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의 소리는
젠더화될 수 있는가

목소리의 젠더
허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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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체로 섹스(sex)와 젠더(gender)를 구별한다. 섹스는 생물학적 성으로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되는 것이라면, 젠더는 사회와 문화적 환경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이 같은 보편적 생각에 ‘문제(trouble)’를 일으킨다. 사회적 성뿐 아니라 생물학적 성 또한 구성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리 연구(sound studies)는 소리란 순수하게 울리는, 가치중립적인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화된다는 구성주의적 입장을 따른다는 점에서 젠더 연구와 닿는다. 이 글은 ‘자연적인 것’ ‘본질적인 것’ 역시 특정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젠더 연구와 소리 연구를 바탕 삼아, 본래적 소리라고 여겨지는 신체의 소리, 곧 목소리가 젠더화되는 역사적 단면을 살핀다.


섹스와 젠더의 경계 허물기

이미지 출처: iStock

주디스 버틀러의 대표 저작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1990)에 따르면 젠더뿐만 아니라 섹스 또한 사회적 구성물이다. 다른 무엇과 마찬가지로 신체또한 언제나 문화적 맥락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절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이는 성적 본질, 자연의 섭리처럼 보이는 해부학적 본성 역시 긴 역사 속에서 구성되어 온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생물학적 성이 구성된다는 생각은 성에 관한 기존의 이분법, 섹스와 젠더 사이 구분을 허문다.

젠더는 사회가 성에 기대하는 바를 반복하고 수행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버틀러가 주장하는 ‘수행성 이론’(performativity)이다. ‘자고로 남자란 ~해야만 해.’, ‘여자가 ~해서 쓰나!’하는 언명이 사회 속에서 반복되고, 그 언명을 수행하는 과정은 성에 관한 개념에 이념적 당위를 부여한다. 그 당위는 계속해서 반복, 수행되고 재생산되는 경로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인냥 착각하게 하는, 이른바 ‘제2의 자연’이 된다.


젠더화된 신체, 목소리

목소리
이미지 출처: Anastasia, Adobe Stock

젠더 연구와 더불어 소리 연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자연의 영역마저도 사회적 환경에 따라 구성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소리 연구는 소리의 물리적인 속성을 과학적 차원에서 가치중립적으로 다루는 기존 음향학과 구별된다. 소리 연구는 소리란 객관화된 물리적 현상이라는 생각을 넘어 소리에 내재된 의미를, 소리에 투영된 사회적 욕망을 해독해 소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다. 이 같은 소리 연구의 접근은 ‘자연의 속성’이라고 생각되는 ‘신체의 소리’를 다룰 때 젠더 연구와 만난다. 음악학자 김경화의 연구 “소리와 젠더: 소리, 음악, 문화 관행과 담론의 젠더화”(『음악논단』 47집, 2022)는 ‘목소리’를 통해 소리가 어떻게 젠더화되는지 살핀다.1)

1) 이어서 소개하는 내용은 본문에 언급한 음악학자 김경화의 연구를 발췌∙요약한 것이다.


유혹, 혹은 위협

윌리엄 에티, “세이렌과 오딧세우스”, 1837, 유화
윌리엄 에티, “세이렌과 오딧세우스”, 1837, 유화

목소리가 젠더화된다는 것은 목소리에 관한 의미나 관념이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기보다 사회와 문화적 환경에 따라 구성된다는 점을 뜻한다. 목소리를 젠더화하는 역사는 고대 그리스 신화까지 뻗친다. 고전 문학 비평가 앤 카슨(Anne Carson)은 고대 그리스 문학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대체로 ‘위험’과 결부된다는 점을 밝힌다. 가령 사이렌과 키르케의 목소리는 몹시 아름다운 노래로 모두를 황홀경에 빠지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한 번 빠지면 결코 헤어나오지 못해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소리이기도 하다. 고르곤의 목소리는 위험을 넘어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다. 여성을 형상화하는 고르곤의 얼굴은 험악한 인상에 이리저리 뒤틀리는 뱀 머리카락을 지닌 괴물이다. 게다가 동물의 포효에 가까운 고르곤의 외침은 악마적 여성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규범과 질서를 이탈한 위협으로 그려진다. 한편 나이팅게일의 서정적 지저귐은 연약한 여성의 징표다. 고전문학 연구자 찰스 시걸(Charles Segal)은 이렇듯 서구의 남성중심적 시각이 투사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매력적이면서 위험한 것, 혐오스러운 공포의 대상이면서 무력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이중화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상냥함이라는 허구

과거 교환 전화 시대 교환원
이미지 출처: The Telecommunications History Group Inc.

혹 너무 옛날이야기라 와닿지 않는가? 목소리가 젠더화되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관념이 반복되고, 수행, 재생산되는 일은 좀 더 가까운 과거에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카라 월리스(Cara Wallis)는 목소리의 젠더화 문제를 전화기라는 매체와 함께 살핀다. 과거 교환 전화 시대 교환원의 목소리에 관한 그의 논의는 특히 흥미롭다. 월리스는 전화 교환원이 처음엔 여성의 직업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남성 직원의 무례함에 여성 직원들이 고용되기 시작했고, 여성 교환원이 기업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확산되자 전화 교환원의 이상적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미지란 교양 있는 중산층 백인 여성. 이 같은 허구적 인식은 이제 여성 교환원들의 수행으로 딱딱하게 굳어진다. 교양 있는 여성의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를 내며 이상적 교환원의 목소리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상화된 여성 교환원 이미지는 여성의 목소리란 모름지기 상냥하고 친절한 것이라는, 진짜인 듯한 허구적 관념, 곧 제2의 자연이 된다.


다이아만다 갈라스(Diamanda Galás), 메러디스 멍크(Meredith Monk),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같은 여성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통해 화석화된 젠더 관념을 해체하려는 실험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의 음성비서, 내비게이션이나 밥솥의 안내말, 공원 안내방송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라. 이 장치들의 안내 목소리가 대개 여성의 것으로 초기 설정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전화 교환원 목소리의 젠더화 현상 역시 과거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젠더 이론과 소리 연구는 어떤 경우라도 무너질 수 없다고 믿어온 자명한 사실들을 뿌리채 뒤흔들어 해체한다. 그 뒤흔들기는 우리 곁에 산재한 또 다른 가짜 자연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부추긴다. 전복되지 못할 것은 결코 없다.

  • 김경화, “소리와 젠더: 소리, 음악, 문화 관행과 담론의 젠더화”, 음악논단 47집, 2022
  • 김경화, “페미닌 보이스: 여성 퍼포먼스 아트에서 목소리의 수행성과 젠더 롤 해체하기”, 음악논단 46집, 2021
  • 조현준,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박수인

박수인

음악과 음악활동을 하는
우리에 관해 생각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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