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처럼 ‘생산성 강박’에 시달리는 분, 계실까요? 발전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두려움이 당연한 시대입니다. 영민하게 자기계발과 투자에 임해야 한다는 부담이 우리를 덮칩니다. 원하는 만큼 휴식하기에는 죄책감이 앞서고요.감수성이 그 어느 때보다 짙었던 20대 초반에는 달랐습니다. 행선지를 향해 걸으면서도 자꾸만 머뭇거렸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법한 평범한 간판, 낙엽, 신호등. 그런 것들이 공상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목표가 많아질수록,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힙니다. 흔히 ‘발전’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부단히 몸을 움직이고, 열정적으로 달려가는, 그런 전진 말이죠. 진일보라는 말도 있듯이, 발전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한 걸음 한 걸음 더 내디뎌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제자리에 멈춰 서서 무언가를 가만히 관찰할 때도 우리는 발전할 수 있을까요? 이번 아티클에서 이야기할 세 명의 저자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눈앞의 사물, 자연, 사람을 각각 골똘히 응시하면서요. 우리는 정지함으로써 생각지 못한 또 다른 결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남다른 관찰을 보여준 미술가 안규철, 박물학자 에마 미첼, 비평가 존 버거의 책을 소개합니다.
방 안을 응시한 관찰자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내가 거쳐온 세상이라는 학교가 내게 박아넣은 나사못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내 속에 들어와 지금의 나를 만든 이 이물질들, 나사못들로 엮여 있는 습관과 관념의 덩어리가 바로 나다.”
_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 56page”
이 책을 읽다 보면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귤껍질이 눈길을 끕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구석구석을 채운 많은 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보며 과연 질문해본 적 있을까요. 우리에게 사물이란 어떤 의미인지, 사물은 정말 익히 알려진 그 쓰임새만을 위해 존재하는지.『사물의 뒷모습』은 조각을 전공한 미술가 안규철의 에세이집입니다.
이 책에는 인공눈물, 나사못, 연필 같은 일상적 사물에 기반한 사유부터 언어와 예술, 삶에 대한 그의 여러 에피소드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각 장에선 그가 직접 종이에 연필로 그린 사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사물에서 뻗어 나간 이야기는 하나의 ‘뒷모습’, 그건 곧 우리가 잊어버린 어떤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숲으로 나선 관찰자
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

“그렇게 차를 몰아가는데 문득 도로 중앙분리대에서 자라나는 조그만 묘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앞을 스치는 푸른 잎사귀와 엔진의 규칙적인 진동이 내면의 참담한 소음을 가라앉힌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의 온전한 부분, 자연 속에서 치유를 구하는 뇌의 일부분이 깨어난다.”
_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 – 134page”
이 책은 동식물과 광물, 지질학을 연구하는 박물학자 에마 미첼이 자연에 깊은 위로를 받으며 쓴 일종의 회고록입니다. 25년간 우울증을 겪은 그에게 숲을 산책하는 일은 상담 치료나 의약품 못지않은 치유를 선사했다고 하는데요. 그는 집 밖으로 나와 잠자리의 춤을 감상하고, 검은지빠귀의 노래를 듣고, 블루벨의 향기를 들이마십니다. 산책이 우울과 불안을 누그러뜨린다는 말, 여러분도 익숙하실 겁니다. 숲 속 피톤치드가 머리를 맑아지게 하는 경험도 한 번쯤 있었을 거고요.
그러한 효과를 잘 알고 있음에도, 자연으로 찾아갈 용기가 매번 쉽게 나지는 않습니다. 피톤치드를 내뿜는 숲은 너무 멀리에 있고, 나를 에워싼 건 빌딩숲뿐이라고 느낄지도 모르죠. 1월부터 12월까지 야생을 관찰하기 위해 에마 미첼이 향한 곳은 울창한 숲만이 아니었습니다. 집 앞 정원과 오솔길도 있었죠. 병든 자신을 고치기 위해 우리는 너무 먼 곳을 바라보고, 많은 돈을 지불하려 하는 게 아닐까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보세요. 강력한 위안은 매 계절 다른 모습으로 발밑에 즐비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문장으로 포착한 관찰자
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그리고 그 뒤의 언덕으로는 마치 커다란 녹색 극장의 특별석들처럼 밭이 이어져 있다. (…) 순간 나는 그녀의 소리 없는 웃음을 들었다. 마을을 보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였고, 그녀는 나로 하여금 자기 눈을 통해 마을을 보게 했다. 젊은 날의 눈을 통해 보게 해준 것, 그것이 그녀가 지금 웃는 까닭이었다.”
_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20page”
다소 독특한 제목을 지닌 이 책은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가 사람들을 만나 쓴 글을 담은 산문집입니다. 그는 스스로 이 글에 ‘포토카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두 책이 그림과 사진을 포함하고 있다면, 이 책에는 그러한 이미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야말로 ‘글로 쓴’ 사진이기 때문인데요. 다음의 문장을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올가, 1993년 10월 5일 화요일자 프랑스 신문에 난 한 장의 사진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당신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말로 된 이 포토카피를 만든다”
_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133page”
존 버거가 만난 사람들은 그리 유명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그의 옛 친구 혹은 그가 오래전 마주했던 이들이죠. 낯선 그들의 얼굴을 굳이 상상해야 하는 이유를 물으신다면, 대답 대신 책을 건네겠습니다. 활자 위에서는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볼 때처럼 생생함이 숨 쉽니다. 몸의 여러 감각이 깨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면 펼쳐지는 인간에 대한 통찰. 그 통찰의 풍성함이 이 책에 있습니다.
세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분주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싶어집니다. 할 일을 해치우며, 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잡념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하나 채집해 기록하고 싶어집니다. 존 버거의 포토카피처럼 사소한 찰나를 가슴 속으로 복원할 때 우리의 눈에는 초록빛이 스밉니다. 평범한 사물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 멈춤의 자리에서 피어난 통찰이 생각지 못한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우리가 정지의 순간에서 살아갈 힘을 다시 느끼기를 바라며, 세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마음이 가는 것부터 페이지를 열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