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를 진귀한 세계를 하나라도 더 만나기 위해 한 달여의 시간 동안 계획을 짜고, 티켓팅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시원하게 울었다.
마지막 영화를 보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숙소로 향하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에는 큐레이터와 도슨트가 있고, 어쩌면 가장 직관적인 형태의 예술인 ‘음악’은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관에는 가이드가 없다. 영화는 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추상적’이며 ‘지루하다’고 평가받곤 하는 독립영화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독립영화가 어려운 이유 – 이야기
우리는 어릴 때부터 눈을 사로잡는 시각 효과와 매력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거대한 산업의 톱니바퀴에서 탄생한 영화들을 주로 만나왔다. 관객들은 등장인물의 서사를 따라 영화에 몰입하고, 장관이 줄줄이 이어지는 클라이맥스를 감상하며 희열을 느낀다. 이런 영화들은 대체로 이야기가 영화 세계의 중심에 있다. 서사 구조가 명확하며, 영화의 세계를 지탱하는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이 끝나는 순간, 영화 또한 끝난다. 멀티버스로 대표되는 마블 유니버스와 SF, 액션 영화들의 주된 구성이다.
영화가 이야기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다소 ‘추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의 주체가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은, 다시 말해 영화 속에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영화적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매혹적인 스펙터클도, 당장 응징해야 할 악이나 갈등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릴없는 누군가의 일상을 보여주는 게 전부인 영화도 있다.
이야기의 궤도를 벗어난 영화들
영화적 세계를 지탱하는 게 이야기가 아닐 때, 우리는 거기에 가려져 있던 다양한 가능성과 조우한다.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는 아주 좋은 예시로, 인물들이 나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대화를 나누는 옴니버스 영화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고, 뚜렷한 갈등조차 드러나지 않으며 (물론 이기팝, RZA 같은 유명인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내용’이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내용이 없다는 것이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작들 또한 그런 ‘내용 없음’의 연속이다. 후기로 가면 갈수록 이야기는 더욱 단순해져, 혼기가 찬 자식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는 게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거기에는 특별히 주인공이라 할만한 인물도, 비중 있는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오즈의 영화 속에서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의 공간감, 인물들을 잡아내는 구도, 마치 정물화같이 배치된 물건들에 눈이 가게 된다. 이렇게 영화의 내용이 아닌, 형식이 부상함으로써 영화는 ‘감각’할 수 있게 된다.
독립영화가 어려운 이유
– 롱테이크
독립영화가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쇼트(한 장면) 하나가 차지하는 길이에 있다. 롱테이크 기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이감은 독립영화를 처음 접한 많은 이들의 렘수면에 일조한다(독립영화에는 다양한 종류의 영화들이 있으므로 모두가 이렇다는 건 아니다). 필자가 기억하는 가장 긴 롱테이크는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에서 나왔는데, 마지막 시퀀스에 배우 양귀매가 우는 장면을 6분 넘는 시간 동안 담아낸다. 작고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유작, <24FRAMES> 또한 러닝타임을 통틀어 24개의 쇼트밖에 나오지 않는다. 1시간 30분 길이의 영화가 평균적으로 6~700개의 쇼트로 구성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나의 쇼트가 차지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를 구성하는 쇼트의 평균 길이(Average Shot Length, ASL)는 시대를 거듭하며 줄어들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화면에 머무르게 만드는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영화는 앞으로 더욱 빨라질지 모른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속도와 멀티버스 대신 잃어버린 것들
허문영 평론가가 표현한 것처럼, 영화는 ‘간격’을 다룬다. 쇼트와 쇼트, 프레임의 심도,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우리는 때로 감독조차도 의도하지 않았을 어떤 분위기와 감정을 감지해낸다. 만화가 ‘칸’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2차원 종이에 갇힌 자신의 몸에 의미를 부여하듯, 우리는 영화 속의 간격에 상상과 가능성을 틈입한다.
속도와 멀티버스를 얻음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그것은 바로 ‘간격을 감각하는 능력’이 아닐까. 마치 여행에서 교통수단이 빨라질수록 원하는 곳까지 단숨에 갈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사이의 풍경을 놓쳐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에는 시스템과 매뉴얼에는 없는 과정으로써의 사유,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유가 존재한다. 독립영화가 어렵다는 것, 그 간격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타인이 만든 이야기와 세계관만을 따라왔으며, 독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브이로그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시대, 시작과 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OTT 서비스를 두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어쩌면 바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관의 방침과 저작권을 이유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우리의 역사에는 공백이 생기니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번아웃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평범하게 쓰이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세상이 정해준 성공이나 성장 따위가 아니라 자기만의 공백과 간격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영화관이 여전히 유효하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에는 공백과 간격이 있으며 영화를 빌어 우리만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진정으로 나다운 시간이기도 하니까. 스코세이지가 증언했던 ‘시네마의 종말’은 어쩌면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 시네마테크 부산, <늦봄> 이후에 나타난 오즈의 영화미학, 박성수, 2004
- KMDB, 스파이브릿지, 허문영(2015.12.14)
- 최승원, 시대 변화에 따른 영화영상의 페이스에 대한 고찰 – 영상편집을 중심으로,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