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우리의
예술 출판

‘함께하기’를 위한
네트워크로서의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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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비교 문학 연구자 카린 리타우(Karin Littau)는 저서 『책 읽기의 이론』(2006)에서 ‘책은 인간의 신체를 제외하고 지식의 저장, 검색, 전달에 사용된 가장 유구한 매체’라고 말한다. 이러한 책을 만드는 ‘출판’은 말 그대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엮어 세상에 내보내는 만국 공통, 인류 공통의 가장 오래된 프로젝트이자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세월, 예술과 출판은 서로가 서로의 콘텐츠이자 형식이 되며 불가분의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번 그레이에서는 예술에 대한, 혹은 예술에 의한 출판인 ‘예술 출판’을 매체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문화를 생산하는 이들과 향유하는 대중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책은 여전히 힘이 세다

모든 정보와 시스템의 디지털화가 문명의 주안점이던 과도기를 지나, 이제 우리는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그것을 이용한 사회 발전을 무조건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 세상을 인간적으로 영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시대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한 지금, 사람들은 여전히 책이라는 매체를 믿는다. 책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던 인터넷의 보급 이후, 책은 종이책부터 전자책에 이르기까지 그 형식과 유통의 방식이 다양해졌을 뿐, 사람들은 아직도 출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증거의 하나로 지난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닷새간, 36개국 530개 출판사가 참여한 제65회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렸다. 2022년에 1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동원했던 도서전은 올해도 성황을 이뤘다.

2023 서울국제도서전의 ‘책마을(독립출판・아트북)’ 코너 전경
2023 서울국제도서전의 ‘책마을(독립출판・아트북)’ 코너 전경, 이미지 출처: 국민소통실

이 도서전에서 예술 출판의 근거지는 전체 부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섹션인 독립출판과 아트북을 위한 ‘책마을’ 코너였다. 예술 출판은 예술가, 기획자, 컬렉티브, 디자이너 등의 예술계 구성원들이 개인 단위 혹은 소규모 집단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만큼 독립출판과 그 정신을 공유한다. 작품집, 사진집, 일러스트북 등의 예술 전문 서적을 포괄하는 분류인 아트북과도 물론 용어가 혼용이 될 만큼 연관이 크다. 올해에도 도서전 중심부에 마련된 책마을 코너에서 국내와 아시아 5개국(대만, 중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의 프로젝트들을 소개하는 77개의 부스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43개 부스였던 작년의 규모에서 크게 증가한 숫자다.


예술 출판의 영역화와 20세기

예술 출판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출판의 목적, 형식, 결과물 등이 예술 작품만큼이나 무수히 상이하기 때문이다. 예술 출판과 연관된 대표적인 개념들로는 앞서 언급된 아트북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출판의 주축이 되어 실천적 의도를 담아 만드는 아티스트북(artist’s book), 책의 특수한 공간성과 매체성에 주목하는 예술 실천 전반을 일컫는 북 웍스(bookworks), 책의 형태와 물성을 공예적으로 해석하여 실험적이고 조형적인 책을 만드는 북 아트(book art), 전시를 기록하고 그에 대한 추가적인 자료를 수록하기 위한 전시 카탈로그(exhibition catalog), 그리고 한 예술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주석을 담은 포괄적인 목록과도 같은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 등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각각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분류들이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양하게 조합되며 예술 실천적 의미의 출판을 이룬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술 출판은 지난 세기에 많은 실험들을 거치며 그 의미를 더해왔다. 일찍이 출판을 예술 실천의 방식으로 끌어들인 사례로는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뉴욕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한 전위예술가 집단 플럭서스(Fluxus)가 있다. 존 케이지, 백남준, 요코 오노, 요제프 보이스 등의 구성원들로 잘 알려져 있는 플럭서스는 ‘해프닝(happening)’이라고 불리는 수행적인 장르의 작품 세계를 전개했고, 이러한 작품들을 재현할 수 있도록 하는 지시문인 ‘스코어’를 만들어 배포했다. ‘플럭서스 멀티플(Fluxus multiple)’ 혹은 ‘플럭스 키트(Fluxkit)’라고도 알려진 이 출판물들은 그것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작품을 재창조할 수 있도록 하여 예술의 전문화와 유일성을 위주로 한 예술의 가치 체계에 의문을 제기했다. 구성원 중 딕 히긴스가 1963년에 출판사 Something Else Press를 창립해 스코어뿐만 아니라 플럭서스의 예술관을 뒷받침하는 이론 텍스트까지 발표하면서 이러한 예술 출판 활동은 더욱 다층화되었다.

플럭서스의 초창기 퍼포먼스 스코어를 집대성한 “플럭서스 1(Fluxus 1)”(1964/65)
플럭서스의 초창기 퍼포먼스 스코어를 집대성한 “플럭서스 1(Fluxus 1)”(1964/65), 이미지 출처: Brad Iverson

플럭서스에 이어 1970년대와 80년대의 예술 출판도 제도화된 예술을 벗어나기 위해 가볍고, 제작 비용이 저렴하며, 형태가 비교적 단순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될 수 있었던 소위 ‘민주적인 멀티플(democratic multiple)’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때 멕시코 출신으로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개념 예술가 울리세스 카리온(Ulises Carrión)은 이러한 예술 출판의 맥락을 적극적으로 탐구한 인물 중 하나였다. ‘예술은 문화적 전략(cultural strategy)과 결합될 때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라고 생각한 카리온은 예술 출판이 배포의 차원까지 작품에 형식적인 요소로 편입시켜 그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 전략임을 주장했다.

1976년, 그가 운영했던 예술 출판물 전문 서점 겸 전시 공간 Other Books and So를 나서는 울리세스 카리온
1976년, 그가 운영했던 예술 출판물 전문 서점 겸 전시 공간 Other Books and So를 나서는 울리세스 카리온, 이미지 출처: Guy Schraenen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예술 출판

이렇듯 20세기에 미주와 유럽을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했던 예술 출판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다양한 문화권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속한 아시아의 예술 출판은 어떤 모습이며, 무엇을 모색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서울 서촌에 기반을 둔 출판사 미디어버스는 올해 4월,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2023)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2020년부터 진행된 서울, 홍콩, 타이베이, 베이징, 상하이, 도쿄, 자카르타, 싱가포르, 방콕 등의 아시아 주요 도시들을 거점으로 하는 34개 소규모 출판 단위들과의 인터뷰를 수록한 이 책은 예술 출판의 현주소와 가능성을 조망하고, ‘정서적 공동체’로서의 아시아가 공감하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베를린 Common Imprint에 전시된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2023)
베를린 Common Imprint에 전시된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2023), 이미지 출처: 미디어버스(더 북 소사이어티) 인스타그램 @tbs_book_society

이 34개의 사례들은 각각의 고유한 맥락에 놓여있긴 하지만, 결국 상호 간의 교류와 공동의 의제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네트워크적인 매체로서의 출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지리적인 정체성을 넘어 ‘지역을 정보 권역으로 재편’(p.90)하고 각자의 지식을 다른 권역의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 전달하는 ‘초지역적 역학’(p.100)을 보여준다. 당장의 효율성보다는 공동체로서의 삶의 지탱, 지식과 정보의 민주적인 분배, 매체에 대한 개혁적인 실험 등을 우선순위에 두는 이들은 특정 가치의 절대성보다도, 사회의 역동을 반영하는 유동적인 문화적 전략을 만들어 세상의 흐름을 출판이라는 방식을 통해 드러내는 것에 목적을 둔다. 때로는 예술 실천의 물리적인 증거로서, 때로는 민감한 사안을 토론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회색지대’(p.26)로서, 또 때로는 파편화되고 소수화된 단위들이 연대하는 장으로서 오늘날의 예술 출판은 그들만의 ‘마이크로 로지스틱스’(p.94), 혹은 함께하기 위한 유기적인 시스템을 도모하고 있다.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 p.300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 p.300, 이미지 출처: 미디어버스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 구매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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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서의 출판』에서 책의 편집자이자 출판사 미디어버스와 컬렉티브 더 북 소사이어티의 설립자인 임경용은 서론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만의 전략으로 책이나 그 비슷한 것을 만들고 유통하고자 애쓰는 미시적 활동은 여러분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p.34) 예술 출판의 크지 않은 규모와 지엽적인 주제 등은 누군가에게는 그것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활동이 어디에나,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개인적인 창의성과 기준에 머무르며 물질적 소유와 유일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재해석되고, 사회를 순환하며, 더 다양한 대중과 공유됨으로써 의미를 창조하는 예술의 실천적인 가치 체계가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지금,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예술 출판은 그 의의가 결코 가볍지 않다.

  • 독서신문, 2023 서울국제도서전, 개막 첫날 ‘인산인해’(2023.06.15)
  • SeMA Coral, 출판의 다른 장소로서, 임프린트(2023.05.11)
  • 임경용・구정연 편집,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 미디어버스, 2023
  • Karin Littau, Theories of Reading, Polity Press, 2006
  • Ulises Carrión, The New Art of Making Books, 1975
  • Ulises Carrión, Second Thoughts,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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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주

예술이 모두에게 난 창문이 되는 날을 위해
읽고, 쓰고,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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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미디어버스(더 북 소사이어티) 인스타그램 @tbs_book_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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