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꾸미기나 카페 투어를 좋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디자인 가구로 관심 영역이 확장되기 마련입니다. 알아가다 보면 몇십 년 전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사랑받는 제품도 상당수지요. 그중엔 유독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가구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탄생 비화, 즉 ‘전설의 시작’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 준비했어요. 어디선가 꼭 한 번쯤 마주했을 3가지 오리지널 가구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모두 짙은 여운이 느껴지는 사연들이니 읽고 나선 그 가구가 더욱 빛나 보일지 몰라요.
바실리 체어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바실리 체어입니다. 오늘날 숱한 유명인들의 집에서 목격되곤 하죠. ‘가장 유명한 바우하우스 체어’라 불릴 만큼 대단한 명성을 가진 제품입니다. 이 의자의 디자이너는 마르셀 브로이어로, 바우하우스의 1기 졸업생이자 교수직까지 지낸 인물이에요. 헝가리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그는 본래 화가와 조각가를 꿈꾸던 학생이었다고 해요. 그러다 신생 학교인 바우하우스에 입학하면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합니다.
1920년대 중반, 브로이어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의자를 개발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준 건 출퇴근길에 타던 자전거였어요. 연구 끝에 그는 자전거의 뼈대인 강철관으로 의자를 만드는 데에 성공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강철관 의자가 탄생했지만, 정작 그는 이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해 한동안 작업실에 방치해두고 말아요.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제품을 발견한 건 바실리 칸딘스키였습니다. 추상 미술의 거장이자 바우하우스 동료였던 그는 의자를 보자마자 찬사를 보냈고, 결국 브로이어는 용기를 내어 제품을 출시하게 됐죠. 칸딘스키에게 고마움이 컸던 브로이어는 의자 이름까지 ‘바실리 체어’로 정하며 그 마음을 전했답니다.
임스 라운지 체어 앤 오토맨
디자이너계 전설의 커플을 딱 하나 꼽는다면 단연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를 골라야겠죠? 천재적인 감각으로 가구 역사에 획을 그은 이들은 미국 크렌브룩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시작은 한 공모전 준비 당시, 후배였던 레이가 찰스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은 데서부터였어요. 이때 손발이 유난히 잘 맞았던 이들의 사이는 동료에서 인생의 파트너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임스 부부는 단순한 디자이너 그 이상의 크리에이터였어요. 가구 디자인부터 건축, 영화 제작까지 함께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죠. 가장 잘 알려진 건 아무래도 ‘임스 체어’라 통칭하는 제품군인데요. 20세기 중반 혁신의 아이콘이라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임스 라운지 체어 앤 오토맨은 사실 단 한 명을 위해 탄생한 제품이에요.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가 그 주인공입니다. ‘선셋 대로’, ‘뜨거운 것이 좋아’ 등 고전 명화를 다수 제작한 그는 평소 부부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해요. 때는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기, 늘 바쁘고 정신없던 빌리를 위해 이들은 오랜 시간 편하게 머무를 의자를 선물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친구를 위한 마음으로 만든 것은 반세기 후에까지 사랑받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임스 부부도 이 결말을 과연 짐작했을까, 문득 궁금해지네요.
E1027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 디자이너의 명단에 이 사람이 빠질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아일린 그레이는 런던에서 순수 미술을 공부한 이후 파리에서 건축과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며 차츰 이름을 알렸어요. 그러나 1900년대 초반은 여성이 활동하기엔 제약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녀 또한 질투 어린 시선과 무시를 받는 일이 잦았죠. 이때 아일린에게 위로이자 큰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연인 장 바도비치에요. 아일린은 그의 이름을 빌려 디자인숍을 오픈하며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1926년 그녀는 프랑스 남부 해변에 연인과 함께 머무를 별장을 짓습니다. 위대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인정하고, 훗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난 건물인데요. 마치 암호명 같은 이름 E1027엔 로맨틱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아일린Eileen’의 E, 연인인 ‘장Jean’의 J는 알파벳의 10번째 글자고요. ‘바도비치Badovici’의 B는 2번째 글자, ‘그레이Gray’의 G는 7번째 글자로 이를 모두 나열하면 E1027이 됩니다. 아일린은 그녀가 디자인한 사이드 테이블에도 동일한 이름을 붙였어요. 가장자리의 기둥이 상판을 받치는 구조로 소파나 침대 옆에 바짝 당겨쓰기 편리하죠. 이 제품을 비롯해 E1027 하우스는 모두 아일린이 직접 제작한 가구들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위 3가지 사연을 정리하고 나니 성경 속 구절이 절로 생각납니다. 위대한 디자인 가구도 사실 누군가를 향한 애정에서 싹이 튼 것이잖아요. 동료에 대한 깊은 관심, 가까운 이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려는 마음 등 말이에요. 이는 심지어 우리가 이따금 떠올리는 생각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역시 세상을 바꾸는 데엔 꼭 엄청난 동기가 필요한 건 아닌가 봐요. 원대한 꿈보다 작게 품는 확실한 의지가 더 강할 때가 있는 것이죠. 어쩌면 의도치 않게 전설을 탄생시킨, 사연의 모든 주인공에게 감사를 표하며 우리 주변에서 작게나마 변화시킬 뭔가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