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자연의 대립
파괴, 공생 그리고 추방

우리 앞에 놓인 세 갈래길
두 거장의 애니메이션으로 본 자연 속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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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역설’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의 발길이 끊긴 자연이 오염되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현상을 뜻한다. 각국에서 엄격한 인구 이동 제한령을 내린 지난해 세계 곳곳에서 희귀동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대기의 질이 크게 개선되는 등의 이변이 일어났다. 올해는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는 나라가 늘며 볼 수 없게 됐지만, 위 사례는 인간이 자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손색이 없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연에게 영향을 주고,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움직임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파괴하는 쪽을 선택한다. 파괴된 자연은 본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자정 작용을 벌인다. 이것이 인간에게는 재앙으로 다가온다. 고도화 된 과학 기술을 갖춘 오늘날에도 우리는 자연이 던지는 과제, 이를테면 지구온난화, 기상이변, 미세먼지 등의 재앙 앞에서 허덕이고 있다. 당장의 편의를 위해 공존의 가치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정복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고, 공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 중요한 건 우리 세대가 어떤 관점으로 자연을 대하냐에 따라 다음 세대가 마실 물과 쉴 공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종식 후 보복성 소비로 인해 환경 파괴가 가속될 것이라 전망한다. ‘역설’에 낙관하는 것도 잠시, 우리는 또 다시 세 갈래길 앞에 서게 됐다. 파괴할 것인가, 공생할 것인가, 영원히 추방당할 것인가. 버튼을 눌러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파괴 Destruction

타카하타 이사오『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너구리, 순수하고 천진난만하지만 무력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196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기를 맞이한 일본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뉴타운이라는 도시개발 사업으로 인해 너구리들의 터전이 어떻게 파괴되고, 그들의 삶이 어떻게 유린당하는지 그 과정을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너구리들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도쿄 인근 타마산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너구리들은 어느날 들이닥친 철거장비들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다. 영역이 줄어들고, 먹이도 부족해지자 타마산 너구리들은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야심한 밤 패싸움을 벌이던 중, 마을의 원로 너구리인 오로쿠 할멈으로부터 “이러다 다 죽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나무가 잘려나간, 벌거벗은 산이 이들의 눈에 들어온다.

너구리들은 ‘민둥산’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단결한다. 이들은 금지된 변신술을 부활시키고 사범들을 모시기 위해 젊은 너구리들을 일본 각지로 파견한다. 또한 ‘인간 연구 5개년 계획’을 세운 뒤 버려진 텔레비전을 주워 인간 세상을 관찰한다. 변신술 부활과 인간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변신해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면밀히 인간을 관찰한다.

하지만 어느 날 타마산 너구리의 일원인 ‘곤타’는 자신의 고향이 처참하게 파괴된 현장을 보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곤타는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고, 힘센 너구리들을 모아 공사장을 습격한다. 용의주도한 습격으로 여러 사상자를 내는 데 성공했지만, 공사는 멈추는 데엔 실패한다.

곤타가 부상을 당하자 낙천적인 너구리들은 다시 인간을 놀래키는 정도의 사소한 게릴라전만 이어나간다. 하지만 인간의 폭압은 날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간다. 설상가상으로 짝짓기를 참지 못한 너구리들로 인해 인구가 폭증하고, 여름 흉작으로 먹이가 고갈된다.

대책을 논하는 중 시코쿠에서 변신술의 귀재인 사범들이 도착한다. 사범들의 지휘 아래 너구리들은 마침내 ‘요괴대작전’을 벌인다. 요괴로 변신해 인간들을 놀래켜 도시를 떠나게 하는 작전이었다. 너구리들은 기발한 발상으로 마을 사람들을 골탕 먹이는 데 성공하지만, 인근에서 공사가 진행되던 놀이공원 사장이 이를 홍보를 위한 퍼레이드로 호도해 작전은 금세 없던 일이 되고 만다.

무슨 짓을 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너구리들은 절망한다. 곤타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너구리들을 모아 인간과 전면전을 벌이지만, 총에 맞거나 트럭에 치여 전멸한다. 변신술을 아는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둔갑해 사회에 숨어 살게 되고, 변신술을 모르는 너구리들은 산을 떠나며 영화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굴착기의 발명으로 인간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도시를 개발할 수 있게 됐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도 굴착기는 도시개발의 상징으로써, 여러 장면에 걸쳐 등장한다. 먼저 영화 초반 타마산 너구리들이 패싸움을 벌일 때, 이들의 뒤로 굴착기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들의 갈등은 인간의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이 줄어들며 발생한 것이지만 이들은 문제의 원흉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굴착기는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을 골탕 먹이기 위한 작전들이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난 이후, 멀리 후지노산에서 하야시라는 너구리가 온다. 하야시는 인간들이 흙을 버려 자신의 산이 망가지고 있다며, 흙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아내기 위해 트럭에 올랐다가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말한다. “왜 산을 깎아 다른 산에 버리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굴착기가 파낸 방대한 양의 흙은 반드시 다른 곳에 버려진다. 파괴는 늘 쌍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너구리들은 점점 참상의 퍼즐조각을 맞춰나간다.

타마산에 눈이 내리고 공사장 인부들은 대부분 연휴를 맞아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를 틈타 너구리들은 굴착기(불도저)를 언덕 아래로 밀어버린다. 인부들을 죽이고 놀래켜서 떠나게 해도 다음 날이면 다른 인부들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안 너구리들이, 공사 장비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는 개발하는 인간이 아닌 개발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드디어 너구리들이 자신들이 맞서야 하는 대상을 마주보게 된 것이다.

영화의 절정은 절망한 너구리들이, 마지막으로 힘을 합쳐 행복했던 옛모습을 현실에 재현해내는 장면이다. 수십 마리의 너구리들이 굴착기 위에 앉아 합장하고 기를 모은다. 그러자 굴착기는 순식간에 풀로 뒤덮이고, 이를 중심으로 나무들의 뿌리가 뻗어나간다. 비록 술법으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지만, 너구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다음 장면에서 그 굴착기는 도시의 마지막 남은 초가집을 부순다.

최후의 변신술, 인간의 탈을 쓴 너구리

수많은 너구리들이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산에 숨어든다. 하지만 일부는 변신술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적응한다. 이는 일종의 열린 결말로, 우리 주변에 인간의 탈을 쓴 너구리가 살 수도 있다고 일러주는 귀여운 장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운은 남는다.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실은 그가 인간으로 위장한 너구리가 아닐지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극중 무려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너구리 분타는 참혹하게 파괴된 고향을 보며 절규한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너구리밖에 없어. 딴 놈들은 전혀 못해. 인간은 너구리였어. 너구리에도 끼지 못하는 더러운 너구리라고. 산을 돌려줘! 마을을 돌려줘! 들을 돌려줘!’ 산과 마을과 들의 주인은 너구리인데. 너구리들만이 자신의 터전을 변형시킬 권리가 있는데.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분타는 인간 중에 더러운 너구리가 있다고 외친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 가운데 두 종류의 너구리가 있다고 말한다. 자연보호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너구리와 환경파괴에 앞장 서는 ‘너구리에도 끼지 못하는 더러운 너구리’가 공존한다.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가, 영화는 우리에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피해서는 안 될 질문을 던진다.


공생 Symbiosis

미야자키 하야오『모노노케 히메』

타타라 마을, 필요를 넘어서는 탐욕과 자연 파괴

『모노노케 히메』의 무대는 일본의 역사에서 중세로 분류되는 무로마치 시대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였으며, 도시의 확산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자연 파괴가 가속화된 시기였다. 자연을 경외하고, 자연에 깃든 신령들을 숭배하는 믿음이 서서히 붕괴하며 인간의 자연의 대립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는 평화로운 에미시 부족 마을에 재앙신(분노와 원한이 응집된 존재)으로 변한 멧돼지(나고)가 나타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부족의 차기 족장인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활로 재앙신을 쏴 죽이지만, 이 과정에서 재앙신의 공격을 받고 팔에 죽음의 저주를 새기게 된다.

아시타카의 팔에 깃든 흉터는 몸을 점차 잠식하며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저주였다. 무녀의 충고에 따라 아시타카는 저주를 풀기 위해 서쪽으로 떠난다. 우연한 기회로 사슴신의 숲에 위치한 타타라 마을에 닿게 된 아시타카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자연 파괴와 전쟁의 전말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은 철광석을 캐내어 철을 만드는 마을이다. 이 과정에서 나무를 베고 땅을 파는 등 숲을 파괴했기에 터전을 지키려는 숲의 신령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시타카는 마을의 지도자인 에보시가 멧돼지를 재앙신으로 변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녀가 당시 천대 받던 여자들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나병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잠재운다.

얼마 뒤 산이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마을에 처들어온다. 산은 ‘모노노케 히메’라 불리는 소녀로, 아기 때부터 들개의 손에 길러지며 숲을 사랑하고 인간을 증오하게 된 인물이다. 에보시와 산이 충돌한 다급한 순간에 아시타카는 둘을 모두 제압한 뒤, 산을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온다. 애초에 인간과 숲의 공존을 꿈꾸는 아시타카였기에, 어느 쪽의 파멸도 바라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총상을 입은 아시타카는 곧 쓰러지고, 산은 자신을 구한 아시타카를 사슴신에게 데려간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사슴신 ‘시시가미’는 아시타카의 총상을 치료한다. 사슴신의 선택을 본 산은 아시타카를 향한 적의를 거두고, 그의 회복을 돕기로 결심한다.

우두머리 멧돼지(옷코토누시)의 지휘 아래 멧돼지와 타타라 마을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으로 멧돼지 일족은 완전한 파멸을 맞고 많은 상처를 입은 옷코토누시는 피를 토하며 재앙신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재앙신이 되기 직전 사슴신이 나타나 그의 생명을 거둔다. 옷코토누시을 따라 사슴신의 위치를 추적한 에보시는 기회를 틈타 사슴신을 죽이고, 사슴신의 머리가 영생을 가져다준다 믿은 지코 스님은 잘린 머리를 들고 달아난다.

머리가 잘린 몸뚱이는 폭주해, 죽음의 액체를 내뿜어 숲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산과 아시타카는 힘을 합쳐 사슴신에게 머리를 돌려주고 대재앙을 막아낸다. 폐허가 된 숲에는 다시 생명이 돋아난다. 영화는 산이 같이 살자는 아시타카의 제안을 거절하고 각자 타타라 마을과 숲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시시가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대자연의 섭리

『모노노케 히메』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신령들이 등장한다. 그중 굉장히 신비롭고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사슴신 ‘시시가미’다. 낮에는 사슴, 밤에는 다이다라봇치(사슴형 수인)의 형상으로 숲을 돌아다니는 시시가미는 등장할 때마다 예상치 못한 선택을 내리며 자연의 운명을 바꿔 놓는다. 극중 대사를 종합해보면 시시가미는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다. 폐허가 된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싹을 틔우는 신’이며 인간이 결코 죽일 수 없는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영화 중반 시시가미는 총상을 입은 아시타카를 살려준다. 하지만 그의 팔에 얽힌 저주는 풀어주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이를 더 고통 받다 죽으라는 메시지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마지막에 목을 돌려 받은 시시가미가 아시타카의 저주를 말끔히 없애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시가미는 부상을 당한 들개(모로)와 옷코토누시를 치료해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숨을 거둬 들인다. 자연의 섭리, 자연 그 자체이기에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것이다. 시시가미를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다룬 기존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자연의 수호자’ 쯤으로 이해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숲의 동물들은 시시가미의 선택에 반발한다. 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을 내버려두고, 가장 열심히 숲을 지켜온 신령들의 목숨을 앗아가냐고. 동물들은 시시가미가 자연의 편을 들어주길 바라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선택을 내릴 뿐이다. 그렇다면 시시가미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자연의 섭리가 무엇이며 그것에는 아무런 목적성이 없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에보시가 자신을 향해 총을 쏘려는 모습을 본 시시가미는 그녀의 총에 꽃을 피워 발사를 막으려 한다. 이미 아시타카를 구원함으로써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보인 시시가미였지만, 에보시의 선택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 장면을 본 우리는 시시가미의 목적이 자기존속, 곧 자연의 섭리가 유지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시시가미가 처음 아시타카의 저주를 풀어주지 않은 이유도 명확해진다. 다가오는 위기에 재앙신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잘린 다이다라봇치의 폭주는 인간과 숲에게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오지만 더 거대한 재앙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섭리, 곧 생명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가 파괴되는 일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 시시가미는 숲과 마을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을 되찾으려 한 게 아닐까. 자연의 자정 작용은 좁게 보면 재앙이지만, 넓게 보면 은혜다.

아시타카, 공존을 꿈꾸는 인간과 자연의 중재자

『모노노케 히메』는 각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지코 스님에게, 인간의 파괴에 분노하는 자연의 모습은 산에게 각각 투영돼 있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대립을 중재자 역할을 맡는다. 산과 아시타카의 관계는 여러 사건을 거치며 달라지는데, 둘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공존에 대한 영화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산과 아시타카는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시작해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아시타카는 화해의 가능성을 열고 산에게 다가가지만 산은 그를 죽이려 한다. 하지만 산은 시시가미가 아시타카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에보시가 시시가미의 머리를 자르고 대재앙이 시작되자, 산과 아시타카는 시시가미의 머리를 되찾기 위해 협력한다. 마침내 지코 스님을 잡아 그에게서 머리를 빼앗는다. 다이다라봇치 몸통에서 뿜어져 나온 죽음의 액체가 이들을 덮치려는 위기의 순간, 산과 아시타카는 머리를 돌려주며 용서를 구한다.

이 장면에는 인간과 자연, 중재자를 대표하는 세 인물이 모두 나온다. 산과 아시타카가 머리를 함께 들어올리고 있고, 지코 스님은 그들의 발치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인간이 이제라도 용서를 구하고 자연과 화합하면 닥친 대자연의 진노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여기서 화합이란 공존의 가치를 인정하고 상생의 길을 찾으려는 태도를 뜻한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 중 한쪽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다른 쪽에 호소한다. ‘인간과 숲이 공존하며 살 수는 없는 건가요?’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같고, 러닝타임 내내 인간과 자연의 대립은 평행선을 달린다. 두 주체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은 채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는 산과 아시타카의 마지막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너는 좋아하지만 인간은 좋아할 수 없어.” 산과 아시타카는 가끔 숲에서 보자는 약속을 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완전한 화합을 이루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산과 아시타카가 다시 만날 여지를 남긴다. 공존의 가능성은 0이 아니라고, 따라서 노력해야만 한다고 호소하는 듯하다.


추방 Elimination

미야자키 하야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오무의 행진, 대자연의 심판 앞에 선 인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은 먼 미래, 고도의 과학 문명을 이룩한 인류가 ‘거신병’이라는 무기로 멸망한 뒤 1000년이 흐른 세계다. 자연이 파괴된 이후 지구는 ‘부해’라 불리는 숲과 숲의 식물들이 내뿜는 유독한 포자로 인해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됐다. 인간은 부해 근처에서 방독면 없이 5분도 버틸 수 없으며, 따라서 부해가 닿지 않은 곳에 도시를 만들어 겨우 문명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나우시카는 ‘바람계곡’이라 불리는 협곡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공주다. 바람계곡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도움으로 부해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 중 하나다. 하지만 어느날 서왕국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이 마을 근처에 추락하며 비극이 시작된다. 비행선에는 부해의 씨앗과 문명을 멸망시킨 장본인인 거신병의 알이 실려 있었다. 거신병을 부활시켜 세계를 평정하려는 목표를 가진 토르메키아는 군사를 보내 바람계곡을 점령하고, 나우시카와 마을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들인다.

한편 토르메키아의 숙적인 페지테 왕국은 토르메키아를 무너트릴 거대한 음모를 꾸민다. 숲을 수호하는 거대한 곤충인 ‘오무’를 이용해 왕국을 초토화시키려 한다. 페지테 병사는 오무 유충을 비행선에 매달아 오무를 자극하고, 분노한 무리의 방향을 바람계곡으로 향하게 한다. 나우시카는 토르메키아 군으로부터 탈출해 마을로 돌아가는 중 마을로 돌진하는 오무 떼를 발견한다. 나우시카는 오무 유충을 구해 무리의 앞으로 향한다.

분노한 오무 떼는 앞을 가로막은 나우시카를 날려버리고 파멸적인 행진을 계속한다. 하지만 마을과 충돌하기 직전, 무리는 멈춰선다. 오무 떼는 황금빛 촉수를 내뿜어 나우시카를 공중에 들어올린다. 이 광경을 전해 들은 마을의 예언가는 ‘그가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내려서리니’라는 고대의 예언을 떠올린다. 나우시카가 곧 대자연의 심판으로부터 마을을 구할 구원자였던 것이다.

풍차와 거신병, 기술에 녹아든 자연관의 대립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눈에 띄는 건 바람계곡의 자연관과 토르메키아의 자연관 간의 대립이다. 이 같은 대립은 극중 묘사된 두 과학 기술에 녹아들어 있다. 우선 영화 초반 바람계곡의 풍경을 비출 때 먼저 보이는 건 ‘풍차’다. 풍차는 자연에 맞서지 않고 자연의 힘에 순응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풍차는 인간이 에너지를 얻기 위해 고안한 기계이지만,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바람의 흐름을 이용하여 풍차의 날개를 돌리고 딱 필요한 정도의 에너지만 얻는다. 영화 속 토르메키아 군이 들이닥치지 직전 바람이 불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린다. 마을 사람들에게 바람은 생존과도 직결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풍차는 자연의존적이며, 공생과 조화를 중시하는 사상이 집약돼 있는 장치라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자연의 섭리를 극복하려는 토르메키아의 태도는 거신병이라는 존재에 담겨 있다. 극중 토르메키아 군은 거신병이 내뿜는 광선으로 돌진하는 오무 떼를 막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거신병의 파괴적인 공격을 보면 자연스레 ‘핵무기’가 떠오른다. 파괴력이 압도적이고, 파괴하는 대상을 가리지 않으며, 불안정해 다루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앞선 풍차의 사례처럼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면 거신병을 원자력발전소(원전)에 빗댈 수 있다. 원전은 자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첨단 과학 기술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전이 만들어내는 핵 페기물은 자연을 복구하기 힘든 수준으로 파괴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해, 독성 포자, 기형적인 모습의 벌레는 핵 페기물을 둘러싼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일격으로 도시를 박살낼 힘을 가진 거신병도 막지 못한 오무 떼의 돌진을, 나우시카가 몸을 던져 막아낸다. 맞서는 방식이 아닌,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방식으로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거신병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풍차는 단 한 대도 쓰러지지 않았다. 해답은 무력이 아닌 순응에 있었다.

나우시카, 다소 억지스러운 구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환경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써 1984년 발표 당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개봉 10주년 인터뷰에서 “당대를 반영하지 않는 예술작품은 없다”며 현실의 문제들을 작품에 반영하려 한 점을 드러냈다. 또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 일본 미나마타 항에서 발생한 수은 오염사건을 작품의 제작 배경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스크린 바깥 세상과의 접점도 놓치지 않으려 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다소 억지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영화를 견인하는 서사는 ‘징악’의 서사다. 인간의 무자비한 파괴와 착취에 대한 대자연의 복수다. 하지만 이 같은 거대한 인과의 굴레에 마침표를 찍은 건 한 소녀의 희생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구원이다. 앞서 탄탄한 구성으로 설득력 있게 전개돼 온 스토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성을 잃는다. 공생이라는 메시지를 녹여낸 건 좋으나, 절대선의 희생과 대승적 용서라는 메시아적 서사로 간단히 매듭지어 버린 건 아쉽다는 평가다.

몸을 던지기 전 나우시카는 오무 유충을 구해내고는 오무 무리에게 분노를 멈출 것을 호소한다. 하지만 오무 무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미 무리의 분노는 갈 길을 잃은 상황. 대상은 페지테 병사로부터 인류 전체로 확대된다. 이 장면은 인간이 결코 대자연을 통제할 수 없다는 당연하고도 잊기 쉬운 진실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또한 현실에서는 나우시카의 희생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는 추방의 서사, 인간에게 보내는 하나의 경고로써 기능한다.

대자연의 진노 앞에 인간은 불가역적인 파멸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때의 파멸은 교훈을 딛고 나아갈 후손조차도 남지 않는, 완전한 추방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는 거대한 오무의 허물을 발견하고는 마을에 가져갈 목적으로 투명한 눈 부분을 도려낸다. 그리고 잠시 쉬어가기 위해 그 허물 속에 들어가 눕는다. 그때 하늘에서 독성 포자가 눈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본 나우시카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유독하고 해로운, 없애 버려야 할 포자들이지만 오무의 눈을 통해 봤을 땐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이 글에서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을 말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기도 하고 공생을 꾀하기도 하며, 극적으로 추방을 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서술한 이야기들이다. 우리가 ‘독’이라 정의한 것들이 자연에게는 약일 수도 있고, ‘심판’이라고 호들갑 떨던 것들이 사실은 가치중립적인 자연의 섭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에 대해 논하는 일 자체가 착각이자 오만일지도 모른다.

위 작품을 모두 관통하는 자연의 성질은 ‘자정 능력’이다. 파괴된 자연은 본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움직인다. 파괴의 주범인 인간에게는 재앙의 형태로 다가오며 인간을 다시 세 갈래 길 앞에 서게 한다. 이제 애니메이션 속 인물들이 아닌 우리가 선택할 차례다. 파괴하고 정복할 것인가, 화합을 통한 공존을 꾀할 것인가, 경고를 무시하다 영원한 추방을 당할 것인가.

  • 타카하타 이사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지브리 스튜디오, 1994
  • 미야자키 하야오, <모노노케 히메>, 지브리 스튜디오, 1997
  •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지브리 스튜디오, 1984
  • 김용민 (2009). 『생태영화의 가능성』 문학과환경, 8(1), 183-206
  • 로헝 스트록 (2017). 『자연과 문화 그리고 적응의 노력』 생태환경과역사(3), 113-128
  • 이승재 (2016).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 투영된 생태론과 환경론 연구』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44, 183-209
  • 김종태 (2010).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자연과 인간』 한국문예비평연구, 32, 349-371

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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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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