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제주 역사 기행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제주에 담긴 역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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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신혼여행지, 그리고 2000년대의 수학여행지를 거쳐 오늘날 여름 휴양지까지. 제주도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단연코 칭송받는 여행지이자 저마다의 추억이 어려 있는 지역일 텐데요. 이번 글에서는 단순히 놀고 여행하는 제주도가 아닌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탐라국부터 조선까지의 역사를 오롯이 품은 4곳의 장소로 새로운 제주도의 모습을 만나러 떠나 볼까요?


유배지에서의 역작,
“세한도”가 만들어 낸 추사관

제주 추사관 파사드
이미지 출처: 제주 교통복지신문

국내 여행지로 가장 추앙받는 곳 제주도. 지금은 최고의 휴양지로 사랑받고 있지만 과거의 제주도는 육지와 떨어진 척박한 환경의, 말 그대로 최악의 유배지였습니다.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오름이 자아내는 풍광 이면에는 슬픔과 고난이 설킨 유배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데요. 추사체로 잘 알려진 김정희 역시 유배의 이유로 제주에서 긴 세월을 보냈던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추사체
추사체, 이미지 출처: 중앙포토

조선 후기의 대학자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 내 유배지에서 역작 ”세한도”와 ‘추사체’를 만들어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 지역 예술인과 학자들의 노력으로 1984년 유배지를 정비하고 추사 유물 전시관을 건립합니다. 이 건물이 제주 추사관의 전신이 되었으며, 훗날 2010년 승효상 건축가의 설계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추사 김정희는 서예뿐만 아니라 금석 고증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참의, 형조참판을 거치며 탄탄한 정치인의 삶을 살다 세도정치의 화를 입고 1840년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 유배길에 오르게 되죠. 약 9년 간의 유배 생활 동안 제주에 머물며 ’추사체’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큰 업적을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그려내게 되죠.

김정희, “세한도”, 1844, 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추사관 파사드의 모습
이미지 출처: 헤드라인제주

특히 세한도와 추사관에는 특별한 연결고리가 담겨 있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귀양살이 5년 차, 58세의 추사 김정희는 마른 붓을 들어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가 담긴 작품을 그렸습니다. 유배지에 남겨진 자신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을 칭송하며 답례로 그려 보낸 작품인데요. 실내에서 세한도의 여운을 마음에 가득 안고 야외로 나와 건물을 둘러보면, 어딘가 낯익은 장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건물 한 채에 소나무와 측백나무 몇 그루가 둘러싼 추사관의 건물은 세한도 속 집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 건축으로 구현해냈음을 알 수 있죠.

추사 선생의 유배지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전시관 출구를 따라 나오면 초가집으로 지어진 추사 선생의 유배지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유배 당시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탱자나무 울타리로 집을 둘러싸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도록 했던 최고의 형벌 ‘위리안치’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는 제주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가시덤불에 싸여 살면서도 후학 양성에 힘쓴 그의 올곧은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만 같죠. 추사관부터 유배지까지, 단순한 외관 속 깊게 담긴 그의 삶을 만나보세요.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WEBSITE : 제추추사관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 기념관

이미지 출처: 제주뉴스

이제는 여성 CEO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그럴 수 없었던 때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믿고 나아간 의인이 있었죠. 조선을 뛰어넘어 한국사 최초의 여성 CEO로 평가받는 조선 후기의 거상 김만덕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탑동에 위치한 김만덕 기념관은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공립 기념관입니다.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이미지 출처: 제주뉴스

1739년 출생해 12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기생집에 의탁해 기생으로 살아갔던 그는 23살이 되던 해 양인으로의 신분 변화를 이루고 본격적인 상인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기녀 생활의 경험을 살려 제주 양반집 부녀자나 기녀들에게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을 저렴하게 팔면서 그 양을 점차 늘려나가며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는데요.

또한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보냈던 장소, 포구가 지닌 상업적 중요성을 미리 읽고 건입포구에서 장사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당시 제주시 건입동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문으로 수많은 물자들이 오갔고 이를 중계하는 객주들이 들어섰던 대표적인 동네로, 김만덕은 이러한 시장의 흐름을 포착해 숙박, 금융, 도매, 유통 등의 기능을 포괄하는 물산객주를 차려 막대한 부를 창출하기 시작하죠. 하지만 김만덕이 ‘거상’이 아닌 ‘의인’의 타이틀을 얻기까지엔 그의 진심 어린 나눔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헤드라인뉴스
이미지 출처: 오마이뉴스

김만덕의 이름 석 자를 알리게 된 사건은 1795년 ‘기민 구호’였습니다. 계속된 흉년으로 제주도의 인구가 감축되던 시절, 당시 쌀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던 심각한 기근 현상이 닥쳐왔을 때 나라에 쌀 삼백 석을 기부하면서 굶주려 가는 제주도민을 연명시키고 수천 명의 백성을 살려낼 만큼의 막대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이로써 한양의 정조에게까지 그의 업적이 귀에 들어가게 되고, 임금의 칭송을 받아 의녀 반수가 된 여성으로 최고의 벼슬자리까지 오르게 되죠. 김만덕의 은혜에 깊게 감명한 정조는 당시 여성으로는 꿈꿀 수도 없었던 금강산 유람의 기회를 그에게 선사하기도 합니다.

불우한 환경과 여성을 억압하던 시대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자신의 신념을 실현한 김만덕. 그의 이름을 딴 기념관에서는 ‘은혜로운 빛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상설 전시관과 나눔 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여러 공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념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김만덕이 장사하며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함께 보듬은 객주터도 재현해두었죠. 제주시의 한 편에서 그가 펼친 은혜의 빛을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요?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산지로 7


WEBSITE : 김만덕기념관


제주 행정의 중추적인 역할,
제주목 관아

제주목 관아
이미지 출처: 비짓제주
제주목 관아 관덕정
이미지 출처: 문화유산채널

서울에 경복궁이 있다면, 제주엔 제주목 관아가 있습니다. 제주목 관아는 탐라국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정치와 행정, 문화가 집약된 그야말로 중추적인 공간이었죠. 이곳은 1993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며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축물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제주목 관아에 도착하면 기세가 인상 깊은 누각 ‘관덕정’이 방문객을 반겨줍니다. ‘활을 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덕을 알 수 있다’는 뜻을 지닌 이곳은 올바른 심신을 수양하는 공간이자 군사를 양성하는 훈련청이기도 했죠.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기도 한 이곳은 활쏘기 시합이 있는 날이면 목사와 판관이 관덕정에 올라앉아 시합을 지켜보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망경루의 그림
이미지 출처: 제주의소리

관아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또 다른 유적지는 ‘망경루’입니다. 망경루는 관아 내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제주 목사가 임금이 있는 한양을 바라보며 나라의 은덕에 감사드리고 예를 올리기 위한 목적에서 한양과 가장 가까운 쪽에 지어진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당시 해안가에 대한 시찰도 가능하게 하여 왜구로부터 제주도를 방어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죠. 뿐만 아니라 균형미가 매력적인 대문 ‘진해루’, 제주 목사의 집무처로 제주도의 안위를 책임지던 ‘연회각’, 제주 목사가 휴식시간과 여가를 보냈던 ‘귤림당’ 등 제주의 역사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속에서 제주목 관아는 숱한 수난을 겪었습니다. 1434년 대화재로 건물이 모두 소실되어 조선 시대 내내 증, 개축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전면 훼손되어 관덕정을 제외하고는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훗날 제주시 지하주차장 예정지 결정에 따른 사전 매장 문화재 시굴 조사를 통해 건물의 터와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약 170억 원을 들인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전개됩니다. 관아를 다시 꾸리며 제주도민들의 5만여 장의 기와를 기증하며 복원되었던 이곳은 제주시와 도민들이 함께 만들어낸, 말 그대로 제주가 함께 일궈낸 유적지인 셈이죠.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제주목 관아의 전경
이미지 출처: 비짓제주

제주목 관아의 복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탐라순력도’ 역시 관아 내부에서 만날 수 있으며, 제주목 역사관을 통해 그 당시 생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관광 성수기인 5월과 10월에는 야간 개장도 진행하는데요. 해당 기간 동안 매주 주말엔 제주 예술인들의 공연과 더불어 다양한 문화 예술 활동도 즐길 수 있습니다. 제주의 정취가 담긴 곳에서 제주의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끽해보세요.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 25


WEBSITE : 제주목 관아


피난지에서 꽃 피운 예술의 기운,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미술관의 모습
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담배 피우는 이중섭의 모습, 흑백
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개관 당시 진품 없는 미술관으로 혹평을 받았지만 이제는 비로소 제주의 명실상부한 장소로 자리 잡은 이중섭 미술관. 그의 유명한 작품 시리즈 “황소” 연작을 비롯한 은지화 그리고 제주에서의 삶이 담긴 작품으로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그가 가족과 함께한 피난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일본 국적의 여인 아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그의 생활은 점점 힘들어져 갑니다. 지역을 방황하던 그는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제주도 서귀포로 내려와 생활하기 시작하는데요. 1952년 종군화가단에서 활동했지만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 뒤로 이중섭은 일본에서 단 한 번 가족들을 만나고 삶을 마칠 때까지 만나지 못합니다. 슬픔과 방황이 만든 내면 상태로 인해 결국 그는 건강 악화로 1956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죠.

이중섭,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1954, 이미지 출처: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이미지 출처: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 이미지 출처: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작가가 제주도에서 생활했던 기간은 11개월 남짓으로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주도 내 그의 향취가 담긴 장소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마 그가 가족과 함께 보낸 유일하게 행복했던 기간이 제주도에서의 생활이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급히 떠난 피난길에 겨우 마련한 보금자리였지만 네 가족이 함께 모여 살을 부대낄 수 있었던 추억은 제주에서의 시간이 유일했을지도 모릅니다.

1층의 상설 전시실, 2층의 기획 전시실을 관람한 후 미술관을 나오면 만날 수 있는 이중섭 공원. 빽빽한 나무들로 우거진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제주의 전통 가옥 한 채가 보입니다. 바로 이곳이 그가 가족과 살았던 장소를 구현한 이중섭 거주지죠. 네 칸 정도 되어 보이는 집, 하지만 네 식구가 살았던 공간은 오른쪽 열린 문이 있는 곳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1평 남짓의 좁은 방이었지만 가족이 다 같이 누워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이었기에 그에게는 그 어디에서보다 따듯한 추억이 어려있는 곳이었을 것만 같습니다.

이중섭 거리의 모습
이미지 출처: 제주의 소리

미술관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이중섭 거리는 오늘날 다양한 문화 체험 활동들이 이루어지는 제주도의 대표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거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신진 작가의 전시와 아트마켓, 거리 공연 등 다양한 예술적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전에는 서귀포가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의 삶으로부터 예술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로 27-3


WEBSITE : 이중섭 미술관


누군가에게는 처절한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던, 누군가에게는 나라를 위한 치열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야 했던 장소 제주도. 과거의 이야기가 오늘날 그곳을 향유하는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낼 때 그 장소는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번 여름 제주도에 방문한다면, 제주의 과거를 느끼고 태동하는 오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몰랐던 제주의 면면을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이 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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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연

누군가의 관점이 담긴 모든 것이 예술이라 믿습니다.
ANTIEGG와 함께 예술을 기록하고,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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