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건축의 거장,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가 지난 12월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우리나라와도 친숙한 인물인데요. 바로 여의도 복합단지 파크원을 초기 설계한 주인공이기 때문이죠. 밀레니얼 세대의 집합소라고도 불리는 더현대서울의 시그니처인 빨간색 기둥이 바로 그의 건축 아이콘 중 하나입니다.
그는 새로운 건축을 할 때마다 기존 건축 환경의 풍경보다는 혁신을 통해 도시의 모습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왔습니다. 특히 내부에 있어야 할 건축의 구조물을 과감하게 밖으로 드러낸 ‘하이테크’ 건축 사조를 이끌며 현대 건축의 미적 관점을 신신 적으로 바꾼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죠.
모더니즘에 인권과 미학을 더한
포스트모더니즘
하이테크의 태동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이전에 유행이었던 모더니즘 건축을 살펴보면 좋습니다. 모더니즘의 기본 명제는 ‘효율’, 즉 ‘합리성’입니다. 모든 건물은 토지의 활용도를 집약적으로 구현해야만 했고, 일절의 장식이 없어야만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요. 이들은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윤리적이라는 명분을 독점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건축의 흐름을 주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전후해서 기존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원성이 사회 전반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며, 곧 세계적으로 신신 건축의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하게 되죠. 리처드 로저스가 이끌었던 하이테크 사조 역시, 이 시기 태동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갈래였습니다.
건물에 유동성을 불어넣는
리처드 로저스의 하이테크
리처드 로저스는 모더니즘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르코르뷔지에의 기계적인 건축 기능주의에 인권존중과 건축미학을 포함하며 그만의 건축 세계를 펼쳐 나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는 하이테크 건축을 ‘기존 건축에서 시도되지 않던 새로운 기술과 엔지니어링을 바탕으로 건축의 기능, 재료, 구성, 시공법을 새롭게 구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요.
실제로 그는 실내에 있어야 하는 구조물을 과감하게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건물의 정상적인 유지관리를 위해 각종 설비 배관은 천정이나 실내의 자투리 공간에 숨겨져 있던 반면에, 로저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실내 공간과 이러한 설비 공간을 평면상에 적절히 교합된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하죠.
그렇다면 그는 왜 설비 라인을 외부 디자인 요소로 노출했던 걸까요? 그의 주된 관심 사항은 바로 건축의 역동성이었습니다. 건축이라는 정지된 3차원의 공간에 생명체 같은 유기성을 추구했던 것인데요. 건물의 내부 시설을 외부로 이동하며 건물 밖의 사람들에게도 흐름을 허용했고, 동시에 이들이 건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이끌며 공간의 개방성과 운동성을 모두 확보하게 됩니다. 단순히 새로운 재료와 기계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건물 자체를 움직이는 유기체로 치환한 셈이죠.
그는 외부 세계와는 개방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실내 공간에는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했습니다. 최첨단 기술로 설비를 노출했지만 이는 기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 사람들이 가용할 수 있는 내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우리 삶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 건축은 삶과 도시에 영감을 주고, 도시를 구성한다”라고 한평생 강조해왔던 그의 철학 기저에는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죠.
기존 미술관의 고전성을 깬
파이프 건축물, 퐁피두 센터
리처드 로저스는 1968년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렌초 피아노와 만난 이후 자신만의 본격적인 하이테크 건축 사조를 키워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합심한 둘은 1977년, 하이테크 사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퐁피두 센터를 선보이는데요.
파리의 퐁피두 센터는 기존 미술관 혹은 박물관이 가지고 있던 고전적인 분위기를 과감하게 탈피합니다. 두꺼운 파이프가 튀어나와 있는 퐁피두 센터의 파격적인 디자인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한 파리에선 매우 이질적이었는데요. 기존 건물들이 갖고 있던 엘리트주의적 아우라를 보란 듯이 무너뜨린 것이죠.
그는 보통 건물 안에 설치하는 에스컬레이터, 수도관, 전기배관을 의도적으로 건물의 외벽에 배치했으며 그 자리를 벽이 없는 넓은 공간으로 대체했습니다. 축구장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공간이지만 화장실과 소방법규에 따른 방화 셔터를 제외하면 벽을 두지 않았는데요. 복합문화센터를 지향하는 공간이니만큼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필요 때문에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벽이 없는 넓은 공간을 구획한 것이죠. 덕분에 사람들은 미술관, 디자인 센터, 도서관 등 서로 다른 기능들을 조화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존의 공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50년 이후를 내다본
공간의 유연성, 로이드 빌딩
1978년, 리처드 로저스는 세계적인 보험회사인 로이드의 신사옥을 담당합니다. 사업 확장에 따라 신사옥이 필요하게 됐던 것이 그 이유였는데요. 그는 퐁피두 센터에 적용했던 기본적인 디자인 아이디어를 로이드 빌딩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로이드 빌딩의 외관을 보면 급배수, 소방, 전기, 냉난방 배관을 건물 외부로 나열하듯이 노출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치 퐁피두 센터의 모습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 또한 실내 전용 면적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한 그만의 독특한 전략이었습니다. 실제로 ‘건물이 지어지고 50년 동안 회사가 새로 필요하게 될 공간을 미리 고려해야 한다’는 로이드 빌딩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을 명쾌하게 해결했다는 점에 있어서 오늘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큰 사각형 모양의 건물은 중심이 천장까지 뚫린 대형 홀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건물의 구조물이 배치되어 내부 공간을 완전히 비울 수 있었고, 그 결과 사용자가 자유자재로 공간을 바꾸며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건물을 설계할 때부터 공간의 유연성에 초점을 두었기에 가능했던 방식이었죠. 그뿐만 아니라 건물 13층 높이의 거대한 반 원통형의 둥근 유리 지붕을 설치해 내부에서도 자연 채광을 극대화하며 외 내부를 획기적으로 연결한 사례로도 호평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못생긴 노란색 기둥에
숨겨진 비밀, 밀레니엄 돔
그리니치에 있는 밀레니엄 돔(현 O2 아레나)은 새천년을 기념하고 런던, 나아가 영국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든다는 정책하에 지난 2000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100m 높이의 기둥 12개로 지지가 되고 그 지름이 365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지붕 구조체로서 30,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전시 및 공연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곳 역시 기괴한 디자인으로 세간의 논쟁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포브스가 선정한 못생긴 건물 상위 순위에도 오른 역사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건축물이지만, 밀레니엄 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노란색 마스트 기둥 역시 하이테크의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됐던 디자인이었는데요.
해당 건축물에는 돔 구조물 내부에 크레인을 들여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삐죽 솟아난 노란색 기둥은 위험한 고소 작업량을 줄이기 위해 선택한 대안이었죠. 외부에서 보이는 마스트 기둥과 돔 형태의 케이블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기본 골조를 이룬 다음, 기둥 꼭대기에 장착된 유압잭과 원치로 망을 동시에 달아 올리며 천막 구조의 지붕을 구현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붕의 창과 마스트 기둥의 팬을 설치해 환기 이슈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며 30,000명이 넘는 일시 관람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시켰습니다. 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그 공간을 사용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죠.
리처드 로저스가 타계한 이후 그와 함께 활동했던 또 하나의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는 “그는 건축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고 전했습니다. 대리석으로 미술관을 지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람들이 더욱 즐길 수 있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공간을 만들었던 그의 철학은 사회에 팽배해있던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었죠. 이번 글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탐색하며 걸어온 리처드 로저스의 발자취를 톺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