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까지의 출판 시장,
한국인이 특히 사랑한 에세이
교보문고에는 가장 빈번히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학습과 교재’, ‘경제/경영/자기계발’, ‘소설/시/ 에세이’ 매대가 있다. 아마 그곳에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멈추었을 것이고, 그곳에 놓인 책들도 많이 팔렸을 것이다. 사실 출판 시장 통계를 보면 절대적으로 많이 팔리는 책은 학습지/교구/학습참고서 부문이다. 문체부가 2019년 발표한 <2018년 콘텐츠 산업 통계>에 따르면 도서출판 시장 매출은 총 3조 9,985억 원이고 이중 ‘교과서 및 학습서적 출판업’이 2조 8,287억 원, ‘서적출판업’이 1조 1,698억 원이다. 즉 도서출판 시장의 약 70%가 교재다.
우리가 흔히 ‘책’이라 여기는 ‘단행본’ 판매량은 전체 출판 시장 매출에서 보면 6.5% 남짓(단행본 매출 / 전체 도서 부문 매출 비율은 352,306/5,374,660, 단위 100 만원) 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 6.5%의 단행본 부문은 크게 경제/경영/자기계발서(이른바 ‘실용서’)와 소설/시/에세이, 그리고 인문/사회/교양서로 나누어져 있다.
<교보문고>와 <예스 24>는 매년 가장 많이 팔린 책들을 매년말 홈페이지에 발표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의 적어도 1/3은 ‘에세이’ 서가에 놓였던 책이었다. 그런데 서가에서 에세이의 범위는 대단히 포괄적이다. 경제나 사회 분야 분석이 짙으면 ‘경제 경영’ 또는 ‘인문 교양서’, 일상에서 느낀 ‘생각’이나 ‘감상’이 짙으면 ‘에세이’가 된다. 이 에세이 분야도 어떤 흐름이 있다.
매년 각 인터넷 서점이 발표하는 결산 자료에서 드러나는 2010년대 대중 에세이의 사조는 다음과 같았다.
- 2010년대 초반 ‘여행기’가 인기를 끌었다. 이병률, 한비야 작가가 대표적이었다.
- 이어서 ‘멘토가 조언을 건내는 형식의 힐링’(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으로 이어졌다.
- 멘토 발 힐링 열풍은 개인이 겪는 어려움의 구조를 지운다는 측면에서 기만적이었다. 때문에 개인들은 자기 자신에게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 2010년대 중반 이후 에세이는 ‘나’ 개인 내면에 보다 집중했다. 이 에세이들은 아래와 같은 경향들이 돋보였다.
- YOLO(you only live once : 인생은 한 번뿐, 그러니 ‘하고 싶은대로 해라’가 강조되는 내용)
- 우울, 무기력에 대한 위로와 자조(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등)
- 유명 캐릭터가 위로하는 비교적 가벼운 그림 에세이(곰돌이 푸 : 행복한 일은..류)
- 또한 작가가 인플루언서가 되고, 인플루언서가 작가가 되는 경향이 짙어졌다.(글배우, 박막례 등)
- 개인의 발견에 이어서 2010년대 후반에는 여성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경향도 짙어졌다.
또한 전체적으로 2010년대 말로 올 수록 에세이의 텍스트 분량은 계속 감소했다. 한국 에세이의 초창기 형태는 피천득 선생이 썼던 ‘수필’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옛 글에는 사유의 농밀함이 있었다. 그러다 2010년대 말 ‘에세이’로 올수록 생각은 사유보다는 단상으로, ‘나 외의 대상’은 관찰보다는 지나는 주변부처럼 담겨있게 되었다. (게다가 자기위안의 내용을 담은 책들은 표지에 인물들은 하나같이 누워있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와는 무관하게 2019년은 에세이의 해였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혜민 스님의 <고요할 수록 밝아지는 것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하정우 배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이국종 의사의 <골든 아워> 등 다양한 에세이가 사랑받았다. 또 전년도 출간된 에세이들이 계속해서 롱런하는 현상도 이어졌다. 2018년 종합 1위였던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는 에세이 분야 4위였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 <나는 내로 살기로 했다> 등 그림을 곁들인 비교적 분량이 적은 에세이는 계속 사랑을 받았다.
주목한 지점은 자기계발 분야의 상대적 약세였다. 2019년 예스24 전체 도서 판매 20위 중 자기계발서는 번역서인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 유일했다.
2020년 코로나 19와 판데믹,
바야흐로 경제적 자유와 돈의 시대
코로나 19는 우리 일상을 영구히 바꾸어 놓은 시대의 급진적인 변곡점이었다. 무언가를 배울 때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인줄 알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세계적 대유행으로 우리는 밖에서 하는 활동, 특히 함께 만나서 해야하는 활동에 큰 제약을 경험했다. 이른바 ‘집콕’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워졌다. 비대면 환경에서 콘텐츠 소비는 증가할 수 밖에 없었다. 넷플릭스의 이용자들은 한국에서 전년 동기간 대비 107.3%나 서비스를 많이 이용했다.(2020, 닐슨 코리아) 또 전 국민 83%인 4300만명이 한달 30시간 동안 유튜브를 보게됐다. 물론 2020년은 가장 전통적인 콘텐츠인 책도 23%나 더 많이 팔렸다.
책은 시대의 트렌드를 이끄는가.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하는가. <공산당 선언> 같은 인류사에 남을 희대의 서적이 아닌 다음에야 후자에 가까울 것이지만, 어느 쪽이든 책은 시대 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판 시장에서 드러난 2020년은 ‘돈’, ‘경제적 자유’, ‘자력갱생’(자기계발을 해석하는 필자식 표현)의 해였다. 작년 한 해 예스24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돈과 행운에 대해 고찰한 <더 해빙>이었다. 2위는 <해커트 토익 기출 보카>, 3위는 <돈의 속성>, 4위는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5위는 <김미경의 리부트>였다. 모두 경제 경영 또는 자기계발과 관련되는 책들이었다. 100위 권 종합 베스트 셀러로 범위를 넓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목할만한 현상은 100위 권내에서 에세이가 가장 많이 줄었다는 점이다. (2019년 13권→2020년 8권) 반면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자기계발(5권→9권)과 경제 경영(9권→13권)은 가장 많이 올랐다.
상위 20위 내로 좁히면 그 경향은 더욱 심해지는데, 예스 24 기준 20위 내 에세이는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밖에 없다. 교보 기준으로는 10위 내 단 2권만 에세이다. 예상 가능하듯, 최상위에는 자기계발이나 경영 경제가 있다. 물론 전년대비 책 자체는 더 팔렸기 때문에 에세이도 판매량은 더 늘었지만, 다른 분야의 판매 증가율이 훨씬 가파랐다. (2020년 예스24에 따르면 19년 대비 경제 경영은 43%, 자기계발은 32%, 대학교재는 100% 판매가 늘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 아니냐고? 언제나 그렇지 않았다. 근 2년간 베스트셀러 1위는 에세이였다. (2019 여행의 이유, 2018 곰돌이 푸…) 또 10위 권 내에는 인문 교양도 골고루 포진해있었다.
지표는 충분히 본 것 같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해석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2020년에 유독 ‘돈’, ‘경제적 자유’, ‘자력갱생’에 더 주목하게 되었을까? 판데믹은 경제, 사회 제도에서 불확실성을 크게 증가시켰다. ‘불확실성’이란 말 그대로 계량이 극히 어려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 개인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더욱 불안해진다. 이럴 때일 수록 ‘확실한 것’에 대한 욕구는 커진다. 다른 많은 것들이 무너져도 돈만은 확실해보인다. 경제학원론이 말하듯 돈은 ‘가치 표시의 수단’이니, 숫자로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높아지는 파고에서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정말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본다. 비대면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돈버는 방법’은 투자다. 더욱이 10년전 글로벌 금융 위기때 매수하고 ‘존버’(매우 버틴다)한 사람들은 큰 수익을 거뒀다. 이때의 학습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2020년 개인투자자들 이른바 ‘개미’들은 유례없는 역대 최다 매수를 했다. 개미들은 국내 시장에서 64조원을 매수했고, 해외주식은 20조원 어치를 샀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2020 한국 예탁 결제원) 이 원고를 쓰고 있는 2021년 2월인 지금. 바로 옆 테이블에서 ‘가치투자’와 ‘단타’라는 주제가 들려온다. 내 기억에 경영학과 출신인 나조차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여간해서는 없는 일이었다.
자연히 에세이 시장에서도 ‘나’에 대한 심리적 인식과는 다소 다른 ‘돈’에 대한 자각이 돋보인 에세이도 출간됐다. 종합 예술인 이랑 작가는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를 냈고, 에세이스트 김얀 작가도 <오늘부터 돈독하게>를 출간했다. 그들은 모두 ‘순수’ 에세이를 쓰던 사람들이었다. 김얀 작가는 2019년말 은행에서 산정한 연 소득이 500만원이 안된다는 것이 큰 실체적 위기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후 김얀 작가는 돈에 관심을 보다 기울이게 되었는데,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을 브런치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돈’에 관한 연재를 올린지 불과 3주 만에 복수의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대중의 반응도 뜨거워서 김얀 작가는 불과 6개월 만에 브런치 구독자 4천명을 모았다. 주목할 지점은 언급한 두 책들을 낸 출판사가 변화에 보수적인 <창작과 비평>이라는 점이다. 가장 보수적인 출판사에서 내는 에세이에서조차 ‘돈’은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소재가 된 것이다. 에세이의 내용이 변침하고 있다고 할까. 경제적 자유를 향한 유례없는 개인들의 관심이 여러 방면에 걸쳐 출판시장에서 반영되었음이 분명하다.
2021년은? ‘돈과 경제적 자유’
흐름은 이어지겠지만, 새로운 지평도 있을 것
출판시장의 돈과 경제적 자유에 대한 관심은 계속 될 것이다. 다만 이 관심은 그간 둔감하던 또다른 영역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돈에 대한 인식은 냉철한 자기 인식으로 이어진다. 돈은 자신이 누구인지 특히 어디에 서있는지 자신의 경제적 토대를 자각하게 한다. 투자를 하다보면 결국엔 ‘시드’(이른바 종잣돈, 초기 자산을 의미한다.)가 커야 했구나 자조하게 된다. 그런데 개인이 보유한 시드는 자신이 서있는 사회/ 경제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돈과 경제적 자유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개인이 속한 사회과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지 않을까? 이러한 인식이 우리가 서있는 사회 구조와 세계의 문제를 함께 고치자는 연대로 드러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조적으로 말하는 “저는 0수저입니다.”는 구조를 자각하는 가장 첫 단계가 아닌가 싶다. 또 이 흐름을 반영하는 책들도 나올 것으로 본다.
마침 2020년 연말 주목할만한 책이 세상에 나왔다. 사회학자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은 돈에 대한 관점, 에세이 장르에 관한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 <가난의 문법>은 사회학의 눈으로 관찰한 (특히 여성)노년의 가난을 자신의 주관은 마치 에세이처럼, 관찰 대상인 노년의 삶은 리얼리즘 소설처럼 풀어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돈’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노동/투자/사업 소득 극대화를 이뤄낼 것인가이다. 누군가는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의 미래가 아니다. ‘돈이 없는 노년’들은 그들의 잘못이나 의지로 가난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난’이 굶어죽고 얼어죽는 것이라면, 책이 담담하게 말하는 가난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다가올 수 있는 미래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계속 노동해야하는 노년의 삶. 움직이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고 떠오를 수 없는 부레없는 원시 어류같은 삶. ‘경제적 부자유’는 어쩌면 꽤나 많은 이들에게 예정된지도 모른다.
돈이 드러내는 자신과 그 자신이 선 토대에 대한 자각은 어떤 관심으로 이어질까? 2021년 2월 현재까지 베스트셀러에서 드러나는 관심은 여전히 ‘주식’과 ‘경제적 자유’, ‘앞으로 뒤바뀔 세상의 모습’이지만, 사회통계를 활용해 문제인식을 강하게 드러냈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 앞으로도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외면하던 것을 직시하는 책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2021년 에세이와 문학 서가에 놓일 책들을 주목하라. 새로운 지평을 열 책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백원근,‘한국의 분야별 출판시장 현황’, K-book, 2019.12.9
- 2020 대한출판문화 협회, 2019년 출판시장통계, 30p
- 2019 교보문고,예스 24 연간 베스트셀러 결산
- 2020 교보문고,예스 24 연간 베스트셀러 결산
- 2019 문화체육관광부, 2018년 콘텐츠 산업 통계
- 조선일보, 못말리는 한국인의 유튜브 사랑…4300만명이 한달 30시간 본다, 2020.10.8
- 넷플릭스, 유튜브 관련 통계는 2020 닐슨 코리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