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언제나 경멸적으로 공예와 결합되어왔다.”
_루시 리파드(Lucy Lippard), 『The Circle』
페미니스트 미술 평론가 루시 리파드는 에바 헤세(Eva Hesse)에 대한 자신의 비평에서 여성과 공예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다. 에바 헤세의 작업을 1970년대 미국의 본질주의 페미니즘과 성급하게 연결하고자 하는 리파드의 비평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음에도, 저 문장에서만큼은 리파드가 공예와 여성의 관계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저 문장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여성은 언제나 ‘경멸적으로’ 공예와 결합되어왔다.”
왜냐하면 공예는 역사적으로 온전하게 여성의 영역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위대하지 않고, 사소하며, 가치가 없거나 혹은 적은 것일 때만 여성의 영역으로 규정되어왔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미국 분리주의 페미니스트 미술의 전략:
공예와 순수예술의 영역 허물기
노르마 브루드(Norma Broude)는 1982년의 저작 『미리엄 샤피로와 <페마주>: 20세기 장식미술에서의 장식과 추상의 갈등』에서 장식예술이 20세기 추상 미술의 배타적인 세계관에 의해 고급예술의 자리에서 밀려나, 상업 예술가의 가내 수공업 제품, 여성, 농민, 야만인 등의 개념과 함께 저급예술로 취급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브루드의 저술에 따르면,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마티스(Henri Matiss) 등의 남성 모더니스트 미술가들의 작품이 공예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이 사실은 과거의 미술사 서술에서 의도적으로 은폐, 축소되어왔다.
브루드에 따르면 미리암 샤피로(Miriam Schapiro) 등의 많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은 이러한 추상미술의 성차별적이고 위계적인 이분법에 저항하여, 장식예술과 공예를 다시 고급 예술의 영역으로 격상하고, 이를 통해 여성을 다시 미술의 능동적이고 주요한 생산자로 인정받게 하도록 노력해왔다. 그러나 브루드가 남성 모더니스트 미술가들을 분석하면서 밝혀낸 바와 같이, 공예는 역사적으로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이 모두 공예라는 영역에서 활동을 해왔음에도, 왜 1970-1980년대 미국의 1세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은 남성 중심적인 미술계에 반발하는 수단으로 공예에 주목한 것일까. 이들이 어째서 남성 위주의 모더니즘 미술계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공예를 택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주로 관심을 표한 공예가 자수, 방직 등이라는 것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여성이 역사적으로 점유해온 공예의 영역(주로 가정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과 남성이 점유해온 공예의 영역(대게 산업과 전문적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은 분명히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신화 속의 공예:
아라크네와 디달로스
브루드가 저작에서 지적했듯, 물론 여성은 역사적으로 공예와 항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여성은 베를 짜는 존재였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토기에서 공예에 열중하는 여럿 여성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 디달로스가 차지하는 역할과 아라크네가 차지하는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디달로스는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도 스스로의 ‘재주’ 덕에 평안한 말년을 보냈지만, 염색공의 딸로 태어나 뛰어난 직조 실력을 가졌던 아라크네는 자신의 재주를 과시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의 저주를 받아 거미가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경합을 통해 탄생한 아라크네의 뛰어난 작품은 신의 분노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고 만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여성이 가정이 아닌 영역에서 예술에 뛰어난 기량을 떨치려면 남성 기술자와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있어야 했으며, 자신의 실력에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라크네를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와 비교해 봐도 여성에게 고대 그리스 사회가 요구한 덕목이 실력과 성취보다는 가정적 면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넬로페도 아라크네처럼 출중한 베 짜는 능력을 가졌으나, 이를 정절과 가정을 지키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는 남편이 출정을 나간 사이 무수히 많은 밤 베를 짜지만,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재가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이 만든 작품을 아침이 오면 풀어버린다. 결국 아무 작품도 완성으로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라크네와 페넬로페의 작가로서의 운명은 닮아있다.
중세의 길드: 여성의 배제
중세에 이르면 여성은 점점 더 공예에서 자신의 영역을 빼앗긴다. 바로 길드라는 남성 중심 체제가 중세 도시의 주요한 생산을 점유했기 때문이다. 마리얀 코왈스키(Maryanne Kowaleski)와 주디스 베넷(Judith M. Bennett)의 글 『중세의 공예, 길드, 그리고 여성 Crafts, Gilds, and Women in the Middle Ages: Fifty Years after Marian K. Dale』에 따르면 중세 실크를 직조하는 여성들은 길드에서 대게 배제되어 있었으며, 길드에 소속된 남성과 사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매우 소수의 여성만이 길드에서 활동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중세 사회에서 여성들이 독자적인 길드를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남성은 정당한 기술자로 인정받으며 길드의 보호 속에서 공예품을 생산하고 판매할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중세 여성은 오히려 길드 체제로 인해 공적 생산 시장에서 배제되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는 장인 제도를 형성하며 이들이 일종의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이는 공예에 종사하는 여성을 새롭게 형성되는 예술적 소명의식에서 배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산업혁명: 공예의 분화
18-19세기 영국에서 공예, 특히 자수는 여성의 가정적 특성을 강조하는 요소였을 뿐 아니라, 여성 사이의 계급적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었다. 이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직물과 자수가 대게 공장을 통해 생산되었다. 더 이상 직물 자체를 생산하기 위해 숙련된 전문가를 다수 양성할 필요가 없어지고, 직물 생산은 장인이 아닌 노동자의 몫이 되었다. 따라서 영국 사회에서 자수와 직물 생산은 두 가지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하나는 젠트리 여성이 구사하는 교양으로써의 자수와 직물 생산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의 생계수단으로의 자수와 직물 생산이다. 19세기 젠트리 여성에게 자수는 엘리자베스 1세 시기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여성의 교양이었다. 마리아 브라운릭(Maria Brownrigg)이 “야라 코티지에서의 저녁, 포트 스티븐스 An evening at Yarra Cottage, Port Stephens”에서 묘사한 수예에 몰두하는 19세기 젠트리 영국 여성의 모습에서 이러한 면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 속에서 마리아 브라운릭의 가족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의 포트 스티븐스에 머물면서도 영국적 생활 양식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에 등장하는 브라운릭의 딸들은 안전하고 세련되게 꾸며진 가정 안에서 편지를 쓰거나 자수를 놓으며 얌전한 자태로 저녁을 보낸다. 그리고 화가인 마리아 브라운릭 역시 화면 밖에서 수채화를 그리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수는 당시 젠트리 여성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처럼 그녀의 (능숙하지만 동시에 소박한) 여성적 재주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직조와 자수는 영국의 가난한 하층민 여성의 몇 안 되는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가스켈(Elizabeth Gaskell)의 『메리 바르통Mary Barton』의 여주인공 메리 바르통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공장에서 여성복을 짓는 일을 하게 된다. 19세기 영국에서 방직, 자수 공장의 업무는 공장에서 가난한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한정된 수단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세기 여성들이 생산한 이른바 ‘특수계급을 위한 수공예와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저급 공예품’은 양자 모두 당시 길드라는 고딕 시대의 생산 양식을 예찬하는 남성들의 주도로 일어난 ‘미술과 공예 운동(Art and Craft movement)’에서 거센 비판을 받는다.
공예의 두 가지 사회적 영역:
공적인 공예와 사적인 공예
브루드가 글에서 주요한 대조의 대상으로 삼은 각각의 미술가는 따라서 매우 다른 장식 예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칸딘스키에게 영향을 준 ‘미술과 공예운동’은 장식예술에서 여성을 지속적으로 배제해온 길드 생산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티스에게 영향을 준 거대한 벽화와 태피스트리 장식도 마찬가지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공방과 장인이라는 남성중심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마티스, 칸딘스키가 자신의 예술에 차용한 공예는 역사적으로 주요한 생산 수단으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장인정신이 깃들어있다고 여겨진 공적인 공예다.
그에 비에 미리암 샤피로의 작품은 역사적으로 여성이 주로 점유한 공예의 영역을 드러내고 있다. 샤피로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장식은 대부분 여성의 사적인 생산물이다. 레이스, 직물의 자투리 등의 장식들은 공예에서 사적인 영역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런 사적인 공예는 항상 그 가치를 쉽게 폄훼당하고는 했다. 사피로가 이러한 소재를 선택한 데에는 그의 심리적 선호뿐 아니라 여성에게 속하는 공예품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0세기 여러 미술가들이 공예를 자신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방식에는 브루드가 자신의 글에서 날카롭게 분석해냈듯 그들이 장식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심리적이고 사적인 요소가 녹아들어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공예에서 점유하던 영역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공예와 여성의 상관관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예를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하기보다는(이는 브루드가 지적한 것처럼 20세기 추상미술의 성차별적 이분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공예의 역사적 흐름을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여 공예에서 여성과 남성, 또 부르주아 계급 여성과 노동자 계급 여성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를 밝혀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미시적인 분석을 통해서만 공예가 ‘고급예술’에서 배제되고 폄하되던 역사를 면밀하게 드러내고, 역사적으로 공예라는 영역에서도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 넣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공예는 언제나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공예가 위대하지 않다고 여겨졌을 때, 여성적이라고 불리었을 뿐이다.
- Norma Broude, Miriam Schapiro and <Femmage>: Reflection on the Conflict Between Decoration and Abstraction in Twentieth-Century Art,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