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기술 vs 인간’이라는 이분법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어느 한쪽이 승리하면 다른 한쪽은 영영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AI(인공지능)는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논점은 기술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로 바뀌었습니다. 같은 AI 도구를 사용해도 누가 질문을 던지고, 누가 최종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죠.
AI를 활용한 ‘새로운’ 예술 작품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봄에는 세 명의 예술가가 AI를 활용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기술을 활용하지만, 그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작품을 감상하며 “나는 AI를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레픽 아나돌
〈희로애락〉
AI에게 생성의 주도권을 부여할 때

서울 63빌딩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디지털 폭포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화면 위를 가득 채운 형상은 끊임없이 변하며 파도처럼 흐르기도 하고, 은하수처럼 번지기도 하며, 세포의 움직임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2023년 작품, <Machine Simulations: Life and Dreams – 희로애락>(이하 희로애락)입니다.
아나돌은 방대한 이미지와 감정 관련 데이터를 기계 학습 시스템에 학습시키고, 이를 기반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시각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희로애락>은 한국 사회의 기억과 감정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입니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약 189만 건의 데이터가 활용되었으며, 감정과 관련된 뇌파 데이터, 불꽃놀이 이미지, 전통음악과 K-POP 등 다양한 시각·청각 자료가 포함되었습니다. 작품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며 약 16분간 이어집니다.
아나돌은 데이터를 ‘마르지 않는 물감’에 비유합니다. 그는 방대한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학습시킨 뒤, 이를 바탕으로 화면 위에 끊임없이 변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도시와 사회가 남긴 기록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나돌의 관심은 기계를 단순한 계산 장치로 두지 않는 데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과 함께 상상하고 생성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묻죠. AI를 도구가 아닌 창작 파트너로 대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나돌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아닐까요?
레픽 아나돌 <희로애락>(상설 전시)
매일 오전 8시~오후 8시(00분, 20분, 40분 상영) 63빌딩 1층 동편 로비
웨인 맥그리거
〈딥스타리아〉
AI가 만드는 환경에 실시간으로 반응할 때

<딥스타리아>는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가 심해와 우주의 암흑에서 이미지를 가져와 구성한 2024년 작품입니다. 맥그리거는 제목을 심해 해파리 속명인 ‘딥스타리아(Deepstaria)’에서 가져왔지만, 해파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허와 존재의 감각을 다룹니다.
무대에는 빛을 99.965% 흡수하는 밴타블랙이 사용됩니다. 빛이 거의 반사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무용수들의 몸은 또렷하게 드러나기보다 두둥실 떠오른 듯이 보입니다. 공간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워지면서 관객은 몸의 움직임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이죠.
음악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니콜라 베커(Nicolas Becker)와 프로듀서 렉스(LEXX)가 만든 음악은 브론즈 AI(Bronze AI)라는 디지털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공연 중 실시간으로 재구성됩니다. 음악이 미묘하게 달라질 때마다 무용수들도 그 변화에 맞춰 움직임을 바꿉니다. 안무는 정해져 있지만, 매 순간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통제된 공연도, 완전히 즉흥적인 공연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경험이 펼쳐집니다.
공연 외에 전시와 포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시에서는 인터랙티브 설치와 영상 작업이 소개되는데, 맥그리거가 창작 과정에 활용한 기술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포럼에서는 여러 분야의 창작자들이 모여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무대의 감상을 자연스럽게 확장할 기회입니다.
웨인 맥그리거 <딥스타리아>
3월 27·28일 GS아트센터
웨인 맥그리거 설치 및 영상 시리즈 <기계와 몸: 무한의 변주>
3월 24일~4월 5일 GS아트센터 로비 외
주빈 캉가 리사이틀
‘더 사이보그 피아니스트’
AI를 신체 확장의 수단으로 활용할 때

매년 봄, 통영에서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립니다. 통영 출신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을 비롯해 현대음악과 친숙한 클래식 작품까지 폭넓게 만날 수 있는 음악제로, 올해는 3월 27일부터 4월 5일까지 개최됩니다. 이번 음악제에서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테크놀로지스트인 주빈 캉가(Zubin Kanga)의 흥미로운 작업도 만날 수 있습니다.
캉가는 피아노 연주에 센서 기술과 전자음향 시스템을 결합해 연주자와 악기의 관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전통적인 피아노 음향에 더해, 연주자의 신체 움직임과 제스처를 데이터로 변환해 전자음향을 생성합니다.
그중 ‘사이보그 피아니스트’는 캉가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입니다. 캉가는 이 프로젝트에서 MiMU(Micro Inertial Measurement Unit, 관성측정장치) 센서 장갑을 착용해 손과 팔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추적하고, 수집된 데이터를 인터랙티브 음악 소프트웨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처리하며 새로운 음향을 만듭니다. 즉 인간 연주와 디지털 시스템이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내는 셈이죠.
캉가는 작곡가 닐 럭(Neil Luck)의 <무엇이든 당신을 짓누르는 것(Whatever Weighs You Down)>을 연주할 때도 MiMU 장갑을 활용했습니다. 이 작업은 청각 장애 퍼포먼스 아티스트 미나미무라 치사토(Minamimura Chisato)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캉가의 손과 팔 움직임은 MiMU 센서를 통해 전자음향 시스템과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생성·변형된 소리와 진동이 공연장에 울려 퍼집니다. 미나미무라는 이러한 변화에 반응하며 움직임을 이어가고요. 이를 통해 음악을 청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신체 전체로 감상하게 합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이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주빈 캉가 <더 사이보그 피아니스트 I·II·III>
4월 3~5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더 사이보그 피아니스트 I·II·III> 자세히 보러 가기
AI의 성능은 앞으로 더욱 정교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예술의,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은 확장됩니다. 아나돌, 맥그리거, 캉가가 그러했듯,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기술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지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여러분은 AI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싶나요? 세 명의 예술가가 보여준 접근을 직접 경험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보세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만의 새로운 ‘정답’이 될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