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예술일까

예술인가 비즈니스인가
패션의 현 위치에 대한 고찰
Edited by

헨릭 빕스코브를 아시나요

모형들과 같이 천장에 걸려있는 옷 두 벌
이미지 출처: thenumber4
검정, 흰색 줄무늬 원형 속에서 걷고 있는 모델
이미지 출처: thenumber4
사람 얼굴 모양의 옷
이미지 출처: thenumber4
매우 크게 부풀어있는 분홍 치마와 검정 원형
이미지 출처: thenumber4

오늘은 몇 장의 사진들로 위클리의 포문을 열어봅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멋지다’, ‘저게 옷이야 퍼포먼스야’, ‘어떻게 만들었지’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요. 와중에 아마 많은 독자분들께서는 ‘예술적이다’라는 느낌을 주로 받으셨을 겁니다.

이 사진들은 패션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인 헨릭 빕스코브(Henrick Vibskov)의 작품을 촬영한 것입니다. 헨릭 빕스코브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매년 컬렉션을 발표하는 유일한 북유럽 출신 디자이너인데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또한 패션 뿐만 아니라 사진,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순수예술의 영역에서도 꾸준한 작업을 진행해왔고,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의 전시들을 통해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했죠. 2015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헨릭 빕스코브 전의 부제 또한 ‘패션과 예술,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트’였습니다.

이쯤 되니 궁금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패션과 예술 그 사이의 경계에 있는 그를 우리는 무엇이라 칭해야 할까요? 패션 디자이너? 예술가? 멀티 크리에이터?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창작을 이어왔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그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예술가’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빕스코브에게 패션은 다양한 예술적 영감과 관심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도구이지만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에 비춰보았을 때 패션은 자유로운 표현을 위한 매체보다는 입기 위한 옷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개념과 패션의 개념

패션은 예술일까요, 예술이 아닐까요? ‘예술’대학 ‘의상’학부를 나온 에디터는 학창 시절 내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단순한 듯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 이유는 예술과 패션의 정의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2월 13일 발행된 주현우 에디터의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는 예술의 정의가 시대에 따라, 또 그것을 규정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럼 예술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죠. 예술(art)의 어원은 그리스어인 ‘테크네(techne)’입니다. 테크네(techne)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제작 활동 일반과 그러한 활동과 관련된 실용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예술과 기술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죠. 다만 인문학적, 자율적으로 훌륭한 기술과 통속적이고 범상한 기술을 분리해 각각 ‘리버럴 아트(liberal art)’와 ‘크래프트(craft)’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대 예술의 개념은 그리스 후반부터 중세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리버럴 아트(Liberal art), 즉 자유기예에는 문법, 수사학, 변증술,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지 출처: Value Colleges, 리버럴 아트(Liberal art), 즉 자유기예에는 문법, 수사학, 변증술,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면 ‘리버럴 아트(liberal art)’와 ‘크래프트(craft)’의 격차가 심화됩니다. 이러한 구분은 18세기에 이르러 유미주의 사조와 맞물리면서 극대화 되었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예술’하면 흔히 떠올리는 회화, 문학, 건축, 음악 등의 장르는 바로 이 18세기에 근대적 예술체계를 성립시킨 샤를르 바퇴(Charles Batteux)가 정의한 ‘파인아트(Fine Art)’의 범주 안에 속해 있는 것들입니다. 그는 수공업, 기능성이라는 고대의 틀을 벗어나 순수한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들을 모아 파인아트, 즉 순수미술이라 불렀고 여기에는 시, 음악, 회화, 조각, 무용, 건축이 포함되었습니다. 이후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가 파인아트의 범주를 회화, 조각, 건축, 시, 음악으로 재정의하며 그 개념을 확정 지었죠.

예술 개념의 변화에 따라 살펴본다면, 패션은 ‘옷을 만든다’는 수공업적 측면에서 고대에는 엄연히 예술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가 근대로 오면서 해당 범주에서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여러 검정 옷
이미지 출처: The Creative Exchange

그렇다면 과연 패션은 무엇일까요? 어느 특정한 감각이나 스타일의 의복 또는 복식품이 집단적으로 일정한 기간에 유행할 때 이를 ‘패션(fashion)’이라 하는데요, 사실 패션은 복식에만 한정된 개념이 아닙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알 수 있듯 패션은 ‘복식을 중심으로 한 유행 현상 그 자체’를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옷, 의복, 피복, 복식 등 패션과 혼용되는 다양한 용어들과 패션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동반한 유행이라면 굳이 의복이 아니더라도 패션의 범주 안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죠.

이처럼 예술, 그리고 패션의 정의는 가변적이며 관점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그렇게 때문에 앞서 던진 ‘패션은 예술일까요, 예술이 아닐까요?’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답변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패션은 예술이다 – 근대예술의 순수성을 벗어난
현대예술의 관점에서

패션이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근대적 미학의 틀을 패션에 적용하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술의 순수성만을 무조건적으로 중시하지 말고 현대미학에서 새로이 대두된 예술의 속성을 중심으로 패션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이죠.

근대예술의 순수성 개념은 20세기 현대예술의 등장과 함께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현대예술은 근대예술이 배제한 실용성을 다시 불러들였고 그 외에도 촉각적 공감각성, 일상성, 일시성이라는 새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확장된 현대예술의 속성은 패션의 미적 경험과 연관된 패션의 주요 속성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비예술로 인지되었던 패션이 예술의 영역으로 수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 촉각적 공감각성

검정 배경 속 팔과 다리의 육체 흑백 사진
이미지 출처: Alexander Krivitskiy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예술을 옹호하던 근대에서 영원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육체는 그 존재가치가 미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몸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는 패션은 자연스레 예술과는 다른 영역으로 구분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현대예술은 미적 경험에 있어 몸의 역할에 보다 체계적인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루어져 온 시지각에 의지한 이차원적 예술 감상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시각, 청각, 촉각, 나아가서는 인간의 몸 자체에까지 확장되었고, 이를 통해 공감각적인 예술 체험이 가능해졌죠.

경험의 장으로서의 몸을 통한 감각적 인지를 속성으로 갖는 현대예술은 몸을 표현의 매개로 삼아 폭넓은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패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2) 일상성

패션은 인간 의식주의 하나이자 일상생활의 필수적 도구로 여겨지곤 합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패션 에디터로 불리는 다이애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는 패션이 일용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실용품이기에 패션은 예술일 수 없다고 보았는데요, 이러한 주장은 예술이 이상적 가치를 지닌 현실 너머의 고귀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과 일상의 분리는 19세기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칼 마르크스(Karl Marx), 그리고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에 이어 20세기 존 듀이(John Dewey)와 슈스터만(Richard Schusterman)등에 의해 비판받게 됩니다. 예술의 일상성에 주목한 듀이는 ‘미적 반응은 일상생활에서 이미 존재하는 감정을 강화하고 크게 통합하여 이어가는 것’이라 말했고 슈스터만 역시 순수예술이 지닌 고립성과 난해성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며 삶이 예술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라 주장했죠.

우리 모두를 각자의 삶에서 예술을 실천하는 ‘실행하는 예술가’로 보았던 슈스터만의 시각에서 패션은 일상의 미적 경험이 몸과의 유기적인 통합 속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확장된 현대예술의 범주 아래 수용될 수 있습니다.

3) 일시성

패션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대와 유행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죠. 계절과 기후의 변화, 그리고 사회 내에서의 계속적인 재합의는 패션이 필연적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예술 비평가 부드로(Michael Boodro)는 패션의 일시성이 예술의 영원성에 반하므로 패션과 예술은 구분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는데요, 이처럼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에서 예술작품이 지니는 영원성은 예술만의 독자적인 가치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미국의 설치미술가 로버트 모리스(Rober Morris, 1931-2018)의 반형태(anti-form)작품 중 하나로 펠트 소재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력에 의해 천이 땅으로 내려오게 되고 작가는 이를 통해 작품의 시간성, 그리고 그에 따른 형태의 변화를 강조하고자 했다.
이미지 출처: Milena Olesińska, 미국의 설치미술가 로버트 모리스(Rober Morris, 1931-2018)의 반형태(anti-form)작품 중 하나로 펠트 소재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력에 의해 천이 땅으로 내려오게 되고 작가는 이를 통해 작품의 시간성, 그리고 그에 따른 형태의 변화를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해프닝이나 퍼포먼스 아트, 프로세스 아트, 대지미술, 설치미술 등의 현대예술에서는 행위에 따른 일시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마치 연극처럼 일회적인 성질을 가진 이들 아방가르드 미술의 출현은 예술의 영구성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예술의 일시성과 마찬가지로 패션의 유행에 따른 일시성은 더 이상 그것을 예술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겠죠.

4)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 – 패션의 상업성과 대량생산 시스템

하지만 이와 반대의 입장도 존재합니다. 패션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가장 큰 논거는 패션의 상업성과 대량생산으로 인한 낮은 희소성입니다.

I HAVE NOTHING TO WEAR 흰색 티셔츠와 밑에 있는 여러 옷
이미지 출처: Sparkle and the City

현대의 패션산업은 20세기 후반 대량생산 시스템의 구축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기성복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며 자사의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소비자들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트렌디한 제품들을 기계적으로 찍어내기 시작했죠. 그 결과 우리는 매 시즌, 매달, 심지어는 매주 새로운 옷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현대예술 역시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패션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패션은 태생 자체가 대중적인 산업을 기반으로 합니다. 따라서 미적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인 역시도 대중의 소비를 전제로 한 상업적 예술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 패션과 예술을 구분하는 이들의 논리입니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작가가 순수한 창작 의지를 가지고 만든 인간 행위의 창조물이자 자기표현의 통로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예술가와 패션 디자이너의 작업은 예술적 영감과 동기라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패션업계의 대량생산 시스템 내에서는 이러한 예술적 영감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사적인 창작물이라면 브랜드의 홍수 속에서 기계적으로 복제, 생산되는 패션제품은 자기 상징도 미적 표현도 아닌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유니클로 티셔츠
이미지 출처: 유니클로 코리아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이 흰색 무지 티셔츠는 유명 SPA브랜드 OOO에서 만든 것입니다. 해당 브랜드는 전 세계에 유통판로를 보유하고 있죠. 아마 이 티셔츠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 역시 매우 많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고 했을 때, 이 티셔츠를 착용함으로 인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적게는 몇십 명, 많게는 몇백만 명이 지니고 있을 이 흰색 티셔츠로 개인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이처럼 소비자들은 이미 획일화된 제품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제품을 선별하려 노력하지만 대량생산 시스템 내에서는 그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패션을 예술로 수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패션의 예술적 가치가 상업적 가치를 절대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나가며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패션이 예술의 범주 안에 수용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그것이 현대예술과 촉각적 공감각성, 일상성, 일시성이라는 속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시각적 형식을 가진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와 오늘날 패션의 지나친 상업성과 창조성 결여를 이유로 이에 반대하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패션이 예술의 범주 안에 수용될 수 있는지 여부는 그것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창작되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떠한 용도로 사용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가의 순수한 창작 의지와 현대 패션 시스템 내에서의 이윤추구 중 어느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에 따라 패션은 예술이 될 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내리기 나름일 것입니다.

글을 마치려고 보니 학부 1학년 때 수강했던 「조형예술미학」 강의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예술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패션이요’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했던 에디터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패션은 예술이 아니라는 교수님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뒤이어 ‘그런데 의상학과는 왜 예술대학에 소속돼 있나요?’라는 다소 맹랑한 발언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기억이 나네요.

만일 그때로 다시 돌아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이제는 다르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던지셨던 질문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모든 가치에 관대한, 그리고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이 전개되고 있는 현대에 와서는 말이죠.

  • 서승희 ・김영인, 현대예술 확장에 의해 예술로 수용된 패션의 본질적 속성, 한국복식학회, 2013, 63(6).
  • 이예영, 예술로서의 패션 – Morris Weitz의 ‘예술에 대한 열린 개념’을 중심으로, 대한가정학회, 2007, 45(1).
  • 전재훈, 패션은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 (201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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