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예술로 다가오는 순간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

다채로운 관점으로
바라본 호퍼의 세계
Edited by

도시의 화가는 도시의 사람들을 부릅니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엔 도시의 면면을 그렸던 에드워드 호퍼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필자도 그 현장에 있었는데요. 그러나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끌려다니다 보니 전시 여운을 느낄 새 없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점차 잊는 것 같아 안타깝던 때였습니다. 마침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줄 책을 한 권 찾았습니다. 전시장에 있었지만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작품은 물론이고,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까지. 생생한 세계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15가지 관점으로 읽어내는 그림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 뒷면
이미지 출처: 은행나무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 앞면
이미지 출처: 은행나무

이 책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총 55점을 15가지의 다양한 관점으로 읽어냅니다. 목차를 이루는 키워드가 곧 관점이 됩니다. 호퍼가 했던 말들이 목차마다 덧붙여져 주제를 열어젖힙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단어들에 대해 ‘화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화면을 구성하는 책략을 헤집어 보기 위한 수단’이라고 명명합니다.

예술가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그림, 행위, 노래, 시 등으로 ‘제시하기’를 택합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꺼내어 작품으로 직접 보여주는 건데요. 그러나 의도했던 바나 예술가가 지나온 시간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작품을 해석하여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작품과 관객 간 거리가 너무 멀면 예술이 어려운 대상으로만 남게 되고, 너무 가까우면 그건 예술이 아닐 테니까요.

이 책에서는 그 역할을 도시, 시선, 빛과 어둠 등 직관적인 키워드가 수행합니다. 전문 용어와 난해한 이야기는 배제하고, 쉬운 단어와 독특한 감상법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재밌는 점은, 저자가 호퍼를 파헤치는 여정에 함께 하다 보면 작품을 넘어 해석 속에서도 새로운 영감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키워드가 작품을 더 면밀히 들여다볼 길잡이인 것이지요.


솔직한 독백이 주는 웃음

에드워드 호퍼, “푸른 저녁”, 1914
에드워드 호퍼, “푸른 저녁”, 1914, 이미지 출처: Artvee

우리는 날 것의 이야기에 웃기도 합니다. 점잖은 체해야 할 자리에서 솔직함과 거리가 멀어 보이던 사람이 예상을 뒤엎는 말을 할 때처럼 말이지요. 정적인 순간에 생긴 균열 사이로 정제되지 않은 유머가 흐르는데요. 이 책도 같은 결의 해방감을 줍니다.

쉽사리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과 뚜렷한 명암 대비는 공포 영화처럼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이는 진지한 자세로 그림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저자는 느낀 바를 가감없이 표현합니다. 가령 ‘호퍼는 유독 허벅지를 못 그린다’(p.25), ‘호퍼는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p.66) 등의 문장들입니다. 굳은 얼굴로 그림을 천천히 뜯어보다가도 저자가 중간중간 만들어 놓은 숨구멍에 푸시시 웃음이 터집니다.

위트는 웃음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작품의 매력도 강조합니다. 호퍼의 세계에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오묘함이 있습니다. 저자는 독자를 대신해 이 부분을 명료하게 짚어냅니다. 예를 들어, 광대는 즐거움을 자아내는 존재여도 독자는 웃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호퍼가 예술가로서 미래에 대해 품었던 불안을 ‘낙담한 광대’에 투영했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음울한 기운을 느끼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처럼 무대 뒤를 엿보는 기분이 들지요. 분장을 지운 광대가 본연의 어두운 시간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겁니다. 이렇듯 비가 완전하지 않아도, 관객을 공범으로 몰아가도, 자꾸 그림들에 끌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당신이 몰랐던 호퍼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는 사람들”, 1942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는 사람들”, 1942, 이미지 출처: Artvee

호퍼는 소재를 주변에서 찾았습니다. 조각난 햇살이 걸리는 방, 익명의 사람들, 풍경이 뒤로 가는 기차 안 등 사실적인 풍경에 상상력을 더해 평평한 회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몰래 찍은 스냅 사진처럼 묘사됩니다. 다음 동작으로 향하기 직전을 포착한 건데요.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 속 인물은 비슷한 얼굴들을 하고 있습니다. 초점 없는 시선, 누구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이목구비 등이 그러합니다.

그의 그림이 주목받기 시작했던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이 호황기를 맞았던 시기입니다. 도시민들은 질리도록 화려함을 겪었기 때문에 그림에서 반대되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극과 극은 통하니까요. 그래서인지 호퍼는 지금까지도 고독을 그린 화가로 불립니다. 그러나 ‘고독’은 호퍼의 많은 부분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The loneliness thing is overdone.”

_에드워드 호퍼, 게일 레빈, 『Edward Hopper : The Complete Prints』, 1979

실제로 생전 인터뷰 중 호퍼는 ‘고독이 과하게 언급됐다’며 싫증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도 고독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열 다섯 가지 키워드 중 하나에 두되, 시선과 권력이 개입하는 ‘에로티즘’에 더 주목합니다. 19세기 에두아르 마네가 나체로 화면 바깥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여성 인물을 공개해 관객들의 허를 찔렀던 것을 예로 듭니다. 그림을 쳐다보는 쪽만이 권력을 지닌 건 아니라면서 말이지요. 저자는 미술사가답게 알아두면 좋을 미술사적 사실을 끌어와서 호퍼와 연결합니다. 그림 속에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곳곳을 함께 짚습니다. 그간 덧씌워졌던 고정관념을 벗겨서 더 넓은 시선으로 아티스트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호퍼의 세계를 유영하고 마지막 장을 덮으니 다채로운 시선이 마음 속에 남았습니다. 건물을 이루는 아름다운 직선, 수평적 구도가 주는 안정감, 측면에서 묘사되는 긴장감, 저마다의 박자로 걷는 사람들, 햇빛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창문 등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놓쳤던 부분이 다시 보였습니다. 그 눈은 어떤 세상을 봤던 걸까요? 이 책과 함께 그 시선을 따라가며 감각을 풍요로이 채워보시면 좋겠습니다.

해당 아티클은 은행나무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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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 of 원윤지

원윤지

미술 에디터.
작은 것에서도 의외성을 찾아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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