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예술
나쁜 예술

예술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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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보러 갈 전시를 정하고, 방에 걸기 위한 그림을 결정하는가? 당신은 어떤 작품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작품이고 어떤 예술가가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가? 이를 결정하는 과정은 현대에 이르러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성당에 봉안된 작품이 좋은 작품이고 왕이 하사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던 ‘그리운 옛날’은 가고 이제 머리 아픈 현대 미술이 우리 곁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어려움의 배경에는 예술은 감히 범인이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는 ‘고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다

천재적인 예술가 한 사람이 예술을 창조한다는 생각은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합의에 밀려난 지 오래다. 이제 모든 예술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와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에 대한 전유(appropriation)다.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술가가 아마 셰리 레빈(Sherrie Levine)일 것이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 세상의 어떤 길을 찍지도, 어떤 사람을 찍지도 않는다. 그의 사진은 그의 방 안에서, 다른 사진작가의 사진 위로 맞추어진 포커스 속에서 탄생한다. 레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워커 에반스 이후(After Walker Evans)”는 워커 에반스의 사진집을 그대로 찍어서 만들어낸 작품이다.

(레빈의 사진과 워커 에반스의 사진을 나란히 첨부하고 싶지만 “워커 에반스 이후” 연작은 수많은 저작권 논란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작품 사진을 다운로드 받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이 작품을 확인하기 원하는 경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의 사진 콜렉션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워커 에반스
워커 에반스, “Allie Mae Burroughs, Wife of a Cotton Sharecropper, Hale County, Alabama”, Gelatin silver print, 23.7 x 18.4 cm. 레빈이 전유한 작품으로, 이 작품과 레빈의 “워커 에반스 이후”는 거의 완전히 똑같다.

이러한 전유 행위는 레빈과 같은 전면적인 방식 외에도 여러 현대 작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는 일본 만화의 이미지를, 제프 쿤스(Jeff Koons) 흔히 볼 수 있는 풍선 강아지의 이미지를 흡수해 자신의 작품을 찍어내고 있다. 전유 행위 자체의 가치나 과연 개별의 작업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하자. 여기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전유가 현대 예술 생산의 주요한 전략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예술작품은 어떠한 원본성도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예술이 내제한 생각, 그리고 예술이 전달되는 방식이 중요할 뿐이다.

제프 쿤스, “Balloon Dog”
제프 쿤스, “Balloon Dog”, mirror-polished stainless steel with transparent color coating, 121 x 143 x 45 inches, 1994-2000.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이를 “작가의 죽음”이라고 일컬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차례 혼란스러워진다. 이제 작가가 작품의 유일한 창작자가 아니고, 작품이 사회적 산물이라면 우리는 과연 작품을 어떤 잣대로 평가해야하고, 어떻게 검열할 수 있을까? 예술은 검열에서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는 걸까?


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여기 한 작품을 보자. 여러분은 이 작품을 과연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제이크 디노스 채프먼 형제, “끔찍한 해부(Tragic Anatomies)”
제이크 디노스 채프먼 형제, “끔찍한 해부(Tragic Anatomies)”, 1996, 복합매체,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솔직하게 밝히자면 필자는 이 작품에 오랫동안 매료되어있었다. 이는 제이크 & 디노스 채프먼(Jake & Dinos Chapman)의 작품으로 기괴하고 폭력적이다. 인형의 신체는 작품에서 이상하게 덧붙여지고 파괴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품이 기괴함과 폭력성을 전면적으로 내세움과 동시에 아이들의 인형마저도 괴기하게 만드는 무분별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필자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데는 이 작품이 전시된 장소, 즉 작품이 보이는 방식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이 작품은 필자에게 과연 어떤 맥락으로 제시되었을까. 이 작품은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에서(전형적인 화이트큐브 중에 하나인 미술관에서) 나치즘의 참상과 전쟁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동 작가의 다른 작품 옆에 전시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부분의 ‘독자’는 이 작품을 불편하다고 느낄지언정 소아성애나 폭력에 봉사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이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전시장의 캡션을 읽으면서는. 그러나 이 작품이 ‘순수예술’의 채널을 떠나서도 과연 동일한 방식으로 수용될까?


뒤섞이는 채널

첼로 연주하는 예술가
이미지 출처: Unsplash

다음의 사례를 살펴보자. 디노스와 제이크 채프먼 형제의 많은 작품은 프랑수아 피노(Francois Pinault)의 컬렉션에 속해있다. 피노는 거대 경매회사 크리스티를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광고 캠페인에서 소아성애의 이미지를 이용한 것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발렌시아가를 소유하고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 피노와 채프먼이 발렌시아가의 소아성애 논쟁에 책임이 있는지, 혹은 그러므로 채프먼 형제의 작품이 부도덕하고 검열 받아 마땅한 지가 아니다. 예술의 수용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예술이 전달되는 통로, 즉 채널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이제 선량한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의 구분은 이미지 자체에 달려있지 않다. 이 이질동상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좋음과 나쁨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작품 내부가 아닌 작품 외부, 즉 작품이 수용되고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제 많은 채널들은 각자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각기 다른 영역을 침범하며 서로를 흡수하고 있다. 예술이 광고를, 광고가 예술을 삼키고 있다.

그림(picture)의 아래에는 언제나 다른 그림이 숨어있다.

_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


이제 우리는 더욱 날을 세워야한다. 작가의 죽음 뒤에는 작가의 소멸이 자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수히 많은 작가의 탄생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지, 어떤 예술이 수용될 수 있고 또 그럴 수 없는지는 이제 작품만을 놓고는 논할 수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드디어 우리에게 예술의 민주주의가 도래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술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과연 이상향을 보여줄지, 혹은 또 다른 예술 전체주의나 포퓰리즘으로 나아갈 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 중앙일보, 세계 최고는 다 있다…피노 컬렉션의 화려한 세계, 2009.06.13.
  • Douglas Crimp, “Pictures,” October Vol. 8, 1979, 7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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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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