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여성은
성장할 수 있는가

이안 쳉의 작품을 통해 본
여성성과 성장의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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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용품 브랜드인 Always의 ‘#LikeAGirl’ 캠페인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가져다준다. 가상의 오디션에서 참가자들은 디렉터에게 ‘여자애처럼 뛰어봐’라는 요청을 듣는다. 많은 참가자는 우스꽝스러운 손짓을 하거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달리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10살의 여자아이 다코타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자 같은’ 행동이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나타났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긴 머리칼을 가진 어린이가 야구공을 쥐고 한쪽을 응시하고 있다.
Always의 ‘#LikeAGirl’ 캠페인, 이미지 출처: Contagious

솔직히 필자는 이젠 더 이상 ‘여성’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과연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단어를 두고 어렴풋한, 베일에 싸인 하나의 형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인간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더욱 그렇다. 근대는 신의 지배 아래 놓였던 인간의 종속을 걷어내고, 이성이 우리를 인도하게 했다. 이성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운명의 길을 걷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성장하기를 요구받고, 성장을 통해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은 전근대의 베일 안에서 뻐끔거리며 팔을 허우적대고 있는 듯하다. 어렴풋한 달빛 같은 그 베일은 여신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빛나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살아있는 생명에게는 그저 장애물일 뿐이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여성

시몬 드 보부아르, 이미지 출처: New Statement

여성의 성장엔 유달리 기이한 구석이 있다. 일단 탄생이라는 자연적인 생의 구조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1세기 여성의 성장은 어린아이가 자신을 여성이라고 정체화하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 그렇다면 아이가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일까. 에릭 에릭슨의 발달단계이론에 따르면 아이는 영유아기 인격 형성 마지막 단계인 5단계에서 성별 정체감을 형성한다고 한다. 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에 실린 유명한 선언,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와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자아를 형성하기 전에 자신이 여성인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2살짜리 아이에게는 자신의 옷이 파란색 운동복인지 분홍색 드레스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6살 아이에게는 오늘 입는 옷의 디자인과 색은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에게는 2살에게는 없는 사회적 자아가 있다. 이는 일종의 교육과 사회화가 만들어낸 행동 양상으로,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기이한 곡선을 그리는 여성의 성장

이미지 출처: unsplash

여성의 성장이 기이한 두 번째 이유는, 여성의 성장이 생물학적 성장과 궤를 같이하다 어느 순간 회귀하는 모순을 지닌다는 점이다. 여성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며 성인지를 발달시키다,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간신히 쌓아 올린 정체성을 버려야 함을 느낀다. 그 일은 주로 개인이 경쟁 집단에 입성한 순간 벌어지곤 한다. 초등학교에서 반장이 되기 위해 연단에 서서 자신을 ‘판매’할 때, 꽃과 레이스를 좋아한다는 소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쟁을 통해 어떠한 사회적 지위를 습득하려 할 때, 어린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을 일부 은폐(혹은 폐기)하고 남성에게 할당되었던 특징(예를 들면 호전성, 객관성, 논리성 등)을 흡수하려 애를 쓰게 된다. 여성의 성장이 사회화 과정 아래에 태어났다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성 성장의 기이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성이 생산인구로 인정받는 시기에 이르면, 다시 여성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며 성장한다. 아내 됨, 어머니 됨을 이상적인 가치로 숭앙하기 시작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야”라는 말이 마치 환청처럼 사회를 부유한다. 그리고 우리는 귀신 들린 듯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직도 재생산이라는 전근대의 가치가 여성이란 존재를 옭아맨다.


포스트휴먼시대, 성장의 서사시

<Life After BOB> 포스터, 이미지 출처: Life After BOB 공식 웹사이트

그렇다면 인간이 생물학적 결정론에서 벗어나 기계와 결합하는 포스트 휴먼시대에 다다른 후에 여성의 성장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최근 리움 미술관에서 전시, 상영 했던 이안 쳉의 <Life After BOB: Charlice Study>는 포스트 휴먼으로 변모한 여성의 성장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를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묘사한다. 제임스 문위드 웡 박사는 뛰어난 신경공학자로, 그는 갓 태어난 자신의 딸 찰리스에게 하부인격인 AI 데스티니 BOB(Bag of Beliefs)를 삽입한다. BOB는 찰리스가 10살이 될 때까지 다양한 선택지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을 내려주며 찰리스의 삶을 가장 효과적인 길로 인도한다. 그러나 찰리스가 10살이 되는 해 모종의 사건으로 찰리스는 몸의 주도권을 BOB에게 빼앗기게 되고, BOB는 찰리스 없이 수많은 자아를 형성하고, 수많은 인생을 경험하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나간다. BOB는 자신의 예측 능력을 기반으로 수많은 삶을 시뮬레이션하고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전부 데이터로 저장된다.

<Life After BOB> 스틸컷, 이미지 출처: Life After BOB 공식 웹사이트

10년 후 다시 찰리스와 만난 BOB는 찰리스가 없던 10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BOB는 찰리스가 사라진 사이 10살 찰리스의 소원이었던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에 성공했다고 이야기한다. BOB는 찰리스의 이름을 버리고 차이나 호차우라는 하나의 인격으로 찰리스의 삶을 대신 살아갔던 것이다. 차이나 호차우는 생물학적 배경으로부터 독립한 존재로 ‘집에 남겨둔 것 하나 없이 떠나간’ 존재다. 그는 유기체와 테크놀로지가 결합한 키메라이자 포스트젠더 세계의 피조물이다. 그는 결혼과 이성애적인 짝 찾기를 성장에서 유희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차이나 호차우는 수많은 삶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이 휴머니스타(기술 발전을 거부하고 과거의 윤리의식과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 여성에게 습격을 받지만, 그 여성이 차이나 호차우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미 3번의 결혼을 경험했으며, 찰리스와 조우했을 당시도 더블 데스티니 웨딩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경험을 광적으로 즐기며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차이나 호차우에게 이르러 여성성은 더 이상 기묘한 궤적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성장의 다양한 과정 중에서 여성성을 취사선택함으로 사회적인 성별 규범을 간단히 전복한다. 왜냐하면 그의 근원은 BOB, 성별이 없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차이나 호차우와 이안 쳉의 <Life After BOB: Charlice Study>는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작품을 곧 다가올 미래의 생기 넘치는 전주곡으로 바라보아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이미 포스트 휴먼, 사이보그로의 진화에 발을 들였다. 21세기에 이르러 신체 일부를 과학기술로 변화, 대체시키지 않은 인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안경을 끼고, 로봇을 사용해 수술 받으며, 스마트폰을 이용해 뇌의 일부를 대체한다.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이제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19세기에 니체가 신을 죽었다고 선언했다면, 20세기에 해러웨이는 여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주체와 주변의 이분법적 사고관은 더 이상 우리의 세계를 바로 비추지 못하는 듯하다. 이제는 여신의 시체를 밟고 올라설 때다. 여성이란 이름은 이제 비천하지도 존엄하지도 않다. 가부장제가 씌운 그 허울을 벗은 기술과 생명의 잡종 괴물이 지금 저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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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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