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만 치명적인 여성은 수 천 년 동안 예술의 주제가 되어왔고, 똑같은 레퍼토리가 이름만 바뀐 채로 수없이 반복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수많은 거장의 손에서 여성은 팜파탈(Femme Fatale)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특히 나체에 대한 검열이 비교적 강했던 시대에 나체를 묘사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이브는 이곳저곳에서 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며 등장한다. 이는 여성은 죄악에서 태어난 존재라고 가부장제 사회가 쉼 없이 일러주는 듯하다. 욕망을 가진 여성은 이브의 후예로, 언제 남성을 타락시킬지 모른다는 것처럼.
르네상스와 이브,
인류 최초의 팜파탈
탐스러운 붉은 과실이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있다. 나신의 여성은 이 나무에 몸을 기대고 유혹적인 몸짓으로 과실을 남자에게 건넨다. 젖혀진 팔 때문에 여성의 흉부와 가냘픈 허리선이 강조된다. 어찌 보면 이 그림에서 가장 유혹적인 존재는 붉은 과실이 아니라 그 과실을 건네는 아름다운 금발 여성이다. 남자는 이 유혹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멋쩍게 머리를 긁는다. 이 그림은 1526년에 그려진 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다. 크라나흐는 도나우 화파에 속하는 화가로 당시 비텐베르크 궁정 화가로 상류층의 취향을 잘 반영하는 회화를 여러 점 남겼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이 그림이 전달하는 아주 오래된 팜파탈의 서사다. 이 작품의 주제는 바로 ‘인간의 타락 Fall of Man’이다. 인류의 시조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짓는 최초의 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에서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원죄를 설명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타락의 죄는 여성의 타고난 성질 때문에 벌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아담은 다만 아름다운 여성의 유혹에 넘어간 피해자다.
중세기 비교적 비탄과 수치가 강조되던 ‘아담과 이브’ 도상이 이처럼 매혹적인 자태로 탈바꿈한 데에는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라는 시대적 배경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시 16세기 비텐베르크 궁정에서 높아진 고전에 관한 관심은 나체를 표현하는 데에 훨씬 자유로운 환경을 조성했고 루터의 새로운 기독교 종교관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루터에게 성적인 욕망 자체는 신이 창조해주신 자연스러운 섭리다. 그러나 루터는 여성과 남성 모두 성적 욕망을 지닌 존재나, 여성은 태생적인 유약한 성정 때문에 이를 다스리기 어렵다고 보았다. 마치 이브가 뱀의 꾐에 쉽게 넘어간 것처럼 말이다. 루터 신학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비난은 성을 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여성에게 부가된다. 루터에 따르면 젊고 아름다운 것 자체가 여성의 죄악이다.
살로메, 자비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 근대미술의 팜파탈
그렇다면 시대를 좀 더 근대기로 당겨보자. 그렇다면 기독교가 서서히 힘을 잃고 인간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근대 산업 사회는 어떨까. 이성이 드디어 여성을 팜파탈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했을까? 안타깝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에 대한 근거로 근대 문학과 미술이 보여주는 “La belle dame sans merci 자비 없는 아름다운 여인” 이미지를 살펴보자.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시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이 이미지는 여성을 미지의 마법과 연결한다. 고결한 기사는 마녀의 아름다움에 힘을 잃고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치명적인 여인은 기사뿐 아니라 라파엘 전파 화가들도 매료시켰다. 존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아서 휴즈 (Arthur Hughes, 1832-1915) 등의 작가가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이들의 그림에서 서정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 앞에 남성은 무력하다. 이들은 마치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을 전혀 억압하지 않았으며 남성은 모두 아름다운 여성의 사랑을 갈구하는 무력한 포로인 것처럼 묘사한다.
비슷한 시기 다른 인기 있던 팜파탈로는 구약에 등장하는 헤롯왕의 딸, 살로메가 있다. 살로메 역시 수많은 문학과 미술 작품의 주제가 된다. 그러나 살로메는 자비 없는 아름다운 여인보다 더 파괴적이다. 살로메는 여성임에도 세례 요한을 욕망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살로메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남성 권력자, 헤롯의 욕망을 이용한다. 그를 위해 육감적인 춤을 추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얻는다. 그리고 그녀가 세례 요한에게 키스를 한 순간, 그녀는 헤롯왕의 권력에 맞선 죄로 병사들의 방패에 깔려 죽임을 당한다. 팜파탈 살로메의 이야기는 일종의 스릴러로, 그녀는 당시 안전한 공포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살로메는 가슴이 떨릴 정도로 매혹적이며 잔인하지만 결국 남성 권력을 넘어서지 못하는, 정복할 수 있는 괴물이다. 또 살로메를 묘사하는 이미지는 당시 사회의 오리엔탈리즘과 흔히 결합한다. 19세기 서구 남성이 가지고 있던 ‘동양’의 야만적이지만 매혹적인 이미지가 살로메와 함께 소비되는 것이다. 이국적이고 아름답지만 결국에는 단죄되는 불가해한 괴물, 그것이 살로메다.
히치콕 블론드,
느와르 팜파탈의 전형
이번에는 조금 더 우리 시대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영화 시대에서는 팜파탈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필자는 알프레드 히치콕(Sir Alfred Joseph Hitchcock, 1899-1980) 의 영화에서도 그 전형을 찾아보고자 한다. 히치콕 작품의 여주인공, 히치콕 블론드가 바로 현대 영화 시대의 살로메가 아닐까. 냉소적이고 차가우면서도 유혹적인 금발의 여인들은 극에 긴장감을 더해주며 남성 주인공의 유혹에도 끄떡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에는 비참한 결말을 맞거나 남성에게 굴복한다.
1958년 작 <현기증 Vertigo>의 매들린 엘스터가 대표적인 히치콕 블론드다. 그렇다면 히치콕 블론드의 주변 남성인물들은 어떨까. 그들은 자신을 마치 아담처럼, 헤롯왕처럼 묘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유약함을 강조하며 자신을 피해자이자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리고자 노력한 인물로 그려낸다. 남성인물의 유약함은 일종의 면죄부로 작동한다. 남성은 악한 사회의 고독한 피해자로 과거의 죄에서 구원되지만, 욕망 혹은 사랑에 넘어간 여성은 구원받지 못하고 결국 파멸한다. 히치콕 블론드의 이미지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다시 다른 영화로 확산하며 느와르 영화의 전형적인 팜파탈을 공고하게 만든다. 히치콕 영화로부터 약 50년 후 개봉한 007 시리즈의 2006년 작 <카지노로얄 Casino Royale)을 떠올려 보라. 영화에 등장하는 본드걸 베스퍼는 여전히 히치콕 블론드가 영화 속에 등장함을 잘 보여준다.
권력자로서의 팜파탈의 이미지는 여성의 능력을 단순한 ‘아름다움’과 ‘신체’의 영역에 고착시키고, 체제반역자로서의 팜파탈의 이미지는 여성의 주체성을 비이성과 야만에 기인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여성에게 주어진 어머니로서의 숭고한(그리고 유일한) 기능을 배반한 자들로, 정상 사회에서는 솎아져야 하는 존재들이자 단순한 관음의 대상이다. 팜파탈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인간성을 빼앗긴 존재다. 예술은 팜파탈을 통해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혹적으로’ 여성 혐오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2023년에 팜파탈의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은 조금 지루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팜파탈의 이미지가 이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확산되어 왔다는 것은 다시금 강조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과거의 전형이 가진 혐오와 그 다양한 유형을 알아야 우리가 그것에 저항하는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 강관수, “느와르 영화에서의 팜므파탈의 위협”, 문학과 영상, 문학과영상학회, 2003, p3-82.
-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 시공아트, 2009
- Susan C. Karant-Nunn and Merry E. Wiesner-Hanks, Luther on Wom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