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

모든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생활을 위한 유니버설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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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간에서 유난히 작은 크기의 작품 해설을 더듬거리며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시력이 더 나빠진다면 이 해설을 읽을 수 있을까? 한 가지 가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만약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해진다면? 어린 아기에게 급하게 젖을 물려야 한다면? 훗날 나이가 들어 전시 공간에서 잠깐 서 있어도 쓰러질 것 같다면? 낯선 나라의 전시장에 외국인 관람객으로 방문하게 된다면?

이 가정이 가정으로 끝나지 않는 현실을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기준이 ‘대한민국 평균 성인 남성’에 맞춰진 우리 사회는 약간의 신체적, 경제적, 문화적 어려움을 겪는 즉시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급격히 소외되는 구조를 지녔다. 최근 다녀온 전시 공간을 잠시 떠올려보자. 관람객 유형은 극히 일부에 국한된다. 노령층, 임산부, 장애인, 어린이, 외국인이 모두 어우러져 편하게 전시를 관람하는 전시 공간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공공 문화시설은 성별, 신체조건, 연령, 국적 등과 상관 없이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시설이니만큼 사회적 약자가 겪는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공 전시공간은 어떨까?


전시 공간에서 불편을 겪는 사람들

전시 공간
이미지 출처: unsplash

모든 사람이 문화예술을 즐겁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공공 전시 공간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배리어프리(BF)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논의를 우선으로 수행하며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설계, 디자인하는 개념이다. 배리어프리 개념이 대중화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언급할 때 장애인만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앞서 전시 공간에서의 가정을 예시로 제시한 대로, 표준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곧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공공 전시 공간에서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부 사례를 살펴보자. 국립 및 서울, 부산시 관할 공공 전시 공간을 대상으로 한 조사 자료 내 사례를 참고하였다.

  •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과 음성 장치 안내는 일부 장소에만 표시되어 있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승강기, 화장실, 전시 내부 해설 등에는 점자가 표시되어있지 않다.
  • 경사로는 설치되어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가파르거나 유모차,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폭이 좁다.
  • 안내 데스크나 물품 보관소의 높이가 너무 높아 어린이, 휠체어 이용자들은 접근하기 어렵다.
  • 전시실 내 휴식용 벤치가 없어 거동이 어려운 노인을 비롯한 체력이 약한 관람객에 대한 지원성 고려가 부족하다.
  • 수유실이 없거나, 수유실 내 커튼 등 가림막이 없다.
  • 뮤지엄샵이나 휴식공간 등 안내판이나 세부 설명은 모두 한국어로만 표기되어 있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탄생

1) 유니버설디자인이란

다양한 사람들의 손
이미지 출처: unsplash

유니버설디자인은 배리어프리에서 나아가 장애인을 포함해 임산부, 노인, 어린이, 외국인 등 모든 사람으로 대상을 확대한다. 즉, 특정 대상이 아니라 되도록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디자인을 지향하며, 상대적 약자인 특정 이용자들이 전시 공간에서 소외나 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공간을 계획, 설계하는 것이 유니버설디자인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의 유니버설 디자인센터에서 개발한 유니버설디자인 4원리에서는 기능상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기능 지원 디자인, 상품이나 환경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수용 가능한 디자인, 장애물이 제거되어 접근 가능한 디자인, 안전사고 등의 문제를 방지하고 제거한 안전한 디자인을 제시하고 있다. 공공 전시 시설은 이 4원리를 반영해서 전시 공간을 방문하는 모든 방문객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2) 유니버설디자인은 왜 필요한가

그림을 보는 사람들
이미지 출처: unsplash

전시 문화 공간의 개선은 고령화, 세계화 등 우리 사회의 급격하고 다양한 변화를 고려했을 때 필수적이다. 우리나라는 세계화 흐름에 맞춰 다양한 국적, 인종이 모여 사는 다문화 국가에 본격 진입했다. 이제는 단일 인종, 문화, 언어만으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다. 고령화는 어떤가. 2021년 통계청 기준으로는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전체인구 중 16.5%를 차지하며, 2025년에는 초고령화(고령인구 비율 20% 이상) 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

문화를 즐기는 수준도 높아졌다. 소득수준의 증가와 교육 수준 향상으로 문화예술 생활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문화 욕구를 충족하는 이용자 수는 증가하면서 이용자 연령층과 대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매년 정부에서는 사회적 약자 계층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발표하기도 한다. 문화예술의 영역이 그만큼 ‘인간답게 살기 위한 활동 중 하나’로 인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다방면에서 급격히 일어나고 있는 사회 변화를 감안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한민국 표준 남성’에 맞춰진 일관된 문화예술 공간의 디자인은 반드시 변화를 꾀해야 한다.


모두를 품은 전시공간

이용자 각각의 요구를 존중해 공간을 재설계하고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선례들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접하기 쉬운 장애인 전용 안내판이나 외국어 안내 책자부터 독특한 전시와 프로그램까지, 국내외 곳곳에서 유니버설디자인을 적용한 박물관, 미술관들의 특별한 사례를 소개한다.

1) 뉴욕현대미술관 언어 가이드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미지 출처: FHD

낯선 나라에서 그 나라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필수 여행코스다. 하지만 주로 그 나라의 언어와 영어 등 주요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므로 전시 작품은 사전 공부 또는 외국어로 진행되는 가이드를 들을 수밖에 없다.

뉴욕 한복판의 미술관에서 한국어로 된 전시 가이드를 듣는다면 어떨까?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는 한국어를 비롯한 10개 언어로 박물관 컬렉션과 특별 전시회의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다. 해당 가이드를 듣기 위해 특정 시간에 찾아갈 필요도 없다. MoMA 앱만 설치하면 온라인으로 다양한 가이드를 선택해 들을 수 있다. 디지털 기기를 조금만 다룰 수 있다면, 외국인이라도 풍부한 해설과 함께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이와 별개로 MoMA에서는 지적, 발달 장애인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창작 체험 워크숍을 운영하거나, 치매 환자를 위한 미술 감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용자들을 고려하는 전시 환경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2) 루브르박물관 터치갤러리

루브르박물관 터치갤러리
이미지 출처: Musée du Louvre

예술은 눈으로만 감상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리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독특한 갤러리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이 관람하는 작품 중 일부의 주조 틀을 손끝으로 만져볼 수 있는 터치 갤러리(The Touch Gallery)다. 이곳은 장애인 관람객을 주요 타깃으로 설정해 만들어졌지만, 새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예술을 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어린이를 비롯한 다른 관람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다양한 감각을 이용한 전시 공간 사례는 국내에도 존재한다. 서울공예박물관에는 촉감, 후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관람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이 있다. 주요 작품들의 복제, 확대 모형을 설치해 직접 만져보거나 향을 맡아볼 수 있는 체험형 공간이다. 이러한 감각 전시물에는 작품 설명 판에 점자를 병기하고, 전시물 위치를 안내하는 오디오 전시 가이드를 별도로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공예라는 전시품 특성을 고려했을 때, 몸으로 체험하는 관람 환경의 조성은 이용자들이 능동적으로 문화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인 셈이다.

3)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어린이 도슨트

실제 전시 현장에서 해설하는 어린이 도슨트
실제 전시 현장에서 해설하는 어린이 도슨트, 이미지 출처: 서대문구청

우리나라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2008년부터 어린이 도슨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박물관은 어린이 이용자 수가 많은 만큼 어린이를 주요 타겟으로 한 전시 설명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 곳이다. 어린이 도슨트는 어린이 이용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전시 설명을 제공하며, 이용자들이 현장을 안전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직접 지도하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관람이 제한되었을 때는 어린이 전시해설이 중단되었을까? 어린이 도슨트가 직접 안내할 전시물을 선택하고 학예사와 논의해 대본을 작성, 전시해설을 진행했다.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가 가득한 전시 공간에서 어린이 이용자는 쉽게 고립된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린이 도슨트는 최고의 전시 가이드이다. 어린이 도슨트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전시물을 해설해주면서도 아이들 입장에서 궁금할 법한 내용을 재치 있게 설명해주면, 어린이 이용자는 물론 동행하는 보호자나 지나가던 일반 관람객까지 발길을 멈추고 해설을 듣게 된다고 한다.

어린이 도슨트 프로그램은 실제 도슨트 역할을 수행한 어린이들에게도 문화예술, 나아가 세상과 사회를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된다. 단순히 관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전시 공간에서의 경험이 특정 이용자들에게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열어주는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국립현대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이미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에서 지칭하는 ‘모두’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였다. 전체 가구의 30% 이상이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으며 반려인 숫자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사회 특성을 고려해 반려동물, 그중에서도 개를 위한 미술관을 기획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그림 전시뿐 아니라 관련 주제에 대한 토크, 스크리닝, 퍼포먼스 등 여러 프로그램이 함께 진행되었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실제 전시 현장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실제 전시 현장, 이미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이 프로그램은 수의사, 조경가, 건축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한 결과물이다. 특히 적록생맹인 개의 특징을 고려해 제작된 그림과 관람 공간 마련 등, 관람객을 배려한 섬세한 전시 공간 구성이 화제가 되었다.

이 전시는 가족 구성원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어엿하게 자리 잡은 반려동물을 관람객으로 인정하고, 현대사회에서의 공적 공간과 미술관의 역할을 고민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공공장소, 특히 미술관에서 반려동물은 사회의 일원이자 우리의 가족 구성원으로 실질적으로 존중받고 있는가? 전시 공간 자체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평상시에는 쓰임새를 몰랐던 신체 부위에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인데 생활에서 예상 못 한 불편을 겪으며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일시적인 장애를 잠시 안았을 뿐인데도 일상 공간은 온갖 장벽으로 가득하다. 하물며 일상이 곧 장벽과의 투쟁인 사람들은 어떨까. 사회가 제거하지 않은 장벽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장애는 마땅히 감내해야 할 불편 이상으로 극심한 크기의 고통으로 돌아온다.

우리 모두 평생 사회가 정한 최상의 컨디션과 규격대로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최소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나이 들어 노인이 되고, 크고 작은 장애를 겪으며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불편을 겪을 때 비로소 ‘극도로 이상화된 정상’을 기준으로 한 사회 가이드라인에 의문을 제기하면 너무 늦다.

다행스럽게도, 사회약자를 포함한 모든 이용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재설계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나아가 전시 공간 이용객을 논 휴먼(non-human)의 영역까지 확장하며 사회 구성원을 정의하는 담론을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이런 흐름이 우리나라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 변화의 확산 속도가 더디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변화의 주도권을 당장 불편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이나 공간 운영자들의 몫으로만 방치해두어서는 안 된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이 변화는 곧 나를 위한 진보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저 침묵하거나 외면한 채 문제를 방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전시시설 유니버설디자인 가이드라인,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2022
  • 윤지영 외 3명, 공공 문화공간의 유니버설디자인 적용 현황 연구 – 부산시 박물관 및 미술관을 중심으로- , 2020. 동서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과
  • 장소율, 전시공간의 유니버설디자인 적용성 평가에 관한 연구, 2015, 연세대학교 생활환경대학원 공간디자인 석사학위
  • 하승아, 공공문화시설의 유니버설디자인 적용에 관한 연구, 2014,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공공디자인행정 석사학위
  • msv letter, 뮤지엄 넥스트 : 이 시대 뮤지엄이 나아가야 할 방향 두번째 이야기(2022.11.1)
  • 뮤지엄뉴스, 모두를 위한 박물관-박물관과 유니버설디자인2(2022.1.11)
  • 서대문소통창구, (2020.6.5.), https://blog.naver.com/sdmstory/221990780869
  • 중부일보, “개를 위한 전시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모두를 위한미술관, 개를위한미술관’ 展 (2020.9.21)
  • 뉴욕현대미술관, 루브르박물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이한빈

이한빈

고전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방황하고 반항하며 만드는 담론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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