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전시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새롭게 문을 연 미술관들과 풍요로운 전시들이 쏟아졌고, 유명 전시는 예약조차 쉽지 않을 정도다. 전시를 좋아하는 필자는 더 많은 사람들과 전시를 향유할 수 있어 기쁜 마음이었다. 그런데 시선을 작품에서 전시장을 거니는 관람객으로 옮긴 순간, 의문이 들었다. 매번 다른 전시장을 찾는데 비슷한 얼굴을 보는 것만 같았다. 가면 갈수록 관람객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로 또래인 20-30대라는 점이었다. 그 밖의 연령은 손에 꼽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유아와 청소년, 노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차이가 눈에 보였다. 전시 관람을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여러 전시를 반복적으로 관람했고, 다른 한편에는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 있었다.
미술관의 문턱이 낮아지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바는 달랐다. 과연 미술관은 대중에게 친절하고 익숙한 공간일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라면,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관이 낯선 이유
미술관이 아직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유희 공간과 달리, 미술관이 지닌 무게감과 엄숙함이 가장 큰 이유다. 미술관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있다. 새하얀 벽,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단정하게 걸린 액자들. 이러한 미술관의 모습을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고 말한다. 예술 평론가 브라이언 오 도허티(Brian O’Doherty)가 지칭한 용어로 하얀 벽면에 조명과 온도, 습도를 정확히 조절해 진공 상태와 같이 만든 전시공간을 의미한다. 이후 이는 미술관의 기본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공간적인 특성은 관람객이 작품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외부의 자극을 모두 차단하여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 공간을 지배하는 작품들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일상과 동떨어진, 그만의 규칙과 문법을 지닌 순백의 공간은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크게 소리를 내거나 함부로 신체가 작품에 닿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기에 긴장을 쉽게 풀 수도 없다. 이로 인해 미술관은 여전히 ‘여유 있는’ 누군가의 ‘교양 있는’ 여가생활로 인식되곤 한다. 모든 이가 즐기기에 너무 조심스럽고, 어려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술관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는 전시회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높은 진입장벽이 되며, 한정된 집단만이 계속해서 향유하는 폐쇄적인 특성을 만들었다.
틈을 벌린 사람들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특성은 낯선 이가 들어갈 틈이 없도록 단단한 장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틈을 벌린다. 벽을 깨뜨리기 위해 정면으로 돌진하기도 하고, 꼭 그 벽을 넘어야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전혀 다른 길을 찾기도 한다.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지는 않다고 앞장서 말한 이들이 있다.
1) 예술을 관람하는 새로운 방법: 크리스토 자바체프와 잔-클로드
대지예술(Land Art)은 예술 작품은 미술관에서만 관람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뜨린다. 그 이름처럼 산, 바다, 도시 등 자연경관을 하나의 캔버스처럼 사용하는 예술이다. 196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대지예술은 기존 예술의 상업성과 화이트 큐브에 대한 반감으로 이를 벗어난 자연에서 작업하고, 작품을 완성한 예술 운동이다. 자연이 배경이 되는 만큼 작품의 규모가 매우 크다는 특징을 지닌다.
크리스토 자바체프(Christo Javacheff)와 잔-클로드(Jeanne-Claude) 부부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포장’이라는 아이디어로 작품을 선보였다. 선물 포장하듯 자연물과 인공물을 대형 천과 밧줄을 이용해 통째로 감싸는 방식이었다. 단순한 아이디어같이 들리지만, 현장 사진을 보면 그 압도감이 놀랍다. 또한 그들은 5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수십만에서 수천만 달러를 투자해 완성한 작품들을 단 몇 주, 짧은 기간 전시한 후 작품을 해체했다. 이를 통해 예술 작품은 누구도, 심지어 작가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사람들이 매일 오가는 익숙한 거리, 익숙한 건물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전시를 보려 마음먹지 않은 사람들도 자연스레 예술을 관람하고 경험하게 된다. 바다 위를 덮은 천을 걸으며, 개선문을 뒤덮은 천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결심하고 들어서지 않아도, 일상으로 스며드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2) 집에서 관람하는 예술: 류성실
또 다른 작가도 예술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채널을 고민했다.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인 류성실이다. 작가는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시대, 가장 익숙한 채널인 유튜브와 아프리카TV에 주목한다. 류성실은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인터넷 채널을 통해 작품을 공개했다. 가짜 뉴스를 뿌리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BJ ‘체리장’, 돈이 되는 건 무엇이든 사업화하는 자본가 ‘이대왕’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일등 시민권 얻는 방법, 희화화된 애견 장례식 등 기묘한 주제와 발상을 통해 자본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그는 온라인 플랫폼을 전시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불특정 다수의 대중과 만난다. 작가가 직접 온라인에서 실시간 반응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 또한 각별하다. 이대왕의 여행사 사업체인 대왕트래블 로고송을 누군가 한 시간 버전으로 만들어 업로드했다는 사연이다. 좋은 노래가 나왔을 때 한 시간 반복 재생 영상을 만들듯이 말이다. 관객 스스로 작품을 재창조시켰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이제 관객은 작품을 미술관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작품 앞에 서서 캡션을 읽고 작품의 의도를 고민하는 것만이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의 전부가 아니었다. 더 자유롭고, 접근하기 쉬운 영역으로 예술을 불러오자 향유하는 모습 또한 다양해진 것이다. 폭넓게 작품을 감상하고, 소비하고, 나아가 새롭게 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변화하는 미술관, 변화하는 사람들
예술 향유 경험이 더 멀리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작가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의 물리적, 심리적 진입장벽을 허물고 누구나 자유롭게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해야 한다. 관련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2019년 재건축 사례를 들 수 있다. MoMA는 대중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중심부 4층에 ‘마리-조세&헨리 크라비스 스튜디오(Marie-Josee and Henry Kravis Studio)’ 공간을 기획했다. 음악과 퍼포먼스 등을 통해 작가와 관객이 직접 만나는 공간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기존의 화이트큐브를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전시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전시와 늦게까지 문을 열어 퇴근 후에도 관람할 수 있는 대림미술관을 시작으로 했다. 작품을 관람하는 데서 나아가 QR코드를 통해 참여하고, 핸드폰 배경화면으로도 다운로드할 수 있게 제공한 요시고 사진전으로 유명해진 그라운드 시소가 있다. 전시장의 음악과 공간의 섬세한 구성, 옥상에 이르러 차 한잔 혹은 작품 속 눈밭 길을 걸어볼 수 있는, 고유한 감각으로 알려진 피크닉도 입소문이 났다.
작가와 기관 차원에서 새로운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작가는 미술관에서만 작품을 보여주고, 관객과 만나지 않는다. 미술관 또한 더 이상 새하얀, 어떠한 소음도 용납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정적인 공간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곳곳이 예술의 무대가 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생각하면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새롭게 문을 연 미술관들은 때때로 전시가 너무 가볍다는 아쉬운 평을 듣는다.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요소에 집중하다 보니 예술성보다 상업성이 우선이 되기도 한다. 적절한 선을 찾기 위해 보다 다양한 전시 주제와 체험 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반대로 전통적인 미술관들은 보수적인 전시를 지속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무조건 더 가볍고 쉬운 전시로 변화할 필요는 없다. 다만 더 친절한 안내와 구성으로 관객을 유인하고, 변화하는 흐름에 발맞춰 미술관의 발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단숨에 바뀔 수 없는 변화이지만, 전시회가 펼쳐지는 공간, 그 안에서의 경험엔 변화가 필요하다. 전시회가 친숙한 기존의 향유 계층에서 나아가 성별과 연령, 취향과 가치관이 각기 다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시회에서 느끼고 감각할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각자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해 보는 건 자기만의 예술관을 만드는 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분석하고 주관을 완성해가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작가와 미술관의 변화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개인의 변화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를 통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폭넓은 작품들을 감상하며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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