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도시 프랑스 아를에서
만난 이우환의 조각들

안도 타다오의 철학과 공명하는
아를의 이우환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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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를 매료시켰던 곳, 프랑스 남부에 작은 보석 같은 도시 ‘아를(Arles)’이 있습니다. 그의 붓끝에 깃든 비극과 아름다움이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이 도시로 짧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사실 이번 여정에서 필자를 사로잡은 또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입니다. 아를에서 그의 작품과 마주한 순간, 도시에 깃든 아련한 흔적들과 그의 고요한 울림이 교차하는 특별한 경험이 펼쳐졌습니다. 안도 타다오와의 협업을 통해 두 거장의 영감이 공명하는 공간, 이우환 갤러리로 초대합니다.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도시,
아를

이미지 출처: Unsplash의 Elena Popova

아를 기차역에서 내려 강 부둣가를 따라 시내로 이동했습니다. 별만이 쓸쓸히 빛을 내는 밤하늘 아래, 고흐가 걸었을 바로 그 론 강입니다. 19세기 말 고흐의 외로운 시간 속에서 영영 멈춰버린 듯한 정적이 강가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도심에 다다르니 고대 로마 시대의 영광과 역사를 품은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형극장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21세기의 아를은 시골 동네 같은 소박한 도시이지만, 사실 소도시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론 강과 지중해가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한 이곳은 로마 시대에는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고, 많은 수도원과 대성당이 자리했던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유적 복원과 유지보수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진 덕분에 도시의 정체성이 오롯이 유지되고 있지요. 원형극장을 둘러싼 16세기 중세 시대의 낡은 건축물 사이 골목길에서도 고풍스러운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집집마다 알록달록 페인트 칠해진 창문들은 마치 고흐의 캔버스 속 붓터치 같습니다.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 도시의 골목길은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으로 인도해주는 듯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아를 이우환 갤러리(Lee Ufan Arles) 공식 웹사이트

도심에 위치한 ‘이우환 갤러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2014년에 개관한 이 갤러리는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공간입니다. 16세기에 지어진 석조 건축물을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한 이우환 갤러리는, 역사적 유산과 현대 예술이 만나는 독특한 공간입니다. 이우환은 서울, 뉴욕 등의 대도시 갤러리에서 협업 전시를 자주 선보이며, 그의 이름을 딴 갤러리가 이미 부산과 일본 나오시마에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부산 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이 번잡한 도시 속에서 고요한 숨 같은 장소라면,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은 자연과의 정적이고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아를의 이우환 갤러리는 또 다른 결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죠. 로마 시대 유적과 현대적 건축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이우환의 조각은 단순히 물질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시간과 문명의 경계를 탐구하도록 이끕니다. 자연과 인간, 동양과 서양의 만남, 그리고 아를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우환과 안도 타다오의 영감이
공명하는 곳

이미지 출처: 아를 이우환 갤러리(Lee Ufan Arles) 공식 웹사이트

이우환과 안도 타다오의 협업은 2010년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나오시마는 일본의 현대미술 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자연, 예술, 그리고 건축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유명합니다. 안도 타다오는 자연광과 콘크리트를 활용해 건축과 환경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어우러지도록 설계했으며, 이우환의 작품은 그 공간 속에서 새롭게 빛을 발했습니다. 두 예술가는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면서도 본질적으로 비움과 관계의 미학이라는 공통된 철학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두 거장의 협업은 프랑스 아를로 이어졌습니다. 아를의 이우환 갤러리에서도 기존 건물의 구조와 재료를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자연광과 미니멀리즘을 활용하여 이우환의 작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의 협업은 단순히 작품과 건축물의 결합이 아니라,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예술적 대화의 실현입니다. 관람객은 그 관계의 일부가 되어, 작품과 건축이 이끄는 철학적 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우환 & 안도 타다오, Relatum – Ciel sous terre, 2022, Lee Ufan Arles

이우환은 “Relatum” 시리즈를 통해 사물과 사물, 그리고 그것들이 놓인 공간 사이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그는 자연에서 채집한 돌, 나무 같은 재료와 인간이 가공한 금속, 유리 등의 인공적 재료를 조합합니다. ‘Relatum’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철학적 용어로 ‘관계 속에 있는 것’ 또는 ‘관계를 맺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이는 사물이나 존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개념을 함축합니다.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서로의 경계선 안으로 침범하는 행위가 불가피하지요. 이우환의 조각들은 외부인인 관람객이 그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각들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를 넘어,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공간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됩니다.


고요하고 시적인 몸짓,
이우환의 조각들

1) 땅 아래 하늘

이우환 & 안도 타다오, Relatum – Ciel sous terre, 2022, Lee Ufan Arles

첫 번째 방에서 노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벽 안으로 발을 내딛으며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 시작됩니다. 안도 타다오와 합작으로 만들어진 “Relatum – 땅 아래 하늘(Ciel sous terre), 2022”입니다. 매끄럽지만 차가운 콘크리트 표면은 도시적이면서도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지며, 그 안의 어둠은 시각적 감각을 점점 희미하게 만듭니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은 마치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는 여정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고, 시야가 흐려지는 순간, 어둠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주변의 미묘한 소리와 온도를 느끼게 만듭니다. 점차 시야가 밝아지며,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발 아래에 놓인 하늘. 하늘을 땅 아래에 투영함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연과 인간, 위와 아래, 그리고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합니다. 고흐가 아를의 정신 병동 창 밖으로 바라 본 하늘은 소용돌이였지만, 이우환의 창으로 바라본 아를의 하늘은 맑고 선명했습니다.

2) 그릇의 무한함

이우환, Relatum – Infinity of the Vessel, 2022, Lee Ufan Arles

“Relatum” 시리즈에서 자연 재료와 인공 재료가 만나는 순간은 단순히 시각적 대비를 넘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를 묻는 중요한 철학적 실험으로 작동합니다. “Relatum – 그릇의 무한함 (Infinity of the Vessel), 2022”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중심에 놓인 커다란 검은 수반으로 이끌립니다. 반사된 물빛이 천장과 벽을 타고 춤을 추듯 퍼져 나가며, 공간을 일종의 명상적인 장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물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빛과 어우러져 변화와 고요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조화는 **‘모든 존재는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주변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했습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정적인 형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간과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 위로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면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고흐가 소용돌이치는 하늘을 통해 고통과 해방을 그렸던 것처럼, 이우환은 물의 표면을 통해 고요와 생동의 공존을 이야기합니다.

3) 아를로 가는 길

이우환, Chemin vers Arles, 2022, Lee Ufan Arles

길은 언제나 시작과 끝을 품고 있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는 매 순간, 우리는 어디론가 향하지만 그곳에 닿기 전까지는 목적지의 얼굴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아를로 가는 길(Chemin vers Arles), 2022”은 그런 여정 속에서 마주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의 흔적을 이야기합니다. 돌과 빛, 금속판 위에 반사된 하늘은 관람객을 그 길로 초대합니다. 이 길은 아를이라는 도시로 이어지는 물리적인 경로인 동시에, 관람객이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내면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자갈로 덮인 공간은 일본의 전통 정원을 연상시키며, 고요한 명상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자연석들은 그 자체로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각각의 돌은 고유의 형태와 질감을 가지고 있으며, 인위적으로 조작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놓인 금속판은 마치 물의 표면처럼 주변의 빛과 그림자를 반사합니다. 작품 속에서 길은 단순히 이동을 위한 통로가 아니라, 관람객을 현재라는 시간 속에 온전히 머물게 하는 사유의 공간이 됩니다. ‘아를로 가는 길’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길은 어디로 이어지고 있나요?”

돌과 금속판, 그리고 주변의 침묵은 답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스스로의 걸음을 통해 그 답을 만들어가길 기다릴 뿐입니다.


WEBSITE : 아를 이우환 갤러리


이우환의 조각 작품들은 단순히 공간을 채우는 물질적 존재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은 돌과 금속, 빛과 그림자를 매개로 하여 인간과 자연, 시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관람객이 그 관계의 일부로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경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그의 작품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아를의 이우환 갤러리에서 만난 조각들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며, 관람객이 직접 그 답을 찾아가도록 유도합니다.

이우환의 예술은 단색화라는 평면적 정의를 넘어섭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관계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장입니다. 그의 작품 앞에서 느꼈던 울림과 경이를 선명히 기억하며, 그 사유의 여정을 기록한 아를에서의 작은 발자국을 마무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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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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