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가 절실한 순간입니다. 전쟁, 재난, 리스크, 구조… 최근 신문 1면을 가득 채운 단어입니다. 위험이 가득한 지금, 나와 다른 존재를 배척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죠. 나아가 내가 품은 공간을 열어준다는 뜻인 것도 같습니다. 환대를 한 가지 포즈로 치환해보라 한다면, 바로 ‘포옹’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예술가들은 포옹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은 동시대 작가들의 그림 6점을 준비했습니다.
불완전한
1) LY
일본 도쿄를 기반으로 하는 LY(1981~)의 캐릭터 ‘LUV’는 작가의 감정, 상상 등을 대변합니다. 그림자처럼 짙고 길쭉한 캐릭터는 아크릴 물감으로 채워진 캔버스 너머를 응시하며 무르팍을 껴안습니다. 배경도 패스트푸드점 앞, 서점 근처, 스케이트 보드장 등 도시 곳곳에 해당하는데요. 무채색이 너무 선명해서 되려 불안감이 느껴지는 곳에서 자신을 감쌉니다. 혹시 외롭지 않을까 걱정하진 않아도 됩니다. LUV는 초기작에서 홀로 있었지만 최근작에 다다를수록 강아지, 친구와 함께 등장하거든요. 작품 제목을 다시 읽어보세요. 요즘엔 그저 버거를 먹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2) 이진주
이진주(1980~)는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는 느낌’처럼 아슬아슬한 모습을 밀도 높게 그립니다. 예고 없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처럼 작품 속 인물, 공간, 사물 등은 분절되고 뒤엉켜 현실과 다른 세상을 말합니다. 실제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자세와 파편화된 신체는 곧 넘어질 듯 연약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불완전과 불완전이 교차할 때 묘한 안정성이 생깁니다. 서로에게 기대며 위태로운 균형점이 만들어지기 때문인데요. 어떤 질문에는 모호한 문장 역시 대답이 되는 것처럼 생략 속에서 숨 쉴 틈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3) 안젤라 딘
‘유령 사진(Ghost Photographs)’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안젤라 딘(Angela Deane, 1977~)’은 1960년대 빈티지 사진 속 사람들을 유령 형상으로 덮습니다. 불투명한 아크릴 물감 뒤에 가려진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표정을 하는지 등은 가려지죠. 사적인 추억에 불과했던 사진이 유령이라는 익명성을 입자, 감상자 모두가 자기의 기억을 투영할 수 있도록 해방됩니다. 개별성을 지움으로써 오히려 각자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장’이 된 겁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유난히 서로를 감싸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좋은 기억을 많이 남기고픈 욕구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어떤 기억이 떠오르시나요?
다가서는
1) 다고우
중국 일러스트레이터 ‘유저우 페이거우(Yuzhou Feigou)’는 ‘다고우(Dagou)’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며 성소수자의 사랑을 그립니다. 작가가 느끼기에 그가 속한 사회는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배경 탓인지 신상 노출을 피하고, 설명에도 제한을 둡니다. 그러나 그림만큼은 고요하지만 관능적이며, 부드럽지만 직관적입니다. ‘사랑’을 표현할 때는 키스, 일몰, 꽃다발, 탄생 등 많은 키워드에 ‘포옹’과 ‘눈물’도 같이 꼽습니다. “내 안에 욕망이 있는 한,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말처럼 그는 적은 문장과 많은 그림으로 내밀함을 드러냅니다.
2) 비비안 그레븐
독일 뒤셸도르프에서 활동하는 ‘비비안 그레븐(Vivian Greven, 1985~)’은 시각 이미지를 활용해 촉각까지 자극합니다. 캔버스화이지만 그래픽을 보는 듯한 색감에 광택감 있는 표현을 더해 마치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죠.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연결성’이라고 하는데요. 베르니니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인공적인 신체 형태는 성 구분을 무너뜨리고 그 어떤 감각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을 강조하죠. 영혼과 육체, 그림과 바깥은 각기 다른 세계가 아니라 서로 공명하는 것이라는 비비안의 말처럼 세상은 전부 연결된 유기체가 아닐까요.
3) 제임스 이즈
화가와 애니메이터가 만났습니다. 제임스 이즈(James R.Eads, 1989~)의 그림을 본 애니메이터 글리치(The Glitch)는 정적인 평면에 생명력을 더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탄생한 작품인데요. 흐르는 물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모션은 최면에 걸린 듯 묘한 평화로움과 현실에 없는 환상성을 부여하죠. 두 인물이 포옹을 하는 것인지, 우주로 추정되는 배경이 움직이는 건지 모호합니다. 이는 ‘만물은 다르지 않다’는 제임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음 그림으로 넘길수록 인물 간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예술가 저마다 그리는 대상도, 쓰는 화구도, 담는 의도도 모두 다르지만, 팔을 벌리는 행위가 가장 인간적인 자세임은 알겠습니다.
나로 태어난 이상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기에 ‘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옹은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려는 시도처럼 보이는데요. 정해진 결과가 있어도 특정 행위를 지속하는 건 때로 이상한 애틋함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