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ARY
OF ART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
3가지 관점으로 예술의 경계를 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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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현대 미술관(MoMA)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친구들과 놀러 온 한 고등학생이 바닥에 작품인 척 자신의 안경을 벗어두고 관람객들의 반응을 실험했는데, 모두가 속아넘어간 것이다. 모여든 관람객은 바닥에 놓인 안경을 바라보며 심오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바닥에 엎드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종종 회자하곤 하는 이 ‘웃픈’ 해프닝은 현대 미술에 대한 회의를 넘어,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바닥에 놓인 안경을 사진을 찍는 사람
Photo by Kevin Nguyen

반세기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스웨덴의 기자인 오케 악셀손( ke Axelsson)은 동물원의 침팬지에게 붓과 물감을 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뒤 괜찮은 그림들을 모아 ‘피에르 브라소(Pierre Brassau)’라는 가상의 화가를 내세워 ‘침팬지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을 초대했는데, 아무도 침팬지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눈치 못 챘을뿐더러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극찬을 했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 번 맞춰보길 권한다. 아래 두 그림 중 무엇이 인간의 그림인가.

피에르 작품 1
피에르 작품 2

정답은 둘 다 아니다. 두 그림 모두 피에르의 작품이다. 어떤가. 이 정도면 침팬지의 그림도 예술로 인정해줄 만 하지 않은가. 이처럼 현대 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도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중요했다. 아니, 사실 이 질문은 예술사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마다 철학자들은 나름의 답을 제시했지만, 시대가 달라지며 정답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예술과 비예술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몫이 됐다. 하지만 다원주의와 현대 미술의 난해함이 극한으로 치달은 오늘날엔 보편적인 답을 내리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 답은 예술을 소비하는 개개인이 내려야 한다.

Wikimedia Commons, Pierre Brassau
Wikimedia Commons, Pierre Brassau

필자는 미술관에 가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예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무슨 예술의 기준을 논하냐고 묻는다면, 앞서 말한바, ‘이젠 개개인이 답을 내려야 하는 시대니까’라 하겠다. 아래는 초짜 예술가가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경계를 짚어가는 과정이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수준이지만 너그럽게 봐주었으면 한다. 이 글에선 조지 디키의 <예술제도론>을 바탕으로 평가적, 분류적 의미에서의 예술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윤리적 관점에서 예술의 경계를 살펴볼 것이다.


I. 평가적 의미에서의 예술

예술 :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국어사전의 정의대로라면 예술 작품은 ‘특별하고’ ‘아름다운’ 무엇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무엇이 특별하고, 무엇이 아름다운가’일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전적 의미에서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별하다는 건 보통의 것과 구별되는 특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당장 떠오르는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먼저 마르셸 뒤샹의 변기는 나머지 수많은 변기와 무엇이 다른가. <샘>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변기엔 뒤샹만의 독창적인 철학이 담겨 있다. 또한 도화지에 붓으로 한 획 그었을 뿐인 이우환 화백의 <조응>은 어떻게 17억 원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 한 획을 긋기 위해 기나긴 인고와 번뇌의 시간을 견뎠음을 우리는 안다. 이처럼 예술가의 철학과 시간이 녹아든 작품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이는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한 자격과도 같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얼마만큼 철학을 담고, 얼마만큼 시간을 들여야 예술 작품이 되는가. 특별함의 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Marcel Duchamp(1887-1968). Fountain. 1917. replica 1964
Marcel Duchamp(1887-1968). Fountain. 1917. replica 1964
이우환(1936-). 照應(조응). oil on canvas. 130 x 161. 1994
이우환(1936-). 照應(조응). oil on canvas. 130 x 161. 1994

아름답다 :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 과 만족을 줄 만하다.

아름다움에서 강조되는 건 ‘균형과 조화’ 그리고 ‘즐거움과 만족’이다. 이 둘이 인과관계로 이어질 때 우리는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단 균형과 조화를 이뤘지만 따분한 작품이 있다. 누군가는 정교한 화음을 갖춘 클래식을 지루하다고 여긴다. 반대로 조화롭진 않아도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작품이 있다. 누군가는 도화지에 물감을 대충 휘갈긴 듯한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며 전율을 느낀다. 클래식과 폴록의 그림. 당신은 이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아니라면 이들은 예술이 아닌가. 이처럼 아름다움은 주관적이어서 이를 토대로 보편적인 정의를 내리긴 힘들다. 예술의 범주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Jackson Pollock(1912-1956). Number 1A. oil and enamel paint on canvas
Jackson Pollock(1912-1956). Number 1A. oil and enamel paint on canvas. 172.7 x 264.2. 1948

국어사전의 정의를 토대로 했을 때 예술과 비예술을 가르는 건 특별함과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수긍할 만한 범주를 정할 수 없었다. 특별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척도는 사람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의 분석철학자 조지 디키(G.Dickie)의 고민도 비슷했다.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범주를 정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좌절됐다. 이는 평가적 의미(Evaluative Sense)에서의 예술이 가진 한계였다. 그는 주관적인 평가를 배제한, 또다른 틀을 제시한다.


II. 분류적 의미에서의 예술

디키는 평가를 배제하고 분류적 의미(Classificatory Sense)라는 또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분류적 의미에서 어떤 작품을 예술로 규정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 이 필요하다. 첫째, ‘인공성(Artifactuality)’을 갖춰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가공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쓰던 침대를 그대로 전시한 트레이시 에민의 <나의 침대>라는 작품은 인공성을 갖춘 걸까. 디키는 예술가가 어떤 사물을 미술 전시회 안으로 끌고 온 노력도 인공성의 획득으로 인정했다. 먼저 예시로 든 마르셀 뒤샹의 <샘>도 마찬가지로 인공성을 얻었다. 디키는 예술 작품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요건을 정의했다. 하지만 이런 느슨한 틀로는 예술의 범주가 끝도 없이 넓어지고 말았다. 좀 더 엄격한 조건이 필요했다.

Tracey Emin(1963-). My Bed. 1998
Tracey Emin(1963-). My Bed. 1998

둘째, ‘감상의 후보의 자격 수여’를 받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술계(Art Circle)’가 어떤 작품을 감상의 대상이라고 인정해야 예술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선 예술계는 미술 평론가 아서 단토 (Arthur Danto)의 논문에 등장한 개념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당대 예술가들의 통념’이라 정의할 수 있다. 단토는 그의 저서에서 “뭔가를 예술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통해 알아낼 수 없는 이상의 무엇, 즉 예술 이론의 주변 상황, 예술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예술계”라고 말했다. 김유미 큐레이터는 ‘예술 작품과 비예술 작품의 차이는 예술계 안에 들어올 수 있는가 없는 문제이며, 이는 곧 이론가나 비평가가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결국 예술계는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의 통념이며, 이로써 디키는 전문가의 권위가 개입될 여지를 제공한다.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이 될 수 없는 건 무엇일까. ‘인공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예술이 될 수 없는 건 없다. 필요한 건 오직 작품을 전시하겠다는 의지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상 후보의 자격’ 문제로 넘어갔을 때 많은 작품이 탈락한다. 예술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은 예술을 어느 정도 이해한 이들이 정하는 것이며, 이들에게 감상 후보 자격을 수여받은 작품만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III. 윤리적 관점에서 본 예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을 규정하려는 시도마저 한계에 부딪힌다. 너도, 나도 예술가를 자처하며 ‘탈권위’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들은 기성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각자도생으로 나아갔다. 독립 예술의 시장이 점점 커지는 건 예술계가 구심점을 잃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모든 게 예술인 시대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 걸까. 아니다. 윤리, 즉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상식의 범주가 마지노선으로 남았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에서 살인은 허용된다. 총으로 쏴 죽이든, 칼로 썰든, <쏘우> 시리즈에 나올 법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연출이니까. 살인은 대중 예술의 일부로서 인정하고 용인된다. 하지만 ‘동성애’라는 금기가 풀린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동성애 행위는 물론 표현하는 행위도 금지됐던 시대에서 이제는 억지로라도 동성애의 서사를 넣지 않으면 반발에 부딪히는 시대에 이르렀다. 인권의식이 성장하며 예술의 경계가 확장된 것이다.

Ang Lee (Director). (2005). Brokeback Mountain [Film]
Ang Lee (Director). (2005). Brokeback Mountain [Film]
Luca Guadagnino (Director). (2017). Call Me by Your Name [Film]
Luca Guadagnino (Director). (2017). Call Me by Your Name [Film]

한편 용인되지 않는, 절대로 금기시되는 주제도 존재한다. 영화 ‘더 스퀘어’에선 소녀를 폭탄으로 터뜨리는 영상을 광고를 냈다가 엄청난 욕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현실에서 이런 광고를 냈다간 기업이 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소아성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연출이라 해도 극장에 내걸리는 순간 감독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이 용인할 수 없는 건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 남은 경계는 오직 그뿐이다.

Ruben Östlund (Director). (2017). The square [Film]
Ruben Östlund (Director). (2017). The square [Film]
아이유 앨범

E. BOUNDARY OF ART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살펴봤다. 국어사전을 토대로 예술을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갖춘 활동과 작품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기준이 달랐고, 이는 평가적 의미에서의 예술이 가진 한계였다. 조지 디키는 분류적 의미에서의 예술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해 이를 극복했다. 디키는 ‘인공성’을 갖추고 및 예술계로부터 ‘감상 후보로서의 자격 수여’를 받은 작품을 예술로 규정했다. 하지만 탈권위의 시대 속 예술계는 구심점을 잃었고,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을 규정하는 시도 역시 한계에 부딪혔다. 이로써 모든 경계는 허물어졌고, 남은 건 ‘윤리’라는 마지노선이었다. 따라서 앞서 강조한 바, 이제 답은 예술을 소비하는 개개인이 내려야 한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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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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