갖는다. 물컵을 만들 때부터 이 존재의미는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말해 물컵을 만든(실존) 뒤에 물을 담는 기능(본질)을 발견한 게 아니다. 이처럼 사물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정반대다. 사르트르(무신론자)는 인간이 아무런 존재의미를 갖지 않고 세상에 던져졌으며 의미의 부재 혹은 결여 상태를 해소하고자 고뇌한다고 말한다. 또 인간이 존재의미를 발견하고 실존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 명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 숨 쉬며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인 인간은 자기 안에서 존재의미를 완전히 확보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인간은 고뇌하지 않는, 의식을 갖지 못한 한낱 사물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모순을 수레를 끄는 당나귀에 비유한다. 당나귀 앞에 당근이 있다. 하지만 당근은 수레에 매달려 있다. 당근을 먹기 위해 나아가는 순간, 당근도 똑같이 나아간다. 따라서 당나귀는 결코 당근을 먹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눈을 가리고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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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사르트르는 다시 한번 작가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예술적 창조의 주요 동기 중 하나는 분명 세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려는 욕망이다.”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려는 욕망이 창작의 동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세계는 무엇이며, 이로부터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우리가 존재의 발견자인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또한 그 제작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 이리하여 우리가 ‘드러내는’ 존재라고 하는 내적 확신에는 이 ‘드러난’ 사물에 비해 우리는 본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신념이 부가된다.” 발견된 세계, 이전부터 존재했던 ‘현실’에서 인간은 당근을 좇는 당나귀처럼 존재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 하지만 작가가 창작한 세계인 ‘작품’ 속에서는 다르다. 어떤 작품이든 창작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작가(창조자)는 작품(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요청된다. 사르트르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창작과 소유를 동일선 상에 놓는다. 가령 내가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소유한다. 소유대상은 소유자를 필요로 한다. 이 사실로부터 나는 ‘소유자’라는 존재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작가는 늘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존재이유’가 된다.

하지만 위의 결론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물이 있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작품을 작가와 분리할 수 있냐는 의문이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화폭이나 종이 위에서 얻은 결과가 우리의 눈에는 결코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결과를 낳은 수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법은 끝끝내 주체적인 발견일 따름이다.” 창작자는 작품의 모든 면면을 다 안다. 작품에는 창작자의 모든 면면이 투영돼 있다. 따라서 창작자가 작품으로부터 존재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실존이 본질에 이를 수 없다는, 곧 자기 안에서 존재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고 한 전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르트르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까. 그는 독자의 존재를 요청한다. 독자가 읽는 행위를 통해 작품에 객체성을 불어넣음으로써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자의 평가라는 시각 속에서 내가 나의 책을 다시 읽을 때 나는 그 책 속에서 어떤 깊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 깊이는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 책 속에 절대로 불어넣을 수 없었던 그런 깊이다.” 문학작품을 팽이에 비유한다면 독자의 읽는 행위는 팽이를 치는 끈이라 할 수 있다. 외부의 힘이 지속적으로 가해져야 팽이가 쓰러지지 않듯, 작품도 읽는 행위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문학이라는 대상은 독자의 주체성 이외에는 다른 어떤 실체도 갖지 않는다.”

독자에 의해 작품에 객체성이 부여되면, 작품는 작가의 소유이지만 작가와는 분이된 사물이 되며, 작가는 이로부터 존재의미를 얻을 수 있다. 이때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하나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다른 주체여야 한다는 점(당연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두 주체 모두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펼쳐진 책을 손으로 들고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Congerdesign

누구를 위해 쓰는가?

이제 우리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핵심 명제 중 하나인 “타자를 위한 예술과 타자에 의한 예술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위 문장은 앞선 논의를 토대로 ‘독자를 위한 문학과 독자에 의한 문학만이 존재할 뿐이다’로 의역될 수 있고, 우리는 독자에 의한 문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봤다. 다시 정리하면, ‘독자에 의한 문학’은 독자의 읽기 행위를 통해 객체성을 확보한 문학을 의미하며, 작가는 이를 통해 ‘존재의미의 발견’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독자를 위한 문학’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앞서 독자는 작품에 ‘어떤 깊이’를 첨가해 객체성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독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작가를 도와줄까?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고 해석을 더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독자는 작품을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다. 독자의 읽는 행위를 유도할 인센티브가 필요한 이유다. 사르트르는 독자에게 3가지 특혜가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먼저 독자는 작가에 의해 자유와 주체성을 인정 받는다. 다음으로 독자는 작가에 의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요청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는 ‘읽기의 결과물’,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이 더해진 작품을 소유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읽는 행위를 일종의 창작 행위로 간주했다. “이 작업을 재발명이나 발견이라고 부르는 것이 차라리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우선 이와 같은 재발명이 최초의 발명과 똑같이 새롭고 독창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독자는 작가와 자신의 새로운 창작물(독후감, 비평 등)으로부터 필요한 존재로 요청된다. 이들 안에서 존재의미를 찾아 실존적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자유가 완전하지 않다는 독자의 불만을 해소해야 한다.

독자는 작가로부터 자유를 인정 받지만 동시에 자유를 제한 받는다. 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바, “작가는 독자보다 항상 더 멀리 나가기” 때문이다. 독자는 작품의 의의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작가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항상 더 멀리 나가는’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캐내는 건 불가능하므로. 사르트르가 읽기를 “인도된 창조”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특혜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자유가 제한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작품 읽기를 중단한다. 독자를 통해 존재의미를 확보하려 했던 작가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작가는 독자의 자유를 보호하며 자신의 목표를 이룰 방법을 찾아야 한다.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의 옆 모습
이미지 출처: pixabay, @Fotoerich

독자의 자유를 보호하면서 독자에게 작품을 읽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작가는 두 가지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호소’다. 호소란 호소하는 자가 호소를 받는 자의 지위를 인정하고 이를 토대로 어떤 공동의 과업을 이루자고 ‘요청’하는 행위다. 여기서 지위는 완전한 자유 상태를 의미하며, 공동의 과업은 존재의미를 찾고 실존적 고뇌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일을 뜻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는 읽기의 결과물을 통해 제시된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독자들의 자유에 호소하기 위해 쓰고, 자신의 작품을 존립시켜 주기를 그들의 자유에 요청한다.” 그런데 ‘호소하기’에 대한 사르트르의 정의 속에는 요청이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다. 또한 사르트르의 사유 안에서 요청은 ‘요구’와 무관하지 않고, 요구는 ‘명령’을 내포한다. 즉 작가는 독자의 자유를 인정하며 이에 호소하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준 인정과 신뢰를 되돌려주길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명령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대가란 작품을 읽고 객체성을 부여하는 노동이다. 하지만 명령이라는 단어는 두 주체 사이에 힘의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는 자유에 대한 구조적인 억압이며, 독자의 읽기를 멈추게 하는 방해물이 된다.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독자에게 ‘호소’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두 번째로 사르트르가 제시한 방법은 ‘증여’다. 증여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주는’ 행위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독자에게 주는 일에 만족하고, 독자는 어떠한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가의 요청에 응할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흥미롭게도 사르트르는 증여 역시 상대방의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로 봤다. 미국 포틀래치에 살았던 인디언들을 예로 드는데, 이들은 잉여 재산을 전쟁 등의 재앙을 불러오는 원흉으로 봤기 때문에 반드시 잉여를 분배하고 증여하는 독특한 풍습을 갖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증여자가 증여물을 통해 수증자에 대한 힘의 우위를 과시한다고 말한다. 증여 역시 명령과 비슷하게 대상의 주체성과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증여는 하나의 원초적인 파괴 형식이다.”

마지막으로 사르트르는 작가가 ‘독자의 요구권을 수용’한다고 주장하며 힘의 균형을 맞추려 시도한다. 이 세상에는 현세적 독자(유산 계급)와 잠재적 독자(무산 계급)가 있다. 현세적 독자에게는 작품을 읽을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파괴하려는 작품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잠재적 독자는 이와 정반대로 경제적인 여유는 없지만 사회 변혁을 이룬 뒤에 독자가 될 수 있는 이들이다. 사르트르는 잠재적 독자들이 작가에게 자신들이 받는 억압과 폭력을 드러내달라고 요청, 요구, 더 나아가 명령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요구할 권리’는 작가와 독자의 힘의 균형을 맞추며 동등한 관계, 곧 구조적으로 어느 쪽의 자유와 주체성도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독자를 위한 문학’의 의미이며, 논의는 여기서 매듭 지어진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lisaRiva

사르트르는 왜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을까?

필자는 두 부분에서 해제의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우선 잠재적 독자에게는 작품을 읽을 여유가 없는데 작가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가 있을까. 사르트르의 논리대로라면 작가는 소비할 수 없는 독자를 대상으로, 소비돼야 하는 작품을 써야 하는 모순에 부딪힌다. 이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 하나, 존재의미의 발견이라는 미시적인 목표가 어떻게 사회 변혁이라는 거시적인 목표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작가의 요청에 의해 독자가 작품을 읽고 깊이를 더하는 과정을,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이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해도 괜찮을까. 그 모든 과정을 ‘참여’라 정의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 의문들을 제쳐두고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읽기』의 부록에 등장하는 ‘익명의 증여’라는 개념을 토대로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보려 한다.

사르트르는 『도덕을 위한 노트』에서 증여자의 이름을 빼는 작업을 통해 증여의 파괴성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누가 글을 썼는지 모르면 당연히 독자의 자유와 주체성을 침해당할 일도 없게 된다. 물론 이 세상에 ‘작자 미상’인 글은 없다. 하지만 독자들이 처음 보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작가의 이름이 찍힌 작품을 받는다면 이것은 익명의 증여와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사르트르가 왜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 작가의 생명이 끝난다”고 한 건 수상하는 순간 익명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는 순간 작가는 제도와 함께 인식되며, 독자의 주체성과 자유는 파괴된다. 노벨상이라는 권위에 의해 독자만의 순수한 해석을 더할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작가와 독자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했으며, 자유를 보호하면서 두 주체가 존재의미 발견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과정은 오직 ‘익명의 증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이 글의 결론이다.


부족하지만 해제에 대한 해제를 덧붙였다. 위의 긴 논의를 요약하면 이렇다. 사르트르는 많은 예술 장르 중 오직 산문만이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우리는 먼저 왜 작가가 글을 쓰려하는지 그 동기를 살펴봤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필요한 존재로 요청 받으며 존재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하지만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기에, 인간은 자기 안에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전제에 따라 작가는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작가는 작품에 객체성을 불어넣어줄, 즉 작품을 ‘사물’로 만들어줄 독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독자는 이 지난한 과정을 무료로 도와주지 않는다. 독자에게는 물론 특혜(독자도 읽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도 주어지지만, 자유가 침해당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해 읽기를 중단할 위험이 존재한다. 이에 사르트르는 독자의 자유를 보호하면서 작가의 목표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 방법은 호소하거나 증여하거나 독자들의 요구권을 수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필연적으로 독자의 자유를 파괴했고, 작품을 읽지도 않을 독자를 위해 작품을 내야 한다는 모순에 부딪혔다. 따라서 우리는 익명의 증여를 통해서만 독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토대로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이유는 그가 익명성이 파괴되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당신은 문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생각과 그가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이유에 대한 글의 해석에 동의하는가. 아니라면 당신은 위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겠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 변광배,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읽기』, 세창미디어, 2016

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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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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