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나이 통일은
숫자놀이에 불과할까

만 나이 통일법 본격 시행
나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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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8일, 법적·사회적 나이를 만 나이로 통일하는 이른바 ‘만 나이 통일법’이 전격 시행되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세는나이’, ‘연 나이’, ‘만 나이’의 3가지 나이 계산법을 혼용해 왔다. 한국식 나이로도 불리는 ‘세는나이’는 태어나자마자 1살로 시작해 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씩 증가하는 셈법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는 태어난 날로부터 1년이 지나면 1살이 되는 ‘만 나이’가 통용되고 있다. 온전히 1년을 다 채워야 나이를 한 살 더 먹기 때문에, ‘찰 만(滿)’자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나라에서도 행정·법령상으로는 만 나이를 표준으로 하였으나 일상생활에서는 세는나이를 쓰고, 병역법과 청소년보호법 등 일부 법에서는 연 나이를 적용하여 혼선이 이어져 왔다. 최근까지 존재했던 ‘빠른 연생’, 음력 생일을 사용하는 고령층을 포함하면 얘기는 더 복잡해진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추진된 ‘만 나이 통일법’은 나이에 민감한 사회 분위기상 대체로 환영받고 있다. 만 나이를 적용하면 세는나이보다 많게는 2살, 적게는 1살 ‘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선만 가중시키는 탁상행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팽팽하게 맞선다. 만 나이 통일법은 정말 숫자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새로운 변화는 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식 나이는 어떻게 탄생했나

일명 ‘Korean Age’, 즉 ‘세는나이’가 언제나 한국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세는나이는 중화권을 시작으로 일본, 몽골,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쓰인 전통적인 나이 셈법이다. 그러나 일본은 1950년에 법적으로 세는나이의 사용을 금지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세는나이를 사용하지 않게 됐다.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만 나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는 한국의 ‘연 나이’와 동일한 방식의 북한식 세는나이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게 변화하게 된 각 나라의 사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동아시아를 제외한 문화권에서는 모두 만 나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만 나이를 국제 표준으로 지칭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현재 세는나이가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다만 전통적인 셈법은 음력 1월 1일을 기준으로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양력 생일에 따른 출생신고가 보편화된 이후 양력 1월 1일을 기준으로 세고 있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이미지 출처: Crystal Jo, Unsplash

동아시아권에서 세는나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보낸 시간을 존중해 온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태아를 한 명의 인간으로 여기는 생명 존중 의식은 종교적인 이유로 낙태를 죄악시하던 서양에서 먼저 생겨났다. 더불어 이는 세는나이가 만 나이+1살은 될 수 있어도, 만 나이+2살이 되는 경우는 설명하지 못한다. 12월생인 필자는 태어난 날로부터 2주 만에 두 살이 되었으며, 태어난 지 1년하고 2주가 되었을 때 세 살이 되었다. 태아 상태의 10개월을 살아온 세월로 인정하는 반면 탄생일 이후 살아낸 기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에 해당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동아시아권의 0(Zero)의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0은 만들어진 지 400년 정도 된 비교적 신생 숫자이며, 동양에는 0에 대응하는 한자가 없다가 서양 수학이 전래되면서 비로소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 그 근거다. 존재하지 않는 숫자를 나이에 쓸 수 없었기 때문에 1살부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장유승은 이 역시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입장이다. 동아시아 수학 수준은 17세기까지 유럽보다 우위에 있었고 ‘0’의 개념에 대한 인식도 유럽보다 중국이 빨랐기 때문이다. 항간에 떠도는 세는나이의 유래는 전부 낭설이라는 말도 덧붙였다.a)


세는나이가 편했던 이유

정확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한국식 나이 셈법은 우리 일상에 깊숙이 녹아 있다. 꼬꼬마 시절 놀이터에 처음 발을 들이던 그 순간부터 “너 몇 살이야?”라는 질문이 시작되었고,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의 다양한 호칭들이 개인의 관계망을 장악했다. 호칭 실수를 하거나 존댓말과 반말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 즉시 호된 질책과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감내해야 했다. 반면 육십갑자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뜻의 ‘동갑(同甲)’이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친밀감을 상승시키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했다. 동갑이어야 비로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뿌리 깊은 인식 속에서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세는나이’는 서열을 가로 짓는 가장 쉽고 선명한 기준이자, 노력을 통해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진리로 기능했다. 이는 ‘만 나이’가 우리 일상에 좀처럼 정착되지 않는 이유로 손꼽히기도 한다.

숫자 위 사람
이미지 출처: Martin Reisch, Unsplash

왜냐하면 세는나이 셈법이 나이를 기반으로 한 위계를 만드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같은 연도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같은 나이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집단화하기 간편하고 누군가를 배제하기도 쉬워진다. 같은 학급이라도 다른 연도에 태어난 학생은 친구보다는 왠지 특별한 동급생처럼 생각되었던 이유다. ‘빠른 연생’도 세는나이 때문에 생겨난 기현상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어떤 이유로 태어난 연도가 다른지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를 기반으로 한 서열 문화가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보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위아래 10살 정도는 모두가 친구로 지내는 융통성이 존재했다. 한두 살 차이까지 엄격하게 구분 짓는 나이 계급화는 유교문화의 영향이 아닌, 일제강점기 시절 군대식 교육문화에서 비롯된 일제의 잔재라고 봐야 한다.

반면 만 나이를 사용하면 각자의 생일을 기준으로 나이가 바뀐다. 이렇게 되면 모두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 이상 나이를 정확히 판별하기 어렵다. 어제는 동갑이었던 친구가 만 나이를 쓰면 언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법제처에서는 만 나이의 도입으로 친구 사이에서의 호칭을 다르게 쓸 필요는 없다고 안내했다.) 만 나이가 자리 잡게 되면 한 학급에도 나이가 다른 아이들이 생겨날 것이고, 때마다 호칭을 바꿀 수는 없을 터이니 한두 살 차이는 비로소 서열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혹은 나잇값을 못 하고 철없이 행동하는 이를 두고 혀를 차며 하는 말이다. 개개인의 바람과 달리, 우리 사회는 그동안 나이를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취업 시장에서 사회 초년생은 곧 20대라는 공식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결혼 시장에서 여성의 나이는 스펙이 되었고, 각 나이에 도달할 때마다 달성해야 하는 새로운 과업들이 주어졌다. 정해진 시간 안에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타임어택(Time attack) 게임처럼, 특정 나이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이루지 못했을 땐 압박과 불안감이 마음을 짓누르곤 했다.

인간의 생애 주기
인간의 생애 주기, 이미지 출처: 제로(Zero)

이전에 비해 나이를 따지는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빠른 연생 친구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는 나이를 한 살 낮추는 것이나, 만 나이 통일법으로 한두 살씩 어려지게 된 것을 기뻐하며 반기는 우리를 보면, 나이에 대한 압박감은 여전히 한국인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다. 만 나이로 통일된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적 풍토가 쉽사리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나마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게 된 것은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갓생’과 ‘힐링’이 앞다투어 손을 뻗는 사회에서, 무엇이 내게 필요한지 생각할 여유가 잠시라도 생겼으니 말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사람들을 나이별로 구획하는 현상이 흐려짐에 따라, 자신의 동년배를 비교군으로 놓고 좌절하는 일들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나이를 어떠한 평가의 기준으로만 놓지 않는다면, 나이는 숫자를 넘어 인간의 생애 주기가 담겨 있는 삶 자체로 그려진다. 각각의 연령대가 갖고 있는 저마다의 멋과 매력은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났으면 거저 받는 선물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세상은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필자는 함께 일하는 이들의 나이를 모른다. 가끔 궁금할 때도 있지만 함께 과업을 이루어 가는 데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기에 굳이 묻지 않는다. 나이를 묻는 것이 되려 무례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나이에 대한 감각은 점차 무뎌진다. 선입견이 생길 여지조차 없고 나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일상으로의 만 나이 도입은 숫자놀이가 맞다. 이상하고 헷갈렸던 숫자를 바로잡는 일임과 동시에,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숫자를 획득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숫자가 생기는 일이다. 여느 정책이 그렇듯 도입된 초반에는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 여정 속에서 ‘동급생=친구=동갑’이라는 원칙이 깨지고, 서로의 나이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한두 살이 가지는 의미가 퇴색되는 순간, 숨 가빴던 한국 사회는 조금 더 관대하고 여유로워질 것이다.

a) 경향신문, 한국식 나이를 허하라(2019.02.27)

  • 전국매일신문, [최재혁의 데스크席] 한국식 나이(2023.01.05)
  • 매일경제, 조선 유교 사회…나이 서열? 오히려 없었다(2022.12.30)
  • NEWSTOF, 왜 한국만 태어나자마자 한 살인가?(201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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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유림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찾아 모으는 사람.
고이고 싶지 않아 잔물결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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