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순수예술이다

그림책을 바라보는
우리의 편협한 시선과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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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얼마 전 3월 21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희소식이 전해졌다. 올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국제아동도서전 개막과 함께 그림책 『여름이 온다』와 『파도야 놀자』의 이수지 작가가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국 작가가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며, 아시아에서는 1984년 일본 작가 안노 미쓰마사 이후 무려 38년 만이다. 이번 이수지 작가의 수상으로 한국은 세계 아동문학계가 주목하는 안데르센상 수상자를 배출한 28번째 국가가 되었다고 하니, 이는 분명 보통일이 아니다. 참고로 간략히 안데르센상의 의미를 기술하자면, 유명 동화작가 안데르센을 기리기 위해 1956년 만들어진 아동문학계 최고상으로 2년마다 글과 그림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한다. 이수지 작가는 6년 전 한국 최초로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수상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가, 이번 수상을 통해 마침내 그 숙원을 이루게 된 셈이다.

이미지 출처: 비룡소

안데르센상 수상으로 그림책 시장은 오랜만에 들썩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이 온다』의 판매가 서점가를 역주행하며 일주일 사이 그 전보다 154배가량 판매량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파도야 놀자』, 『이수지의 그림책』, 『선』 등도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며 순위권에 올랐지만, 주목해 볼만 한 건 이 154배 상승이라는 놀라운 숫자였다. 수상에 따른 이 놀라운 지표를 보며 한편으론 그림책 시장의 열악한 현 상황과 함께 그간 한국에서 그림책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가 얼마나 협소했는지를 가늠해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림책은 그간 우리에게 ‘아동들을 위한 도서’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이수지 작가의 수상을 통해 그림책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 탐구해 보는 한편, 그림책의 예술성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아동도서’라는 장르에 담을 수 없는 보편성과 예술성

“정말 그림책은 보편적 언어구나, 게다가 제가 그림만을 사용하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정말 쉽게 가닿는 것 같고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_이수지 작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동도서라 부르는 카테고리는 그저 아이들만을 위한 도서라고 치부하기 쉽다. 어른으로서 아이들과 같은 책을 보기 겸연쩍고 불편한 마음도 그 안에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론 아이들의 정서발달과 교육만을 위한 단편적인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림책이야말로 성인과 아동 모두를 아우르며 동시에 두 그룹 모두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번 이수지 작가의 안데르센상 수상을 계기로 그림책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힘이 비로소 대중들에게 증명된 셈이다.

이미지 출처: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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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그간 제대로 인식해오지 못한 그림책의 장르적 특성을 근본적으로 재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녀의 대표작들을 보면 그녀가 ‘그림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또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림책이라는 매개로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녀는 놀이가 품은 창조적 힘을 본질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시각은 ‘경계 3부작’으로 불리는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에서 자연스레 드러나있다. 세 작품들에서 그녀는 아이가 서서히 놀이에 빠지는 과정을 담담히 보여준다. 아이가 새롭게 시도하고 탐색하며 마침내 바라는 바를 얻는 것은, 바로 놀이를 통해서라는 점을 그녀는 이야기한다. 자신의 오감을 최대한 열어젖히며 그 과정을 즐기겠다는 이 마음가짐은, 실패나 거절을 늘 염두에 두며 계획하는 어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가 된다. 이러한 점은 그림책을 대하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어른은 노동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아이는 놀이의 관점으로 보거든요. 어릴 때 만희를 데리고 텃밭에 나가면 저는 토마토가 잘 익었나, 얼마나 많이 수확할 수 있나 혈안이 되는데, 만희는 토마토를 갉아 먹는 벌레를 보고 즐거워해요. 노동의 관점으로 보면 토마토는 소중하지만 벌레는 잡아야 하는 대상이죠. 하지만 아이에게는 토마토도 소중하고 벌레도 소중한 거예요. 여러 생명 그대로를 느끼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재미를 느끼는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지요. 이미 위계를 배워서요. 이익을 취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체계 안에서 머리가 자꾸 고착화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림책이 자꾸 건들죠. (중략) 한때 우리가 가졌던 위계없는 시선이 그림책에 담겨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림책을 보고 위안과 치유를 얻는 거예요. 그리워하는 가치가 그 안에 있으니까요.”_권윤덕 작가,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이렇듯 그림책은 아동도서 카테고리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그 장르적 특성이 모호해 보이기도 하며 때론 타깃 고객이 불명확해 보일 때도 더러 있다. 아동을 주된 대상으로 하지만, 어른에게도 유효한 메시지가 담긴 경우 또한 포괄하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의 말처럼, 그림책은 텍스트가 최소화된 형태에서 그림만으로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쉽고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게 된다. 그 메시지는 단순히 아이들만을 위하기보다 우리 모두에게 향하게 된다. ‘아동도서’만으로 그 장르를 한정하는 건 애당초 무리일뿐더러 시대의 흐름과도 부합하지 못한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사이의 경계

그렇다면 이러한 그림책의 속성을 토대로 보건대, 그림책은 과연 어느 카테고리에 귀속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이수지 작가의 안데르센상 수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유럽에선 그림책이 이제 단순한 ‘아동도서’의 영역을 넘어 순수예술이라는 영역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이 그림책이 우리가 아는 순수예술 작품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요소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쉽고 친절한 언어라는 것. 누가 될지 모를 독자들에 대한 몰이해(혹은 특정한 계층만을 위한 이해)와 일방향적 소통이 아닌, 가장 안온한 형태와 방식으로 독자들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그림책은 우리가 순수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상충한다. 순수예술은 어렵고 대중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편견과 선입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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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림책은 순수예술에 속할까, 혹은 상업예술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해답의 단초를 찾은 건,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속 유준재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섬유예술을 전공한 그는 자본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현대미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인터뷰를 통해 전해지는 유준재 작가가 과거 느꼈던 당시 고민은 일러스트레이션과 같은 상업예술과 순수예술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미술계를 움직이는 자본과 권력의 힘을 목격했어요. 강대국의 오만함, 유행, 줄서기 같은 것도요. (중략) 현대미술은 예술을 위한 진보에 골몰하느라 세계와의 소통은 뒷전으로 밀어두었지요. 하지만 원래 화가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그림을 생산하는 사람이었어요. 근대 모더니즘 시대 이전까지는 늘 실용적 목적에 맞추어 그림을 그렸지요. 화가의 원래 역할로 살아가겠다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러스트레이터 활동을 시작했어요.”__유준재 작가,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기획한 인터뷰어 최혜진 작가 역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예술의 거친 속성을 책에서 언급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회화에 비해 친절한 예술이기 때문에 괄시받는 경험을 그림책 작가들과 나누며,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간의 관계가 수직적인 개념이 아님에도 이를 수직적이고도 계층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꼬집는 한편, 이에 대해 우리부터가 조금은 더 자유하기를 원하는 바람과 염원을 책을 통해 드러낸 바 있다. 예술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쉽고 친절한 것을 내려다 보고, 어렵고 불친절한 것을 올려다보려는 경향 말이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 깨뜨리고 허물어야 할 우리 안의 선입견이기도 하다.


그림책은 순수예술일까 상업예술일까

현대 예술에 있어 이미 순수예술이라는 장르가 앤디 워홀의 출현과 함께 거대 자본주의에 귀속되면서 예술의 상품화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때문에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사이의 담론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일면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원론적인 의미에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작가가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느냐와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관철시키느냐의 차이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사이의 태생적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순수예술의 본질적 성격은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작품 안에 관철시키고 있느냐’가 아닐는지.

그림책에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독자가 바라고 원하는 이야기 또한 절충하며 녹여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작품을 통해 작가 자신의 이야기나 내면적 가치를 표현하는 것에 더 집중한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이야기나 추상적인 메시지를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독자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서 가치가 부여된다.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결여될 수 있는 대중성과, 이와 반대로 더해질 수 있는 소외감을 감수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림책에 내재된 속성이, 순수예술을 정의하는 속성들과 비교해봐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뿐더러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비룡소

“고급 예술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그림책의 가능성이 멋있어 보였다”라고 말하는 이수지 작가의 인터뷰에서 순수예술을 바라보는 그녀만의 시각과 정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그림책의 가치 말이다. 이미 해외에서 예술로 인정받고 있는 이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조금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수상에 따른 154배 판매량 상승에 도취되기보다, 이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그림책 작가들의 작품들 속 예술적 가치가 더 인정받게 되길 희망한다. 그러한 토대와 토양이 갖춰진다면, 우리나라에서 제2의, 그리고 제3의 안데르센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조선일보, ‘안데르센상 효과’… 이수지 작가그림책 판매량 1주새 154배 증가, 2022
  • 최혜진,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한겨레출판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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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성

책을 읽고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리곤 글을 씁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합니다. 재미를 발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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